이집트

이집트

다른 표기 언어 Egypt 동의어 이집트 아랍 공화국, Arab Republic of Egypt
요약 테이블
위치 아프리카대륙 북동부
인구 114,484,252명 (2024년 추계)
수도 카이로
면적 996,603㎢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이집트 아랍 공화국 (The Arab Republic of Egypt)
기후 건조성기후
민족 구성 이집트인(98%), 베르베르인, 누비아인
언어 아랍어
정부/의회형태 공화제 / 단원제
종교 이슬람교(90%), 콥트교회(9%)
화폐 이집트 파운드 (LE) 환율계산기
국화 수련
대륙 아프리카
국가번호 20
GDP USD 237,073,000,000
인구밀도 115명/㎢
전압 220V / 50Hz
도메인 .eg

요약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역사를 가진 나라 중 하나. 이집트는 동쪽으로는 이스라엘·아카바 만·홍해와 접해 있고, 남쪽은 수단, 서쪽은 리비아, 북쪽은 지중해로 둘러싸여 있다. 이집트에는 겨울과 여름의 두 계절만 있다. 겨울은 서늘하고 온화하며, 여름은 일반적으로 무덥다. 이집트의 종교는 이슬람교이며,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한다. 이집트는 부분적으로 자유기업을 인정하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가진 개발도상국이며, 산업의 약 70%가 국유화되어 있다.

목차

접기
  1. 자연환경
  2. 국민
  3. 경제
  4. 정치와 사회
  5. 문화
  6. 역사
  7. 이집트와 한국과의 관계
    1. 외교
    2. 경제·통상·주요 협정
    3. 문화교류·교민 현황
이집트의 국기
이집트의 국기

수도는 카이로이다. 남북길이 1,055km 남쪽 국경선에 면한 동서 최대너비는 1,250km다.

동쪽으로는 이스라엘과 아카바 만, 홍해와 접해 있고, 남쪽은 수단, 서쪽은 리비아, 북쪽은 지중해로 둘러싸여 있다.

지도
이집트

자연환경

이집트는, 경관의 지배적인 특징인 북류하는 나일 강에 의해 크기가 다른 극도로 건조한 두 지역으로 나뉜다. 보다 큰 사막지대인 서부 사막(앗사흐라알가르비야)은 와디(건천)가 없는 낮은 대지이며, 보다 작은 동부 사막(앗사흐라앗샤르키야)은 석회암과 사암층의 대지로 와디에 의해 널리 개석되어 있으며, 남동부에는 험준한 산들이 솟아 있다.

동부 사막의 북동부에 있는 시나이 반도에도 와디가 많다. 시나이 반도 남부 산지에는 해발 2,642m의 이집트 최고봉인 캐서린(카트리나) 산이 있으며 동부 사막의 홍해 구릉지대(이트바이)에는 해발 1,800m가 넘는 산이 많다. 나일 강은 이집트 영내에서는 중요한 지류가 없으며, 가파른 벼랑들 사이에서 대략 8∼16km 너비의 바닥이 평평한 유역을 따라 흐르다가 카이로 북쪽에서 부챗살 모양으로 갈라지며 삼각주 저지대를 이룬다.

이 삼각주는 길이 160km, 너비 240km로 인구가 조밀하고 연중 관개가 이루어지는 지역이다. 자연 식생은 지역에 따라 다르다. 건조한 서부 사막은 대체로 생명체가 없는 지역이지만, 수분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사막의 다년생식물과 풀이 자란다.

서부 사막보다 덜 건조한 동부 사막에는 이따금 비가 내려 몇몇 종류의 식물이 자랄 수 있는데 그중에는 타마리스크, 아카시아 및 수많은 종류의 가시관목, 작은 다육식물들, 방향성의 약초들이 있다. 나일 강 유역과 삼각주, 그리고 산재하는 오아시스들에서 이집트 농업의 거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며 인구의 99% 이상이 여기에 거주한다.

이집트에는 겨울(11∼3월)과 여름(5∼9월) 두 계절만 있다. 겨울은 서늘하고 온화하며(알렉산드리아에서의 1월평균기온은 11∼18℃), 여름은 일반적으로 무덥다(카이로의 7월평균기온은 29℃). 연강우량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약 175㎜ 카이로에서 약 25㎜ 남부의 아스완 부근이 약 2.5㎜로 지역에 따라 편차가 심하다. 또한 홍해 연안 평야에는 강우가 거의 없다. 광물매장량은 보통 수준이며, 철광, 석유, 천연 가스, 석고, 인산염과 우라늄 등이 산출된다.

국민

이집트 국민은 신체적인 특징상 상당히 동질적인 집단을 이루는데, 이는 셈족과 함족의 피가 섞였기 때문이다. 나일 강 삼각주의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상(上)이집트(즉 나일 강 상류 유역의 남부 이집트) 주민들보다 중동의 다른 지역 및 유럽과 더 많은 접촉을 가져왔다. 소수민족 집단으로는 나일 강 유역 남부의 누비아인, 동부 사막 남부의 함족 계통의 베자인, 서부 사막의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족이 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럽인은 얼마 되지 않는다.

거의 13세기 동안이나 아랍어가 이집트의 문어이자 구어였다. 639년 아랍인이 침입하기 이전에는 고대 이집트어의 직계 언어인 콥트어가 종교와 일상생활에서 다 같이 통용되는 언어였다. 그러나 12세기까지는 거의 아랍어로 대체되었고, 콥트어는 콥트 교회에서 전례용(典禮用) 언어로만 존속하고 있다. 이집트의 공인 종교는 이슬람교이며, 국민의 약 90%가 이슬람교도인데,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한다. 종교적으로 소수인 그리스도교도는 대부분 콥트교도들이다.

출생률과 사망률은 북아프리카의 평균수준이다. 연인구증가율은 세계 평균치보다 상당히 높은 편이며, 유아사망률 역시 높다. 국민의 1/3가 15세 미만이다(2022). 정부는 신생아와 아동의 높은 사망률을 줄이기 위해 산모와 어린이를 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수준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특히 학령아동의 건강 관리에 비중을 두고 있다. 2024년 추계인구는 1억 1,448만 4,252명이다.

입국이민이나 출국이민은 전통적으로 아주 적었으나 국외로 이주하거나 외국에서의 임시취업을 원하는 사람의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인구는 비옥한 나일 강 삼각주에 크게 밀집, 카이로 도시주(都市州)를 포함한 하(下)이집트 지방에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거주한다. 그러나 전체 이집트인의 절반은 아직도 시골생활을 한다. 20세기 동안 도시화가 꾸준히 진행되어왔지만, 수치상으로 나타난 도시화의 일부는 시골의 성격이 많이 남아 있는 여러 부락들을 중소도시로 지정한 행정제도의 개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경제

이집트는 부분적으로 자유기업을 인정하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가진 개발도상국이다. 국민총생산(GNP)은 인구증가율보다 더 높은 증가율을 보이고 있지만, 1인당 GNP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다. GNP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부문은 공업이며, 그뒤를 농업, 공공사업과 방위산업, 무역과 금융이 잇고 있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20%를 차지하지만, 농업 종사자는 전체 노동인구의 40%를 넘는다.

이집트의 가경지는 거의 전적으로 나일 강 유역과 삼각주에 한정되어 있으며 관개는 필수적이다. 1970년 아스완 하이 댐이 완공됨으로써 나일 강의 연례적인 홍수를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환금작물이 가경지의 약 3/4을 차지하며, 사탕수수·토마토·면화·수박·오렌지·양파·감자 등의 수확량이 가장 많다. 국내 식량작물로는 옥수수·쌀·밀·기장·호박 등이 있으며 대추가 특히 많이 재배된다.

인구가 급증하고 많은 농지가 환금작물의 재배에 충당되기 때문에 국내 소요 식량의 절반 이상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초지는 없지만 농장과 부락들에서 가축을 기른다. 흔히 볼 수 있는 가축으로는 물소·소·당나귀·양·염소 등이 있다. 닭·오리·비둘기 등이 사육되고, 시골에서 역축으로도 이용되는 물소와 젖소로부터 우유를 얻으며, 당나귀는 운송용으로 널리 이용된다.

어업은 상당히 선진화되었다. 총어획고의 약 4/5가 민물고기이고 그 나머지가 바다물고기이다. 지중해 연안 어업은 아스완 하이 댐이 강물 매개의 영양소를 차단하는 바람에 쇠퇴했지만, 그대신 아스완 하이 댐 배후에 조성된 나세르 호에는 풍부한 어장이 형성되었다. 광업은 석유와 천연 가스의 채취가 주종을 이루며 제조업을 합쳐 GDP의 22%를 차지한다. 광업은 노동인구의 0.3%를, 제조업은 16%를 차지한다. 주요제품은 정유제품, 시멘트, 면직·모직의 직물과 의류, 밀가루 등이다. 고대와 중세의 기념물들, 온화한 겨울기후, 지중해안의 해수욕장과 휴양지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이집트는 산업의 약 70%가 국유화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5개년 계획을 세워 경제를 관리하며, 자유기업과 외국의 투자를 장려한다. 수에즈 운하의 소통이 1975년 재개되고 석유와 천연 가스가 생산되면서 경제는 호전되었으며, 외국의 자본 투자가 개발계획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총노동력은 인구의 약 1/4을 차지하며, 노동조합 활동은 합법화되어 있다. 높은 인구증가율 때문에 이집트는 계속 저개발의 진통을 겪고 있다. 국가의 예산 수입은 주로 세금으로 충당되는데, 세출이 세입을 초과하는 것이 보통이다.

철도망은 국유회사인 이집트철도에서 운영한다. 도로의 포장률은 70% 이상이다. 내륙수로는 총길이가 3,200km를 넘는데, 160km가 넘는 수에즈 운하를 제외하면 전부가 나일 강 수로이다. 수에즈 운하로는 해마다 2만여 척의 배가 지나다닌다. 정부 소유의 이집트항공에서 국제·국내 항공편을 제공한다. 수출은 주로 원유와 정제품 및 면직물과 면사로 이루어지며, 이집트의 최대수출국은 이탈리아이다. 수입액은 통상 수출액보다 훨씬 많다. 주요수입품은 식료품, 기계류와 전기기구, 수송장비, 화학제품 등이며, 주로 미국·독일·프랑스로부터 수입한다. 해외근로자들의 송금이 큰 폭의 무역적자를 줄이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이집트의 화폐
이집트의 화폐

정치와 사회

이집트의 정치제도는 강력한 행정부에 의해 좌우된다. 6년 임기의 대통령은 국회의 지명을 받아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되며(연임 가능), 국가원수와 군최고사령관직을 맡는다. 또한 부통령·총리·내각과 단원제 국회인 인민의회의 의원 454명 가운데 10명을 임명한다.

국회는 정부의 정책을 심사하고 승인하는 것을 주요임무로 하며, 국회의원은 5년 임기로 일반투표에 의해 선출된다. 이집트는 제한된 복수정당제도를 운영한다. 여당인 국민민주당은 충성스런 야당의 존립은 장려하지만 공산주의자들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정당을 결성하여 정권 경쟁에 나서는 것은 금지한다. 1971년에 채택된 이집트 헌법은 최고사법권을 최고헌법재판소에 부여하고 있다.

사회복지제도는 대부분의 종업원을 대상으로 하며, 근로상해·실직·노령·사망·출산·신체장애·질병 수당을 지급한다. 또한 상당수의 무료 보건소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는 위생조건의 열악, 영양부족, 만성적인 무기력증, 지방의 의료인 부족과 같은 보건상의 문제들로 계속 골치를 앓고 있다. 이집트국민의 평균수명은 남자 59세, 여자 62세이다.

일반 공립교육은 초등(6년)·예비(3년)·중등(3년)의 3단계로 되어 있다. 6∼12세의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계속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는다. 정부의 일반교육제도와 병행하여 이슬람교 기관들이 제공하는 교육제도가 있다. 알아자르대학교(970 설립)는 세계 유수의 이슬람·아랍 학문의 중심지이다. 교육 서비스의 확대에도 15세 이상의 주민 가운데 55%가 문맹자일 정도로 이집트의 문맹률은 여전히 높다. 이집트의 언론은 1973년 검열이 해제된 이후 비교적 자유롭게 정치·경제 문제들을 비판하고 있다. 전파 매체는 정부에서 관리한다.

이집트 카이로 모감마(Mogamma)
이집트 카이로 모감마(Mogamma)

문화

사회적·문화적인 전통이 아랍·이슬람의 전통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이집트 문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범세계적이며 서구의 영향을 많이 드러낸다. 서구의 충격은 현대 이집트 소설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주제의 하나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로 198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겸 시나리오 작가 나기브 마푸즈가 있다.

나기브 마푸즈
나기브 마푸즈

이집트의 현대극은 유럽의 수입판이다. 이 현대극의 발전은 세기의 변환기에 태어난 2명의 극작가 마흐무드 타이무르와 타우피크 알 하킴이 주도했다. 대중음악은 아라비아의 고전음악·민요·서양음악이 뒤섞여 이루어졌는데 무하마드 아브드 알 와하브는 작곡가겸 가수로서 이 분야의 발전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움 쿨숨은 거의 50년 동안 이집트뿐만 아니라 아랍 세계 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성악가였다.

역사

이집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역사를 가진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BC 2925년경에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통일되었는데, 이는 메네스 왕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통일로 인해 이집트 문명은 절정기에 들어섰고, 이후 약 3,000년 동안 본토 출신들이 계속해서 지배자의 위치를 이어갔다. 역사가들은 31개 왕조에 걸쳐 BC 332년까지 계속된 이집트의 고대사를 고왕국·중왕국·신왕국으로 구분한다.

피라미드는 고왕국의 유산이며, 오시리스 숭배와 조각의 세련미는 중왕국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제국시대와 유대인의 출애굽은 신왕국에 속한다(→ 이집트 미술, 이집트 법, 이집트 종교).

아시리아의 침략은 BC 7세기에 일어났으며,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이 이집트에 왕조를 세운 것은 BC 525년이었다.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략으로 마케도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이 왕조시대에는 이집트의 통치자들이 헬레니즘 세계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건립된 알렉산드리아 시는 헬레니즘뿐만 아니라 셈족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머지 않아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이 최고의 발전을 이룩하는 데 구심점이 되었다.

로마인은 BC 30∼AD 395년에 이집트를 점령했으며, 그후 이집트는 행정적으로 동로마 제국(뒤의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도들에 대한 관용령을 내림으로써 이집트의 공식 교회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오리게네스·클레멘스와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활동 무대였다. 비잔틴 제국의 이집트 지배는 비잔틴 군대가 아라비아의 침략군과 3년의 무력 충돌 끝에 이집트에서 철수한 642년에 끝이 났다. 그후 200∼300년 내에 이집트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나라로 바뀌었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집트는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의 일부였다.

그후 969년에는 파티마 왕조 칼리프국의 중심이 되었으며, 상당한 독립과 중요성을 획득했다. 1171년에 이어 이집트는 아바스 왕조의 지배로 귀속되었다.

아바스 왕조 칼리프국이 무너지고 맘루크들이 득세한 것은 1250년의 일이었다. 맘루크들은 아라비아 세계의 군대를 증강하기 위해 이용된 비아라비아·비이슬람의 노예들이었다. 그들이 이집트에 세운 왕조는 1517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이집트를 이슬람 세계의 동부 아랍어 사용권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때까지는 이집트의 아랍화가 거의 완성되었다.

1517년에 이집트는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되어 이스탄불(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스리는 속주로 되돌아갔다. 맘루크 왕조 말기에 시작된 경제의 쇠퇴는 계속되었고, 그와 함께 이집트 문명도 쇠퇴했다. 1798년 프랑스군의 침략은 불과 몇 년 동안이었지만 이집트를 유럽의 정치무대로 끌어들이는 데 충분했다.

프랑스군이 떠난 뒤 이집트는 무하마드 알리의 수중에 들어갔다. 알바니아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알리는 오스만을 명목상의 종주국으로 하는 하나의 왕조와 제국을 일으켰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의 치부(致富)와 팽창주의 정책으로 인해 이집트는 영국에 막대한 빚을 졌고, 영국은 1882년 내란의 와중에 기회를 틈타 이집트를 점령했다(대영제국).

이집트는 191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1922년 명목상의 독립을 얻고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1952년 쿠데타로 군주제가 타도되고, 가말 아브델 나세르가 2,000년 이상의 역사 속에서 최초의 이집트 본토 출신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그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잠시나마 시리아 및 예멘과의 연방 수립을 시도했으며, 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했다. 1956, 1967년에 이스라엘과 2차례 전쟁을 치렀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의 후계자인 안와르 엘 사다트는 나세르가 시행했던 강도 높은 사회주의 정책의 일부를 파기하려 했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공격해(1973) 시나이 반도의 작은 영토를 되찾았다.

그후 중동평화회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1981년 10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밑에서 부통령직을 맡고 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그뒤를 계승하여 사다트의 평화주도정책을 계속했으며, 1982년 이집트는 1967년에 잃었던 시나이 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회복했다.

이집트와 한국과의 관계

이집트와 한국
이집트와 한국
외교

이집트와 한국은 1961년 12월 영사관계를 맺었다. 이듬해 1962년 5월 카이로에 한국 총영사관이 설치되었다. 이후 1995년 4월에 대사급으로 격상되었으며, 한국은 1995년 5월에 주 이집트 한국대사관을 개설했다. 이집트는 1995년 6월에 주한 대사관을 개설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건설업체가 이집트에 진출해 큰 성과를 올렸다. 이집트는 1999년 4월에 무바라크 대통령이 국빈 방한한 이후 각 부처 장관의 방한이 이어졌다. 한국은 1999년 2월에 김종필 국무총리, 2006년 3월에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했다. 2014년 이후 3차례 양국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한편 이집트는 북한과 1963년 8월에 국교를 수립하고 상주공관을 설치했으며, 카이로에 북한문화원을 두고 있다. 이집트와 북한 양국 사이에는 과학기술협정, 군사원조협정, 해운협력협정 등이 체결되어 있으나 두 나라의 교역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않다. 1980년대부터 이집트가 실리외교에 치중하자 실질적인 교류는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한국에게 이집트는 수입 89위, 수출 42위의 무역상대국이다(2017년 기준). 2023년 기준 이집트의 대한국 수출액은 7,582만 달러, 수입액은 11억 409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천연가스, 광물성 연료, 비트펄프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프로필렌 공중합체, 철강 등이다. 양국이 체결한 협정으로는 문화협정(1968년 8월), 항공협정(1979년 9월), 전력기술협정(1985년 6월), 무역협정(1996년 3월), 사증(비자)면제협정(1998년), 원자력협력 협정(2001년 8월) 등이 있으며, 2006년 3월에 투자협력 양해각서와 수출보험협력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한편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한국 기업의 이집트 시장 진출을 돕기 위해 카이로무역관을 설치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2005년 9월에 아인샴스대학에 아랍권에서는 최초로 한국어과가 개설되었으며, 해마다 카이로에서는 케이팝(K-pop) 경연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또한 한국·이집트 친선협회가 결성되어 있어 양국 간의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014년 10월에는 한국의 문화, 예술, 역사, 사회, 스포츠 등을 이집트에 소개하고 한국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수도 카이로에 아랍권 최초의 한국문화원이 설립되었다.

2023년 기준 이집트에는 1,005명의 재외동포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는 2023년 기준 2,526명의 이집트 국적의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자료

  • ・ 외교부
  • ・ 주 이집트 대한민국 대사관
  • ・ 한국무역협회 통계
  • ・ 외교부 재외동포 현황(2023년 기준)
  • ・ 법무부 등록외국인 국적별 현황(2023년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