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루크

맘루크

다른 표기 언어 Mamluk

요약 9세기초 이슬람권에서는 군사의 대부분을 맘루크로 충당했다. 이것은 아바스 왕조 칼리프 알 무타심이 바그다드에서 처음 시행한 이후 곧 이슬람 세계 전체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예외없이 거의 동일한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 노예들은 군사력을 이용해 기존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했는데, 이것은 대개 단기간에 끝났지만 놀라울 정도로 오랜 기간 계속되기도 했다. 알 무타심이 죽자 곧바로 칼리프 제도 자체가 투르크 출신의 맘루크 장군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칼리프 제도는 합법적 권위의 상징으로 계속 존속했지만 실권은 맘루크 장군들이 쥐고 있었다. 13세기가 되자 맘루크는 이집트와 인도에 자신들의 왕조를 세웠는데 이들 왕조의 술탄은 모두가 노예 출신이거나 노예의 자손들이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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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맘루크 왕조
  2. 오스만 제국에서의 맘루크

중세 때 여러 이슬람 국가들의 통제권을 장악했던 노예 군단의 병사를 일컫는다(→ 노예제). 아이유브 술탄국 때 맘루크 장군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1250~1517년 이집트시리아를 통치한 왕조를 세웠다.

맘루크라는 이름은 노예를 뜻하는 아랍어에서 유래했다. 9세기초에는 군사의 대부분을 맘루크로 충당하는 것이 이슬람 문화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이것은 아바스 왕조 칼리프 알 무타심(833~842)이 바그다드에서 처음 시행한 이후 곧 이슬람 세계 전체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예외없이 거의 동일한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 노예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군사력을 이용하여 기존의 합법적인 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했는데, 이것은 대개 단기간에 끝났지만 몇몇 경우는 놀라울 정도로 오랜 기간 계속되었다.

따라서 알 무타심이 죽자 곧바로 칼리프 제도 자체가 투르크 출신의 맘루크 장군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들은 거의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으면서 칼리프를 쫓아내거나 살해했다. 칼리프 제도는 합법적 권위의 상징으로 계속 존속했지만 실권은 맘루크 장군들이 쥐고 있었다.

13세기가 되자 맘루크는 이집트와 인도에 자신들의 왕조를 세웠다. 이들 왕조의 술탄은 모두가 노예 출신이거나 노예의 자손들이었다.

맘루크 기병
맘루크 기병

맘루크 왕조

맘루크 왕조(Mamluke)
맘루크 왕조(Mamluke)

이집트와 인도에서 시작한 노예 후손들이 만든 맘루크 왕조(1250~1517)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했다.

그들의 후예는 오스만 제국 점령(1517~1798) 시기에도 이집트에서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1169년 이집트의 통치권을 장악한 쿠르드족 출신 장군 살라딘은 그당시 이슬람군 전통을 그대로 답습해서 자신의 군대에 쿠르드·아랍·투르크족 들과 그밖의 다른 자유민을 기용하고 여기에 노예 군단을 더 추가시켰다. 후계자들도 이러한 방법을 따랐고 알 말리크 앗 살리흐 아이유브(1240~49 재위)는 왕조 내의 적대세력과 십자군에 대항하여 자신의 술탄 지위를 보호하기 위해 투르크인 등의 노예를 가장 많이 사들인 사람으로 유명하다.

1249년 그가 죽자 술탄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나 맘루크 장군들은 아이유브 왕조의 후계자를 죽이고 자신들 중 1명을 술탄으로 추대했다. 이로부터 250여 년 간 이집트와 시리아는 맘루크와 그 자손들의 지배를 받았다.

역사가들은 맘루크 통치기간을 두 시기, 즉 1250~1382년과 1382~1517년으로 나누어왔다. 전기에는 '바흐리'(Baḥri) 계열의 맘루크가, 후기에는 '부르지'(Burjῑ) 계열의 맘루크가 정치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서구 학자들은 각각 '바흐리 시대', '부르지 시대'라고 부른다.

당시의 이슬람 역사가들도 이와 비슷한 시기로 나누어 투르크족 시기와 체르케스족 시기라 불렀는데, 이것은 맘루크의 다수파 종족이 바뀐 것에 주목한 것이다. 이 변화는 1382년 체르케스족 출신의 바르쿠크가 즉위하면서 일어나 그이후 지속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나라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맘루크 왕조는 투르크족 술탄 때 최고전성기를 맞았고 체르케스족 술탄 시기부터는 장기간에 걸친 쇠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투르크족 맘루크의 주요업적은 레반트에 남아 있던 십자군을 축출한 일과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 몽골족을 참패시킨 일이다. 그때문에 투르크족 맘루크는 아랍-이슬람 문화의 파괴를 막았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맘루크가 의도한 목표였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보다 그들은 이집트의 통치자로서 이집트 제국의 재건을 추구했다. 맘루크는 또한 아라비아 반도, 아나톨리아소(小)아르메니아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이집트 후방을 지키기 위해 누비아에서 입지를 확보하려고 애썼다.

맘루크는 이슬람 세계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1258년 몽골족에 의해 폐지된 칼리프 제도를 부활시키고 자신들의 감독을 받는 칼리프를 카이로에 임명했다. 아라비아의 성도(聖都) 메카와 메디나의 군주를 후원해준 것도 같은 목적에서였다. 맘루크는 산업과 수공업을 장려하고, 이집트를 중근동과 지중해를 잇는 중요한 운송·무역 거점으로 재건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의 뒷받침으로 맘루크는 전쟁과 외교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가장 뛰어난 맘루크 술탄은 바이바르스 1세(1260~77)와 알 말리크 안 나시르(1293~1341)였다.

나시르 사후 능력있는 후계자가 뒤를 잇지 못한 것이 맘루크 왕조의 역량과 안정을 흔들리게 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왕조 쇠락 기점을 체르케스족 최초의 술탄(바르쿠크)이 즉위한 1382년으로 잡고 있다. 이때부터 관리와 군인의 승진은 투르크족 시기에 주된 승진 기준이었던 전술의 기술향상보다는 출신종족 배경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러나 종족관계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사실은 왕조가 쇠퇴한 이유의 하나일 뿐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측면을 비롯한 다른 요소였다. 맘루크가 상호 적대적인 여러 분파로 분열되어 무역과 농업이 평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베두인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한 것도 부분적인 이유였다. 이집트와 동부의 모든 지역에 퍼진 전염병에 의한 인구의 감소 또한 경제의 몰락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맘루크는 1400년 투르크의 정복자 티무르(티무르 랜크)에 대항해 시리아를 지켜낼 수 없었다. 술탄 바르스바이(1422~38) 시기에 잠시 동안 국내의 안정을 되찾았고 1426년 키프로스를 정복함으로써 맘루크의 명예를 다시 한번 드높였다.

그러나 이러한 원정의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해야 했기 때문에 재정상의 어려움은 더욱 커졌다. 결정적인 경제 타격은 홍해 무역에 대한 포르투갈인의 공격(1500경)이었고, 이와 동시에 시리아의 맘루크 영토를 오스만 제국이 정복했다. 맘루크는 포위공격 때를 제외하고는 대포를 무기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오스만에게 결정적으로 패했다.

1517년 이후부터 맘루크는 이집트 정치구조의 여러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문화적 측면에서 맘루크 시대는 주로 역사서술 및 건축에서의 업적과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사회·종교적인 개혁의 노력으로 유명하다. 맘루크 역사가들은 그리 독창적이지는 못했으나 많은 연대기와 전기, 백과사전을 남겼다. 이븐 할둔만은 예외적으로 독창적인 저서를 남긴 역사가로서, 그는 의식형성 시기와 저작시기를 맘루크 영토 밖인 마그레브(북아프리카)에서 보냈다.

모스크·학교·수도원, 특히 영묘(靈墓) 등의 많은 종교 건물을 세운 맘루크는 카이로에 매우 인상깊은 기념물들을 세웠는데, 이것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맘루크의 영묘 모스크는 석조 돔 형식으로 기하학적 조각이 그 육중함을 상쇄해 주고 있다.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종교적 인물은 이븐 타이미야인데 맘루크 당국은 미신적 요소를 제거하려 했다는 이유로 그를 투옥했다.

오스만 제국에서의 맘루크

1516~17년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한 후 이집트와 시리아는 대제국 내 일개 속주의 지위로 되돌아갔다. 맘루크 술탄 체제는 붕괴되었지만 맘루크는 이집트에서 하나의 계층으로 고스란히 남아 계속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맘루크 왕조 때처럼 맘루크 정예군은 노예시장을 통해 계속 충원되었다.

일정한 훈련기간을 거친 노예는 여전히 군대의 핵심에 기용되었고 곧 오스만 정부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맘루크는 차츰 오스만의 지배계급 속에 침투해 들어갔고 결국에는 그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하나의 중요한 혁신이 맘루크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일찍이 맘루크 술탄 시대에는 맘루크 집단이 여러 가문으로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 맘루크의 자손들은 비(非)노예 부대가 아니면 어느 곳에서도 복무할 수 없었고, 정부가 맘루크에게 할당한 관직에는 취임할 수 없었다. 오스만이 통치하게 되자 맘루크의 자손들은 더이상 이러한 제약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맘루크의 충성심과 연대성의 원칙이 혈연관계에 의해 잠식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스만의 맘루크는 개인의 수명 이상은 지속되지 않는 군사적 집단으로 결속하기보다는 자신의 자손에까지 지속되는 '가문'을 이루었다. 이와같이 가문을 중시하는 경향은 각 가문이 상대 가문을 지배하려고 한 데서 생겨났다. 이렇게 하여 맘루크 제도 속에는 대대로 이어져 계속되는 불안정한 요소가 생기게 되었다.

오스만 통치자가 맘루크의 불화를 이용하는 정도에 따라 맘루크가 이집트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17세기 말엽 오스만 세력이 제국의 전영역에서 쇠퇴하자 맘루크는 다시 한번 군대·세입·행정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결국 이스탄불의 오스만 당국은 일정한 금액의 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는 맘루크 일파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폴레옹이 맘루크 정부, 맘루크 군대와 마주친 것은 그가 1798년 이집트를 침략했을 때이다. 맘루크의 권력은 1811년 이집트의 새로운 통치자 무하마드 알리 파샤의 맘루크 세력 대학살로 결국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