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비아

누비아

다른 표기 언어 Nubia

요약 대략 나일강 하곡(상이집트의 제1폭포 부근)에서 동쪽으로는 홍해 해변, 남쪽으로는 하르툼(지금의 수단), 서쪽으로는 리비아 사막에 걸쳐 있었다. 아멘호테프 1세 때 누비아는 이집트의 식민지가 되었고 누비아 주재 총독은 이집트 제국의 관직에서 중요한 지위가 되었다. 당시 쿠시 지역의 금 생산량은 엄청난 양이었다. 이후 헤리호르가 상이집트의 지배권을 장악한 이후 누비아는 테베인들과의 전쟁으로 큰 희생을 치르고 이집트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이집트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자 누비아의 이집트 문명은 BC 45년 아마니샤케트 여왕이 즉위할 때까지 점차 아프리카화되었다. 그후 652년 이집트에서 파견된 이슬람 군대가 둔쿨라를 점령하고 이집트에 공물을 바치도록 강요했으며 역시 이슬람 왕국인 센나르의 푼지 왕조에게 점령되었다.

누비아(Nubia)
누비아(Nubia)

대략 나일강 하곡(上이집트의 제1폭포 부근)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홍해 해변, 남쪽으로는 하르툼(지금은 수단에 속함), 서쪽으로는 리비아 사막에 걸쳐 있었다.

누비아의 나일 강 제2폭포 남단까지의 남부지방을 제18왕조 시대의 고대 이집트인들은 쿠시라고 불렀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에티오피아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스완의 제1폭포에 이르는 누비아 지방 북부는 와와트라고 불렀다.

나일 강 제1폭포와 제2폭포 사이의 하(下)누비아 지방에는, 'A그룹 제문화'의 통치자들이 나카다 2, 3문화기의 동시대 이집트 왕정과 유사한 왕권을 수립하면서 초기국가가 형성되었다.

이 통치자들의 묘지는 1960년대 시카고대학교 동양학회에 의해 쿠스툴에서 발굴되었다. BC 2950년경 이집트의 제1왕조가 일어나면서 'A그룹'의 문화와 누비아의 독자적인 문화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후 500년 동안 하(下)누비아 원주민의 고고학적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BC 2575년경 파라오였던 스네프루는 누비아를 침략한 후 부헨에 이집트 식민지의 전초기지를 세웠다.

한편 이집트의 광물착취가 강화되면서 나일 강 서쪽에서 섬록암채석이 시작되었다. 이집트의 제6왕조 시대에는 아스완 지역의 지사(知事)들이 장거리 무역탐험을 시작했는데, 때로는 군사적 공격을 병행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지사는 하르후프로, 나일 강 제2폭포 너머까지 진출하여 그 지역을 '얌'이라 명명했으며, 그곳에서 붙잡은 피그미족 1명을 페피 2세에게 바쳤다.

그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누비아의 족장들이 연합하여 아스완 탐험대를 위협하기도 했다. 고고학자들이 'C그룹 제문화'라고 부르는 새로운 종족이 와와트에 침입했으며, 오늘날 카르마 문명으로 알려진 한 종족이 쿠시를 정복했다.

제1중간기에는 많은 누비아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용병으로 활약했다.

제12왕조의 세소스트리스 1세는 BC 1915년경 누비아를 침략하여 제2폭포의 남부지역을 쿠시라고 명명했다. BC 1826년경 세소스트리스 3세는 사이 섬의 점령을 시도했으나 결국 셈나 지역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대신 이곳에 일련의 강력한 요새들을 구축했다.

그는 쿠시인들이 셈나 북쪽을 통과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나, 제2폭포 북단에 위치한 주요 상업지구인 이켄(미르기사)에서의 무역거래만은 예외였다. 셈나는 중왕국시대에 이집트인들이 나일 강 범람 수치를 기록했던 곳이기도 하다.

쿠시 왕조는 결국 제13왕조말 이집트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국경을 돌파해 진출했다. 곧 부헨을 장악했고 BC 1650년에는 북쪽으로 아스완까지 진출했다. 힉소스 왕국이 이집트를 침략할 무렵에는 상이집트를 공격했고, 중왕국시대의 훌륭한 유물들을 약탈해 자국의 수도인 카르마로 옮겨갔다.

이런 유적들은 고고학자들이 족장들이 묻혀 있는 거대한 고분들을 발굴하는 동안 발견되었다. 고분 안의 족장들은 제물로 바쳐진 수백 명의 신하들에 둘러싸인 채 침대에 누워 묻혀 있었다. 이집트에서 추방당한 소수의 사람들이 쿠시 왕조의 지배자들을 위해 용병으로 봉사했고, 일부는 카르마에 있는 유리공장에서 일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카르마의 고분들에서 출토된 힉소스인의 옥새는 쿠시 왕조의 왕들이 힉소스인들과 교류를 가졌음을 알려준다.

즉 테베를 근거지로 했던 제17왕조의 카모스 왕이 힉소스를 침략했을 때, 힉소스의 아우세레 아포피 1세는 쿠시족과 동맹관계를 맺으려 했다. 그러나 카모스가 전령을 중간에서 사로잡아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인들을 추방하는 한편 누비아 영토로도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아모스 왕 때는 전면침략을 개시했다. 아멘호테프 1세(BC 1514~1493 재위)는 카르마를 정복하고 쿠시 왕국을 멸망시켰다. 누비아는 이집트의 식민지가 되었고 누비아 주재 총독은 이집트 제국의 관직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지위가 되었다.

투트모스 1세는 나일 강 제4폭포 남쪽에 위치한 카니사-쿠르기스까지 지배권을 확장했다. 이집트인들에 의해 채굴된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은 금이었는데 쿠시 지역의 금생산량은 엄청난 양이었다. 'C그룹' 누비아인들은 점차로 이집트화되었고, 제18왕조 중엽에 이르자 그들 고유의 문화는 사라졌다. 제19, 제20왕조 시대에 심한 가뭄으로 와와트의 인구가 상당히 감소되었지만 제20왕조 말엽의 내란 때 쿠시 총독은 큰 역할을 했다.

헤리호르가 상이집트의 지배권을 장악한 이후, 누비아는 테베인들과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큰 희생을 치렀지만, 마침내 이집트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쿠시 지방에서는 BC 800년경 새로운 왕국이 등장하여 카시타 왕 치하에서 급속한 이집트화가 시작되었으며 상이집트를 점령했다. 피앙키 왕은 이집트화를 완성하고 나서, BC 730년경 하(下)이집트를 침략했다. 아몬 신을 열렬히 숭배하는 쿠시인들은 리비아화된 하이집트 사람들을 문화적 타락자로 간주했으나, 아몬 신을 숭배하는 이집트의 테베인들에 대해서는 강한 동질감을 가졌다.

피앙키 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샤바카 왕이 BC 715년경에 이집트 전역을 정복하면서 제22, 제23, 제24왕조는 끝나게 되었다. 그는 수도를 멤피스로 옮기고 왕 명부에 쿠시로 기록되어 있는 제25왕조를 열었다. BC 701년, 샤바카 왕은 셰비트쿠를 공동통치자로 삼아 히제키야가 아시리아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을 지원했다.

아시리아의 세나케리브 왕은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해 들어갔고 엘테케에서 이집트-쿠시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타하르카 왕자가 증원군과 함께 반격하는 바람에 예루살렘 정복에는 실패했다. 그후 아시리아의 에사르하돈 왕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도발적인 행동을 하면서 평화가 깨어졌다. 아시리아는 이집트를 2차례 침공했다. BC 674년의 침공은 실패했으나 BC 671년에는 점령에 성공해 타하르카 왕조를 멤피스로부터 축출했다.

그후 타하르카 왕은 몇 차례 이집트를 재탈환했으나, BC 663년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 왕은 그와 그의 후계자 타나타몬을 축출하고 테베를 약탈했다. 아시리아는 사이스 왕족을 이집트 총독에 임명했는데, BC 656년 프삼틱 1세가 이집트의 독립을 이룩하고 쿠시족의 계획을 무너뜨리고 상이집트 지역을 확보했다.

쿠시의 음모가 끊이지 않자 이집트의 원정대는 BC 592년경 나파타를 약탈했다.

쿠시 왕국의 수도는 그때 메로에로 옮겨졌으며 왕국은 그곳에서 900년 동안 존속했다. 페르시아인들도 누비아 지역에 대해 침략을 시도(BC 522)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집트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자 누비아의 이집트 문명은 BC 45년 아마니샤케트 여왕이 즉위할 때까지 점차적으로 아프리카화되었다. 여왕과 직계 후손들은 일시적으로 이집트 문명의 상실을 저지했으나 그후로는 감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집트적인 부분은 희미해지게 되었다.

BC 23년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나파타를 파괴했다.

AD 3세기경, 동부 또는 아라비아 사막에 사는 블레미족이 하누비아의 수도인 메로에의 문 화를 멸망시켰다. 메로에 시(市) 자체는 320~350년 악숨 왕국의 아에이자네스 왕이 파견한 원정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누비아의 메로에 문화는 나파타 북쪽의 왕국을 대신한 노바타에 족의 문화에 계승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이 종족은 540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 직후에는 실코 왕이 블레미족과 상(上)노바타에족을 물리쳤다. 노바타에족의 수도는 그 당시 파코라스(파라스)로 옮겨졌고, 6세기에 마쿠라(무카라)족과 합병하여 둔쿨라에 단일왕국을 수립할 때까지 존속했던 것 같다. 둔쿨라 남쪽에는 알와 또는 알로디아(알로아)족의 왕국이 있었는데 580년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후 652년 이집트에서 파견된 이슬람교 군대가 둔쿨라를 점령하고 이집트에 공물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둔쿨라 왕국은 14세기에 이집트 맘루크 왕의 군대로부터 침략을 받을 때까지 그리스도교 국가로 남아 있었다. 알와족의 수도였던 수바는 16세기까지 존속되었으나, 그후 이슬람 왕국인 센나르의 푼지 왕조에 점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