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바르스 1세

바이바르스 1세

다른 표기 언어 Baybars I
요약 테이블
출생 1223, 흑해 북부
사망 1277. 7. 1, 다마스쿠스
국적 맘루크

요약 이집트와 시리아를 다스린 맘루크(노예) 왕조의 탁월한 술탄(1260~77 재위).
정식 이름은 al-Malik aẓ-ẓāhir Rukn ad-Dīn Baybars al-Bunduqdārī, (aṣ-Ṣāliḥī). Baibars라고도 씀.

몽골군, 십자군과의 전쟁과 국내 행정개혁으로 유명하다.

그의 생애를 담았다는 〈시라트 바이바르스 Sirat Baybars〉라는 민담은 아랍어권에서 지금까지도 널리 이야기되고 있다. 흑해 북부 해안의 킵차크 투르크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1242년경 몽골군이 이 지역을 침략한 뒤 다른 킵차크 투르크인들과 같이 노예로 팔려갔다.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 군대에서 중추를 이루었던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노예들은 비싸게 팔렸으므로, 바이바르스도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앗 살리흐 나짐 앗 딘 아이유브의 노예가 되었다.

새로 들어온 다른 노예들처럼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나일 강의 한 섬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뛰어난 무사 자질을 나타내 훈련을 마치자마자 해방되었고 곧바로 술탄 호위대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1250년 2월 알만수라 시(市)에서 아이유브군을 지휘하며 프랑스 루이 9세십자군과 싸워 처음으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포로가 된 루이 9세는 나중에 막대한 몸값을 주고 풀려났다. 바이바르스가 이끈 한 무리의 노예장교들은 이집트에서 자신들의 군사역량과 중요성이 커져가는 것을 감지하고 그해에 신임 술탄 투란 샤를 시해했다. 아이유브 왕조의 이 마지막 술탄이 죽음으로써 맘루크 술탄국은 초기 몇 년 간 혼란이 계속되었다.

바이바르스는 맘루크 왕조의 제1대 술탄 아이바크를 격노시켰기 때문에 다른 노예지도자들과 함께 시리아로 쫓겨나 1260년까지 머물렀다.

3대 술탄 알 무자파르 사이프 앗 딘 쿠투즈는 그들을 이집트로 불러들여 군(軍)의 지위를 회복해주고 바이바르스에게는 마을 하나를 하사했다. 바이바르스가 돌아온 지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은 1260년 9월 맘루크군은 팔레스타인의 나불루스 근처에서 몽골군을 격파했다. 바이바르스는 선봉대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많은 몽골 장군이 전사했다.

그는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 알레포 읍(邑)이 하사되리라 기대했으나 술탄 쿠투즈는 그를 실망시켰다. 시리아를 거쳐 귀향하는 도중에 바이바르스는 쿠투즈를 알현하고 몽골 여자 포로 1명을 선물로 달라고 요청했다. 술탄이 허락하자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이것을 신호로 맘루크군이 쿠투즈를 덮쳤고 바이바르스는 칼로 그의 목을 찔렀다. 그는 왕좌를 차지해 맘루크 왕조의 제4대 술탄이 되었다.

바이바르스의 야망은 아이유브 왕조를 창건했으며 시리아에서는 십자군과 성전을 펼친 살라딘과 필적하게 되었다. 술탄에 즉위하자마자 그는 자신의 군사적 지위를 다지는 작업에 착수했다. 몽골군이 파괴한 시리아의 모든 요새와 성채를 다시 세우고 무기고·전함·운반선을 새로 만들었다. 십자군에 대한 명령체계의 단일성을 이루려고 이슬람권인 시리아와 이집트를 단일국가로 통합시켰고 아이유브 군주들에게서 중요한 도읍 3개를 빼앗아 그들의 시리아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1265~71년 바이바르스는 거의 매년 십자군을 공격했다. 1265년 구호기사단(11세기 중엽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순례자 보호를 위한 종교적·군사적 결사)이 아르수프를 포기하도록 했다. 아틀리트와 하이파를 점령했고 1266년 7월 대(大)포위 끝에 성전기사단(1119년 예루살렘을 방어할 목적으로 창설된 그리스도교의 군사단체)의 요새에서 사페드 읍을 넘겨받았다. 2년 뒤 자파로 방향을 돌려 그곳을 어떤 저항에도 부딪히지 않고 점령했다.

안티오크는 그가 되찾은 도시 중에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1268. 5). 1271년 나머지 요새들이 점령당함으로써 십자군은 다시는 자신들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했다. 바이바르스가 거둔 승리로 그의 후계자들은 궁극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바이바르스의 영구 과제는 몽골군이 계속 이슬람 동부 심장부를 위협하면서 시리아의 북쪽과 동쪽에서 공격해오는 것을 저지하는 일이었다. 17년의 재위기간 동안 그는 페르시아의 몽골군과 9차례 전쟁을 치렀다. 시리아에서 그는 광신적인 교파인 아사신(암살단파)을 처리했는데 1271~73년 그들의 주요거점을 점령한 뒤 이 교파의 시리아인 교도들을 일소했다(아사신).

몽골과 동맹을 맺은 아르메니아 그리스도교도들도 공격해 토지를 황폐화시키고 주요도시를 약탈했다.

1276년 셀주크군과 그들의 몽골 동맹군을 격파한 뒤 카파도키아의 체자리아(지금의 터키 카이세리)를 몸소 점령했다. 이집트의 남부와 서부를 지키기 위해 누비아와 리비아로 원정대를 파견했다. 15차례의 전투를 직접 지휘해 여러 번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던 중 바이바르스는 바그다드에서 쫓겨다니던 아바스 왕조의 후손을 카이로로 데려와 1261년 칼리프로 추대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술탄 지위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이슬람 세계에서 그의 지배력을 우위에 놓으려 했다. 그러나 카이로의 아바스 칼리프는 맘루크 왕조에서 어떠한 실질적 권한도 가지지 못했다. 바이바르스는 단순한 군사지도자나 외교정치가 이상이었다. 그는 운하를 건설하고 항구를 개축했다. 다마스쿠스와 카이로 사이에 4일밖에 걸리지 않는 정기적인 신속한 우편제도를 만들었다.

카이로에 자신의 이름을 딴 거대한 모스크와 학교를 세웠으며 또한 이슬람 법학의 4대 학파를 대표하는 재판장을 임명했다.

무인(武人)이면서 또한 운동애호가였던 그는 사냥, 폴로 경기, 마상(馬上) 창시합, 활쏘기 등을 좋아했다. 동시에 엄격한 이슬람교도였고 관대한 자선가이기도 했던 그는 1271년 금주령을 내렸듯이 백성들의 도덕생활에도 주의를 기울인 군주였다. 다마스쿠스에서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준비했던 독물이 든 술을 마시고 죽었으며, 시신은 다마스쿠스에 자신이 세웠던 지금의 앗자히리야 도서관의 돔 건물 안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