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9세

루이 9세

다른 표기 언어 Louis 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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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214. 4. 25, 프랑스 푸아시
사망 1270. 8. 25, 튀니스 근처
국적 프랑스

요약 루이 9세는 성지탈환을 위한 제7차 십자군 원정을 이끌었으며, 튀니지로 한 차례 더 원정을 벌이던 중 죽었다. 높은 덕망을 지닌 통치자이자 신앙심이 깊은 교회의 보호자였던 그는 1297년 시성되었고,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꼽는 유일한 프랑스 왕이다.
서방 그리스도권 전역에 높은 덕망을 지닌 왕으로 알려진 그는 자신의 신망을 이용해 플랜태저넷가의 잉글랜드 왕 헨리3세와 협상을 벌여 1258년 파리 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1254년과 1256년에 2가지 법령을 발표하여 왕실 영지에서 관리들이 갖는 권한과 의무를 세밀하게 규정하고 직접 관리들의 활동을 감독했다. 더불어 위조화폐를 엄벌하고 통화를 안정시켰으며, 왕실 주화를 강제로 통용시켰다. 전반적으로 그가 행한 개혁조치는 왕실의 사법권과 행정권을 강화하고 프랑스의 상업발전을 위한 튼튼한 토대가 되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왕위계승
  4. 제7차 십자군 주도
  5. 평화업적과 행정개혁
  6. 죽음과 시성
루이 9세(Louis IX)
루이 9세(Louis IX)

개요

1248~50년 성지탈환을 위한 제7차 십자군 원정을 이끌었으며 튀니지로 한 차례 더 원정을 벌이던 중 죽었다.

1297년 8월 11일에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8월 25일이다.

초기생애

루이는 국왕 루이 8세와 왕비인 카스티야의 블랑슈 사이에서 난 넷째 아들이었으나 위의 세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는 바람에 그 아래에도 형제자매가 일곱이나 더 되는 루이가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그는 부모, 특히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숙련된 승마사들이 그에게 승마와 사냥법을 가르쳤고 가정교사들이 성경의 역사와 지리, 고대문학을 가르쳤다. 어머니 블랑슈는 그에게 신앙심을 가르치며 편협하지 않고 믿음 깊은 그리스도교도로 키웠다. 루이는 젊었을 때는 난폭한 성격을 지녀 발작적으로 성질을 부리기도 했으나 이러한 성미를 자제하기 위해 애썼다.

그의 아버지가 1223년 존엄왕 필리프(필리프 2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위에 올랐을 때는 프랑스에 여전히 방대한 영지를 보유하고 있던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왕가와 카페 왕조 사이의 해묵은 분쟁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 헨리 3세가 전쟁을 재개할 처지가 아니었던 까닭에 분쟁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였다. 프랑스 남부에서는 교회와 국가 모두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알비파(派) 이단자들이 아직 진압되지 않고 있었으며, 또한 존엄왕 필리프의 확고한 지배 아래 통합되어 있던 대귀족들 가운데서도 소요와 반란의 위협이 일고 있었다(알비 십자군). 루이 8세는 이러한 국내외의 갈등을 그럭저럭 마무리지어나갔으며 1226년에는 알비파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관심을 돌렸으나 그해 11월 8일 원정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몽팡시에에서 죽었다.

아직 13세밖에 되지 않았던 루이 9세는 여장부인 어머니를 섭정으로 왕이 되었다.

왕위계승

블랑슈에게는 무엇보다도 루이를 랭스로 데려가서 대관식을 치르는 것이 급선무였다.

유력한 귀족들 대다수가 대관식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블랑슈는 그 정도의 역경에 좌절할 여인이 아니었다. 아들의 교육을 계속하는 한편 그녀에게 반기를 든 귀족들, 특히 뤼지냥의 위그와 브르타뉴 공작인 드뢰의 피에르(피에르 모클레르)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귀족연합 세력은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지원을 얻지 못해 결국 와해되고 방돔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블랑슈는 약간의 여유를 얻었다.

그 틈을 이용해 그녀는 알비파의 반란을 종식시켰다.

랑그도크로 파견된 국왕 군대는 툴루즈 백작 레몽 7세에게 항복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1229년 4월 11일 레몽은 루이와 강제로 파리조약을 맺었는데, 이에 따르면 레몽의 딸이 루이의 동생 알퐁스와 결혼하고 그들이 모두 죽은 후에는 랑그도크 전체가 왕실 영지가 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정치적인 첫 업적으로서 놀라운 성과였다.

또 파리대학 학생들이 사소한 이유로 반란을 일으키자 루이는 어머니의 조언을 받아 대학을 폐쇄하고 학생과 교수들에게 해산명령을 내림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굳혔다.

그러나 프랑스에 있는 플랜태저넷가(家)의 영지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헨리 3세는 드뢰의 피에르로부터 지원을 받아 브르타뉴에 상륙해 프랑스 서부로 원정을 시도했다. 이때 15세밖에 되지 않았던 루이 9세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앙제의 성곽을 재건하도록 명령하고 헨리의 기지가 있는 낭트로 진격해 들어갔다.

헨리는 보르도로 진군했다가 헛수고만 하고 퇴각했기 때문에 단 한 차례의 전투도 일어나지 않은 채 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이 갱신되었으며, 드뢰의 피에르는 루이에게 복종을 서약했다.

1234년 블랑슈가 정권을 내놓았을 때 왕국은 잠정적으로나마 평화상태였으며, 루이 9세도 이제 결혼에 관해 생각할 때가 되었다. 그는 훌륭한 기사였으며 친절하고 매력적인 언행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 또한 그는 적법한 왕이었으며 마땅히 누려야 할 권한을 힘으로 관철하기는 했지만, 최하층의 농민으로부터 최상층의 봉신(封臣)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종종 팔레드라시테의 대회당(大會堂)에서 자신이 직접 재판을 주재했으며 후에는 이곳에 웅장한 예배당을 지어 기증했다. 때로는 뱅센의 장원(莊園)에서 떡갈나무 발치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재판을 주재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정경은 그의 전기작가인 샹파뉴의 세네샬이었던 장 드 주앵빌의 회고 속에 자주 나온다.

그는 또한 신앙심이 깊은 왕으로서 교회의 보호자이며 성직자들의 벗이었다. 1228년 그는 유명한 루아오몽 대수도원을 건립했고, 교황을 존경하기는 했지만 교황청의 불합리한 요구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저항하며 프랑스의 성직자들을 보호했다.

블랑슈는 프로방스 백작 레몽 베랑제 4세의 딸인 마르그리트를 루이의 배필로 뽑아 1234년 5월 29일 상스에서 결혼시켰다. 루이는 성실하고 열정적인 남편이었으므로 블랑슈는 자기 며느리에게 강한 질투를 느꼈다. 루이와 마르그리트는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루이 9세는 샹파뉴의 티보를 제압했으나 이번에는 미망인이 된 헨리 3세의 어머니와 결혼한 뤼지냥의 위그가 반란을 일으켜 아키텐으로 다시 원정을 떠나야 했다.

그러자 헨리 3세는 또다시 대륙으로 출정해 대병력을 이끌고 루앙에 상륙했다. 프랑스 서부의 귀족들은 대다수가 헨리와 손을 잡았다. 1242년 타유부르 다리에서 치른 전투는 사상자가 거의 없었으며 패배한 헨리는 런던으로 돌아갔다. 휴전협정을 맺을 때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평화는 점차 이루어졌다.

제7차 십자군 주도

잉글랜드에 승리를 거둔 뒤 루이 9세는 퐁투아즐레누아용에서 일종의 학질에 걸려 심하게 앓았다.

1244년 12월 그는 신하 귀족들과 측근들이 별로 열성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십자군을 모아 성지(聖地)를 해방하러 떠나기로 결심했다. 당시 성지의 상황은 위급하기 짝이 없었다. 1244년 8월 23일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이집트 술탄의 군대가 다마스쿠스를 장악했다. 서방에서 지원이 없으면 동방의 그리스도교 왕국은 이내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마침 유럽은 십자군을 모으기에 더 없이 좋은 시기였다.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의 대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루이 9세의 강력한 태도에 마주쳐 전쟁을 벌일 의욕이 약해져 있던 참이었다. 프랑스 왕국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고 귀족들은 주군을 따라 제7차 십자군에 나서는 데 동의했다. 길고 복잡한 준비를 마친 뒤 루이 9세는 어머니에게 섭정을 맡기고 마침내 1248년 8월 25일 에그모르트에서 출항했다.

그는 자신이 없는 동안 어머니와 아내를 함께 있게 하지 않으려고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갔으며, 약 100척의 배와 3만 5,000명의 병력을 거느렸다. 루이의 목표는 간단했다. 그의 의도는 이집트에 상륙해 주요도시들을 점령하고 그것을 시리아 도시들과 맞바꾸려는 것이었다.

첫 시작은 고무적이었다.

키프로스에서 겨울을 지낸 원정군은 1249년 6월 이집트의 다미에타 부근에 상륙했다. 국왕은 제일 먼저 육지에 올라 이슬람 영토에 성 디오니시우스의 깃발을 꽂았다. 다미에타의 성읍과 항구는 견고한 요새였으나 6월 6일 루이 9세는 다미에타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어서 그는 카이로를 향해 진격해 나아갔으나 대홍수로 인해 나일 강과 운하의 물이 불어 몇 달 간이나 지체해야 했다. 필요한 것은 알만수라 성채를 점령하는 일이었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마침내 가교가 만들어지고 1250년 2월 8일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오랫동안 결말이 나지 않았으며, 동생인 아르투아의 로베르도 전사했으나 루이는 끈질기고 집념에 찬 공격을 거듭해 마침내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러나 군대는 지쳐 있었다. 나일 강은 알만수라에서 수천 구의 시체를 휩쓸어갔으며 전염병이 생존자들을 덮쳤다. 국왕은 고통스럽지만 다미에타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부상을 입은 루이 9세는 퇴각하는 군대의 후위에서 다리를 질질 끌며 따라갔다.

이집트인들은 퇴각하는 군대를 공격해 1250년 4월 7일 마침내 그들을 포로로 잡았다.

오랜 협상 끝에 국왕과 중요 귀족들은 거액의 몸값을 내고 풀려났으며, 루이는 아크레에서 아내와 재회했다. 십자군들은 프랑스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루이는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기로 결심했다. 이후 4년 동안 그는 군사적 실패를 외교적 성공으로 전환시켰고 유리한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시리아의 그리스도교 도시들을 요새화하는 일을 했다.

그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프랑스로 되돌아갔다.

평화업적과 행정개혁

루이는 높은 덕망으로 서방 그리스도권 전역에서 커다란 위신을 떨쳤다.

이러한 위신을 이용해 그는 자기 매부인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와 영구 평화협정을 맺기 위한 협상을 개시했다. 이 문제에 관한 논란은 몇 년을 끌었으나 결국 1258년 5월 28일 파리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파리 조약). 조약의 내용은 플랜태저넷가(家)의 입장에서 볼 때 관대한 것이었다. 루이는 대륙에 있는 헨리 3세의 영지를 전부 빼앗을 수 있었지만 아키텐과 그 주변의 영토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 대가로 잉글랜드 왕은 자신을 루이의 봉신(封臣)으로 인정했다. 루이가 보기에 이것은 가장 중요했다. 왜냐하면 13세기에는 군주의 권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보유한 영지의 규모보다는 휘하에 거느린 봉신의 수와 비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의롭고 공평한 통치자였던 루이는 또한 자기 자식대에도 플랜태저넷가와 좋은 관계가 이어지기를 바랐다.

루이는 공정한 인물로 평판이 높아 외국에서 분쟁조정자로 초빙할 정도였는데, 한 번은 헨리 3세와 그 휘하 귀족들 간에 벌어진 폭력적인 분쟁을 중재한 일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왕국의 행정조직을 재편성했다. 일부 관리들은 그가 국내에 없는 틈을 타서 권력을 남용하는 비리를 저질렀는데, 루이 9세는 왕실 직속 감찰관들을 임명해 비리가 눈에 띄는 대로 시정하고 대중들의 불만을 파악하도록 하는 임무를 맡겼다.

1254년과 1256년에 공표된 유명한 2가지 법령은 왕실 영지에서 관리들이 갖는 권한과 의무를 세밀하게 규정해놓았으며, 루이 자신이 긴밀하게 관리들의 활동을 감독했다. 왕실의 관리들에게는 술집 출입이나 도박이 금지되었고, 토지 매입이나 딸의 결혼 같은 문제를 결정할 때도 반드시 국왕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그밖에도 매춘과 사법적 결투, 싸움에 의한 신판(神判) 등이 금지되었다. 국왕은 위조화폐를 엄벌하고 통화를 안정시켰으며, 왕실 주화를 강제로 통용시켰다. 전반적으로 그가 행한 개혁조치는 왕실의 사법권과 행정권을 강화하고 프랑스의 상업발전을 위한 튼튼한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루이를 환상 속의 인물처럼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도 역시 결함이 있었다. 그는 성미가 급하고 때로는 난폭하기까지 했으며, 과식하는 습관을 자제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결정은 그 자신이 내렸지만 현명한 고문관들을 임용할 줄 알았고, 독실한 신앙을 지녔지만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성직자들의 비리를 추궁하기도 했다.

루이는 문학과 예술에 관심을 쏟았으며 파리·뱅센·생제르맹·코르베유 등에 '예수의 십자가'의 단편(斷片)들을 소장해두기 위한 여러 채의 건축물을 짓도록 했다.

그는 자신의 전속 사제인 보베의 뱅상에게 최초의 대백과사전인 〈거대한 거울 Speculum majus〉을 집필하도록 격려했으며, 그의 재위기간 동안 외국의 많은 학자와 학생들이 파리대학에 모여들었다.

국왕은 매우 쾌활한 인물이었다. 그가 항상 경건한 표정만 짓고 있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전혀 틀린 생각이다. 식사 뒤 그는 정원에서 친지들에 둘러싸여 각양각색의 대화를 즐기곤 했다. 그자리에서는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담소를 즐겼다.

죽음과 시성

그러나 재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그는 줄곧 성지에 대한 생각에 골몰했다.

이슬람의 진격으로 성지의 영토는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다. 1269년 그는 다시 한 번 아프리카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튀니지를 중심으로 이슬람 세계를 양단(兩斷)시킬 구상을 했는데 이는 아마 동생인 앙주의 카를로가 부추긴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실책이었으며 결국 그는 그 결과를 자기 스스로 감수해야 했다. 병들고 쇠약해진 그는 죽음을 무릅쓴 모험을 벌여야만 했다. 원정군은 1270년 7월초 튀니스 부근에 상륙하여 처음에는 쉽게 승승장구를 거두었으며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그러나 또다시 전염병이 군대에 타격을 입혔으며, 루이 9세 자신도 그것을 이겨내지 못했다. 1270년 8월 그는 자신이 특별히 교육시킨 자기 아들 필리프에게 프랑스 왕국의 장래를 맡기고, 특히 백성들 가운데 가장 비천한 빈민들을 보호하고 원조하라는 유언을 남긴 뒤 숨을 거두었다.

십자군은 와해되었고 루이의 시신은 프랑스로 운반되었다.

이탈리아, 알프스 산맥, 리옹, 클뤼니 등 운구행렬이 지나가는 곳마다 군중들이 모여들어 무릎을 꿇고 명복을 빌었다. 운구행렬은 1271년 오순절 전날밤 파리에 당도했다. 장례식은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엄숙하게 거행되었고 그의 시신은 역대 프랑스 왕의 무덤이 있는 생드니 대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판정이 내리기도 전에 백성들은 이미 루이 9세를 성인으로 간주하고 그의 무덤에서 기도를 드렸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1297년 루이 9세를 시성됨에 따라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으로 꼽는 유일한 프랑스 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