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3세

헨리 3세

다른 표기 언어 Henry III
요약 테이블
출생 1207. 10. 1, 잉글랜드 햄프셔 윈체스터
사망 1272. 11. 16, 런던
국적 잉글랜드

요약 헨리 3세는 효율적 국정운영에 실패하여 결국 귀족들의 강요로 옥스퍼드 조례 개혁안에 동의해야 했던 영국의 왕이다.
아버지 존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9세 때 왕위를 계승했다. 펨브룩 백작 윌리엄 마셜과 휴버트그 버그의 섭정을 거쳐 20세에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인정많고 교양있는 성품이었으나 효율적 통치에는 적격이 아니어서 재위기간 내내 귀족세력과의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125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와 협약으로 아들 에드먼드의 시칠리아 왕위와 교황의 시칠리아 전쟁의 자금지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재정부족으로 전쟁자금지원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 교황의 파문 위협을 받았고, 귀족들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가 전반적 개혁안인 옥스퍼드 조례의 동의를 강요받았다. 하지만 동의한 후에 지켜지지 않아 결국 귀족세력의 지도자인 몽포르의 반란을 겪었다.

24년간(1234~58) 효율적으로 정부를 통제했으나 관례를 무시함으로써 결국 귀족들의 강요로 주요개혁안인 옥스퍼드 조례에 동의해야 했다(1258).

존(1199~1216 재위)의 큰아들이며 후계자로 9세 때 아버지를 잃었다. 당시 런던과 잉글랜드 동부 지방의 많은 부분이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 왕자(뒤의 프랑스 왕 루이 8세)가 이끄는 반란귀족들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그러나 펨브룩 백작 1세인 윌리엄 마셜 주재하의 섭정회의는 헨리를 통치자로 규정했다. 1217년에 이르러 반란군들은 패배했고 루이는 잉글랜드에서 철수해야 했다. 1219년 펨브룩 백작이 죽자 휴버트 드 버그가 정부를 맡았으나 1232년 헨리에 의해 해임당했다. 이후 야심만만한 2명의 프랑스인 피에르 데 로슈와 피에르 데 리보가 헨리의 정부를 좌지우지했으나 결국 잉글랜드의 귀족들에 의해 1234년 추방당했다. 이 사건 이후 헨리는 친정에 들어갔다.

헨리는 인정 많고 교양이 있었으나 효율적인 통치에는 적격이 아니었다. 외교나 군사문제를 다룰 때 보면 대담한 듯하다가 소심함을 드러냈고, 때로는 야심만만한 듯하다가도 비현실적인 면을 보였다. 귀족과 왕 사이의 불화는 일찍이 1237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귀족들은 왕의 사보이 가문 출신 친척들이 정부에 영향을 끼치는 것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고 있었다. 헨리가 자기 여동생 엘리너와 젊은 프랑스인 총신인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를 결혼시킴으로써(1238) 외국인의 영향력이 커지자 귀족들의 적개심은 더욱 높아졌다. 게다가 1242년 헨리의 이복동생들인 뤼지냥 가문 사람들은 엄청난 비용을 들였으나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 프랑스 원정에 헨리를 끌어들였다. 귀족들은 헨리의 고문관들을 뽑는 데 의견을 낼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으나 헨리는 이를 계속 거절했다.

1254년 마침내 헨리는 큰 실수를 범했다. 즉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1234~54 재위)와 협약을 체결해 교황이 헨리의 어린 아들 에드먼드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주는 대가로 교황이 시칠리아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4년 뒤 교황 알렉산데르 4세(1254~61 재위)는 재정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헨리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헨리는 귀족들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했으나 귀족들은 헨리가 광범위한 개혁안을 받아들인다면 이에 협력하겠다고 동의했다. 옥스퍼드 조례라 불리는 이 개혁안은 귀족들이 간접적으로 선출한 15명으로 구성된 추밀원을 창설해 왕에게 조언을 하고 행정 전반을 감독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곧 내분을 겪게 되었고 헨리는 조례를 취소할 기회를 잡았다(1261). 이미 헨리의 반대세력의 지도자로 부상해 있던 몽포르는 1264년 4월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달 몽포르는 서식스의 루이스 전투(1264. 5. 14)에서 승리를 거두고 헨리 왕과 왕세자 에드워드를 붙잡았다. 몽포르는 이후 헨리의 이름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나 1265년 8월 우스터셔의 이브셤 전투에서 에드워드에게 패배해 살해되었다. 쇠약해지고 노망한 헨리는 아들 에드워드에게 정부를 맡겼다. 헨리가 죽은 뒤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1세로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