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포르

몽포르

다른 표기 언어 Simon de Montfort
요약 테이블
출생 1208경,프랑스 일드프랑스 몽포르
사망 1265. 8. 4,잉글랜드 우스터셔 이브셤
국적 프랑스

요약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에 대항해 일어난 귀족전쟁의 지도자.
Earl of Leicester라고도 함.

몽포르(Simon de Montfort)
몽포르(Simon de Montfort)

거의 1년간 잉글랜드를 다스렸다.

출신이나 받은 교육으로 보아서는 완전히 프랑스 사람이었다. 이단인 알비파(派)를 정벌했던 원정군의 지도자 시몽 드 몽포르라모리의 아들로 성년이 되었을 때 가문의 영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 큰형 아모리에게 넘겨주었고 그 대신 영국의 레스터 백작령에 대한 몽포르 가문의 상속권이 되살아날 경우 그에 관한 권리를 혼자 차지하기로 했다. 이 상속권은 보몽 가문의 마지막 레스터 백작이었던 로버트 4세(1204 죽음)의 딸이며 시몽의 할머니인 아미셔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로버트 백작의 영지는 아미셔와 여동생인 윈체스터 백작부인 마거릿이 나누어가졌고, 존 왕은 시몽의 아버지를 백작으로 인정해주었다(1205경). 그러나 그뒤 존은 시몽의 아버지가 프랑스 왕의 신하라는 이유로 그 권리를 빼앗았기 때문에(1207) 몽포르 가문의 상속권은 소멸되었다.

시몽은 1229년에 잉글랜드로 건너와서 그의 사촌이자 몰수된 영지의 점유자인 체스터 백작 래널프의 도움을 받아 레스터에 대한 권리를 찾았다.

1239년 4월까지 공식적으로는 레스터 백작이라 불리지 않았지만 1231년 헨리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곧 왕의 총애를 얻게 되어 분할된 상속분을 받지 못한 데 대한 보상으로 매년 500마르크를 받았으며, 왕비인 프로방스의 엘리너의 대관식(1236)에서 레스터 백작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시종직을 맡았다.

헨리는 자기 여동생 엘리너와 시몽의 결혼(1238. 1. 7)을 주선함으로써 엘리너로 하여금 예전에 맹세했던 순결 서약(vow of chastity)을 깨뜨리게 했으며, 이에 대해 의논을 받지 못한 잉글랜드 귀족들의 감정을 건드렸다. 헨리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를 비롯해 화가 난 제후들이 항의했고, 헨리는 놀란 나머지 시몽과 엘리너에게서 등을 돌려 그들을 잉글랜드에서 내쫓았다(1239. 8). 그뒤 시몽은 리처드와 화해했으며 같이 십자군 원정(1240~42)에 나섰다. 시몽은 예루살렘의 라틴 왕국을 세운 제후들 사이에서 커다란 신망을 얻게 되어 그들은 자기들의 부재(不在) 군주인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시몽을 황제를 대신하는 예루살렘의 부왕으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헨리의 프랑스 공격(1242)에 가담했으며 헨리가 생트에서 완패한 뒤 탈출할 수 있도록 헨리를 엄호해줌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헨리와 화해한 시몽은 자기 아내 엘리너의 과부산(寡婦産) 상속권이 불리하게 조정되어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 케닐워스 성(城)에 본거지를 두고 급진 개혁파인 링컨 주교 로버트 그로스테스테와 친교를 맺었으며, 로버트의 친구인 옥스퍼드의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아담 드 마리스코를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시몽은 왕의 부하로 여겨지긴 했지만, 헨리와 귀족들 사이에 벌어진 1244년의 심각한 위기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해 지명된 12인 위원회에 속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 궁정, 교황청, 신성 로마 황궁 등지로 파견되는 중요한 사절단에 참여한 결과 유력한 친구들을 많이 얻었다.

1248년 헨리는 시몽에게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잉글랜드 소유의 가스코뉴 공작령을 평정시켜달라고 청했다.

루이 9세의 십자군 원정에 끼고 싶어했던 시몽은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여, 그에 대한 조건으로 소환당할 염려없이, 그리고 평정에 드는 비용 일체를 배상받으면서 7년 동안 가스코뉴의 섭정으로 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그는 가스코뉴 귀족들을 불법적이고 충성스럽지 못한 반도(叛徒)로 다루면서 무자비하게 진압해 질서를 바로잡았다. 가스코뉴 사람들은 시몽이 불법적인 재판과 억압을 자행한다고 비난하면서 자기들이 다시금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헨리를 위협했다.

게다가 시몽이 반란의 주모자인 가스통 드 베아른과 개인적으로 충돌하자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겁을 먹은 헨리는 반란자들의 고발을 받아들여 그를 심문하겠다고 잉글랜드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영국의 유력자들이 시몽을 석방했으며(1252), 그는 다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가스코뉴로 돌아갔다. 이에 맞서 헨리는 시몽이 맡았던 군사직책의 임기를 만료시켰다.

이후 재정적으로 약간의 보상이 따르는 해결책을 받아들인 시몽은 군대를 거두어 프랑스로 철수했고 1253년에 헨리가 재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이처럼 시몽은 국제적으로 명성을 쌓았으므로 루이 9세가 십자군 원정에 나간 사이 루이의 어머니인 카스티야의 블랑슈가 죽자(1252. 11) 프랑스 귀족들은 블랑슈의 뒤를 이을 섭정으로 시몽을 모시기로 했다.

가스코뉴에 대해 헨리가 취한 행동이 모두 다 그릇된 것은 아니었으나, 이로 인해 시몽은 헨리가 통치에 걸맞지 않는 인물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뿐만 아니라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의 간절한 부탁과 아들 에드먼드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얻어주기 위해 헨리는 시칠리아 정복에 나섰으나 처참하게 실패함으로써 시몽의 확신은 더욱 두터워졌다. 그로스테스트와 마리스코를 비롯한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지식인들과 논의한 끝에 시몽은 교회와 국가 모두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겠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결국 1258년 6월 몇몇 지도자급인 잉글랜드 귀족들과 힘을 합쳐 헨리에게 혁명적인 옥스퍼드 조례(條例)를 강요했다.

개혁파의 첫 출발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1259년 10월에 이르러서 개혁파는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가 이끄는 온건파와 시몽이 이끄는 과격파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온건파는 왕권이 남용되지 못하도록 제한만 하는 단계에서 개혁을 그치려 했지만 과격파는 왕과 그의 신하들에게 강요된 개혁안을 모든 귀족들이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몽의 거만한 태도는 두 파 사이의 싸움을 더욱 부추겼고, 시몽은 헨리에게 합법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자신과 아내의 상속권을 이용해 헨리를 굴복시키려 함으로써 스스로 잘못에 빠져들었다. 글로스터 일당과 힘을 합친 헨리는 1260년초 귀족들의 연합을 분쇄했고 시몽은 개혁을 지지하는 과격파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1261년 10월경 헨리가 시몽을 고립시키자 시몽은 나라 밖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교황으로부터 옥스퍼드 조례를 지키겠노라고 맹세한 것을 준수하지 않아도 좋다는 사면을 얻어낸 헨리가 그 조례를 무효화하자 전반적인 불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1262). 1263년 4월 시몽은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와 조례를 되살리기 위한 반란을 이끌게 되었다(1263. 7). 하급 귀족, 지방 기사들, 런던 및 남동부 해안 5항(五港 : Cinque Ports)의 사람들, 많은 성직자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으나 이미 귀족들의 단합이 깨져 있었으므로 시몽은 루이 9세의 중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1263. 12). 아미앵 조약(1264. 1)에서 루이는 조례와 그에 따른 모든 개혁을 완전히 무효로 만들었다.

시몽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며 직접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루이스에서 헨리를 패배시켰고(1264. 5. 14) 헨리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 경을 사로잡았다(루이스 전투).

시몽은 잉글랜드를 군사독재로 다스렸다. 그는 헨리의 지지자들과 협상을 벌였고 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약점을 메우기 위해 주(州)와 자치시의 대표들을 의회로 불러모음으로써(1265) 법적 승인의 기반을 마련하려 애썼지만 이는 헛된 일이었다. 그가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그의 주요동맹자인 젊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의 사이는 멀어졌다.

클레어는 왕당파에 속하는 변경 귀족들과 한편이 되어 헤리퍼드에서 에드워드 경이 탈출할 때(1265. 5) 그를 도왔다. 에드워드는 곧 뛰어난 전략으로 시몽을 세번 강(江) 너머에 고립시켰고 시몽을 구하러 오던 대군을 케닐워스에서 무찔렀으며(1265. 8. 1), 이브셤에서 시몽의 소규모 군대를 함정에 빠뜨렸다. 시몽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1265. 8. 4). 시몽은 당대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이 선거로 뽑힌 고문관 및 책임을 지는 관리를 기용하는 제한된 군주정을 주장했으며 대귀족은 물론이고 주(州)의 기사와 시민을 포함하는 의회를 옹호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