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코뉴

가스코뉴

다른 표기 언어 Gascogne

요약 피레네 산맥의 북부 기슭을 포함하며 바스크로부터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따라 가론 강 상류에 있는 툴루즈 근처까지 동쪽으로 240㎞에 걸쳐 뻗어 있다. 재산을 한 자녀에게만 물려주는 풍습이 있어서 유산을 상속받지 못한 후손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바스크 지방 목장은 대개 공동소유이다.
16세기에 개신교가 들어오긴 했으나 로마 가톨릭교가 우세하다. 바스크인의 1/5 정도는 프랑스에 살고 있는데, 그들은 지금도 바스크어를 쓰고 있다.
로마가 갈리아 지방을 다스리던 때에 아키타니아에서 떨어져나왔고 7세기 후반 가스코뉴 공작 백년전쟁 동안 가스코뉴는 영국 세력의 중심지였고 프랑스 대혁명 전까지 기엔가스코뉴 군관구를 이루었다.

지금의 랑드·제르·오트피레네 주(州)와 피레네자틀랑티크·로트에가론·타른에가론·오트가론·아리에주 주 일부에 해당하며 옛 가스코뉴와 같은 지역이다.

켈트족보다 이베리아족이 더 많이 살았던 이곳은 로마가 갈리아 지방을 다스리던 때에 아키타니아에서 떨어져나와 노벰포풀라나가 되었다. 프랑크족은 부예 전투(507) 뒤 서고트족에게서 이 지방을 빼앗았으며 561년부터는 바스크인, 즉 바스코뉴인이 다스리게 되었다. 602년 프랑크족 왕들이 이 지방을 바스코니아, 즉 가스코뉴라고 이름지어 공작령으로 승인했고 민족지도자 게니알리스가 통치했다.

7세기 후반 가스코뉴 공작 루프(루푸스)는 인접지역에 세력을 뻗쳤지만 그뒤를 이은 다른 공작들은 영토확장에 더러 실패했다. 그렇지만 10세기 후반에는 보르도와 바자데(바자를 둘러싼 지방), 아주네(지금의 아쟁)와 전 가스코뉴 지역을 다스렸다.

1032년 세습을 위한 전쟁이 일어나 기 조프루아가 통치권을 이어받았고 1058년부터는 아키텐 공작 기욤 8세가 다스렸다. 한편 이 공작령의 실질적인 권력은 아르마냐크나 로마뉴 같은 백작 또는 자작 명문귀족들에게 넘어갔는데 이들은 여러 세기 동안 이 지방을 다스렸다. 12세기에 들어서자 공작위는 영국 플랜태저넷 왕가로 넘어갔다.

백년전쟁 동안 가스코뉴는 프랑스 남서부에서 영국 세력의 중심지였고 그후 기엔과 합병해 프랑스 대혁명 전까지 기엔가스코뉴 군관구(gouvernement)를 이루었다.

이 지역은 피레네 산맥의 북부 기슭을 포함하며 바스크로부터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따라 가론 강 상류에 있는 툴루즈 근처까지 동쪽으로 240㎞에 걸쳐 뻗어 있다. 바스크의 전통농가는 점토와 짚을 섞은 벽토(壁土)로 지어졌으며 나무판자로 지붕을 이었다. 문 위에 다는 문패에는 건축연도나 집주인 이름을 써넣었다.

에체코 자운(etcheko jaun)이라고 불리는 가장의 주요임무는 물려받은 유산을 축내지 않고 보존하는 일이다. 또한 재산을 한 자녀에게만 물려주는 풍습이 있어서 유산을 상속받지 못한 후손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바스크 지방 목장은 대개 공동소유이다.

16세기에 개신교가 들어오긴 했으나 로마 가톨릭교가 우세하다. 바스크인들은 10세기까지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았으나 그뒤에는 가톨릭교를 고수했다. 바스크인의 1/5 정도는 프랑스에 살고 있는데, 그들은 지금도 바스크어를 쓰고 있다.

가스코뉴어는 프로방스어가 변한 것이며 바스크어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가스코뉴어로 된 전통민속시가 많이 남아 있으며 16세기부터 프랑스어를 문어로 쓰기 시작했다. 프랑스 대중문학에서 가스코뉴인은 언제나 충동적이고 성급한 사람으로 나오는데, 〈삼총사〉에 나오는 달타냥이나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주인공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