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1세

에드워드 1세

다른 표기 언어 Edward I
요약 테이블
출생 1239. 6. 17, 잉글랜드 미들섹스 웨스트민스터
사망 1307. 7. 7, 컴벌랜드 칼라일 근처 버러바이샌즈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 왕인 헨리 3세의 아들로 별칭은 다리긴 왕으로 불린다. 잉글랜드 중앙집권화의 기반을 마련하고 영국 의회를 창설하여 그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민족의식이 고조되던 시기의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수구적인 봉건귀족계급에 대항에 왕권과 의회를 강화했다. 웨일스를 복속시키고 자치권을 없앴으며 스코틀랜드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치세는 효율적 행정운영과 법제도 개혁으로 주목받는다. 그의 토지법령들 가운데 잡다한 내용을 담은 제2차 웨스트민스터 성문법과 퀴아 엠프토레스 성문법에 나오는 '데 도딘스 콘디티오날리부스' 조항은 봉건주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왕위 등극과 성품
  4. 의회와 법령
  5. 전쟁
  6. 말년
에드워드 1세(Edward I)
에드워드 1세(Edward I)

개요

헨리 3세의 아들이며 민족의식이 고조되던 시기에 통치했다.

수구적인 봉건귀족계급에 대항해 왕권과 의회를 강화했다. 웨일스를 복속시키고 자치권을 없앴으며 스코틀랜드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치세는 효율적 행정운영과 법제도 개혁으로 특히 주목을 끈다. 그는 봉건적 계급질서 내에서 왕권을 강화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한 일련의 법령들을 도입했으며 잉글랜드의 코먼로(common law)를 명확히 규정하고 손질해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초기생애

국왕 헨리 3세와 프로방스 출신 엘리너 사이의 큰아들로 1254년 가스코뉴 공작령과 프랑스령 올레롱, 해협제도, 아일랜드, 웨일스에 있는 헨리의 영토, 체스터 백작령, 그리고 몇 군데의 성을 증여받았다.

부왕 헨리의 중개로 레온-카스티야 왕 알폰소 10세의 이복누이 엘리너(레오노르)와 스페인의 라스우엘가스에서 결혼하고(1254. 10) 보르도로 여행하면서 분산된 영지들을 정비했다. 이제 그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왕실을 꾸리고 관리들을 거느렸으며 독자적인 대법관청을 두고 문장을 사용하는 한편 브리스틀 성에 자체의 재정금고를 두었다.

명목상으로는 자신의 모든 영지를 다스렸지만 가스코뉴와 아일랜드에서는 단지 세금을 걷는 데 그쳤다. 1255년 11월 잉글랜드로 돌아와 귀네드 공 리웰린 압 그루푸드를 공격했다. 그것은 에드워드가 잉글랜드 행정조직을 웨일스에 도입하려고 했을 때 웨일스의 백성들이 리웰린에게 지원을 호소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헨리나 변경지방의 영주들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오만무례한 행동을 일삼는데다 프랑스에서 어머니를 따라온 탐욕스러운 푸아트뱅 출신 외삼촌들과 가까이 지낸 탓에 잉글랜드인들에게 에드워드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그러나 푸아트뱅 출신 외척들이 축출된 이후 에드워드는 고모부인 시몽 드 몽포르의 영향을 받게 되어 그와 공식협정을 맺었다. 몽포르는 헨리의 실정(失政)을 제어하려고 애쓰던 귀족파벌의 우두머리였다.

에드워드는 왕권을 축소하고 귀족들에게 실질적인 행정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옥스퍼드 조례(1258)를 마지못해 지지했다.

반면에 그는 소작인들이 요구하는 개혁안을 귀족들이 받아들이도록 명령하는 내용의 급진적인 웨스트민스터 조례(1259. 10)를 지지하는 데 극적으로 개입했다. 1260년초의 위기상황을 맞이해 그는 몽포르와 극단주의자들을 지지했으나 결국에는 몽포르를 버리고 헨리의 용서를 받았다(1260. 5). 1260년 10월 가스코뉴로 갔으나 1263년초에 돌아왔다.

이때는 런던 시민의 지원을 받는 귀족들과 헨리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귀족전쟁). 에드워드는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고 런던 사람들과 분쟁을 일으킨 탓에 헨리의 대의명분에 손상을 끼쳤다. 루이스 전투(1264. 5. 14)에서 에드워드가 복수심으로 런던 사람들을 뒤쫓는 데만 골몰한 까닭에 헨리는 피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는 항복을 하고 몽포르 수중에 볼모로 붙잡혔다.

1265년 5월 헤리퍼드에서 탈출해 왕당파 군대를 이끌고 몽포르를 세번 강 뒤쪽으로 몰아넣는 한편 번개 같은 기동작전을 벌여 케닐워스에서 대규모 증원군을 격파했다(1265. 8. 1). 그해 8월 4일에는 이브셤에서 몽포르를 붙잡아 살해하고 헨리를 구출해냈다. 심신이 피로하고 유약해진 헨리는 에드워드에게 실질적인 통치를 맡겼다. 그러나 헨리는 런던 사람들을 상대로 극단적인 보복정책을 실행해 반란군의 저항을 되살리고 연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 교황청 사절인 오토부오노와 에드워드의 삼촌인 콘월 백작 리처드 등의 온건파들이 나서서 헨리를 설득해 좀더 유화적인 케닐워스 성명(1266. 10. 31)을 정책으로 채택하게 만들었으며 이후 약간 시간이 지난 뒤 반란군은 항복했다.

에드워드는 십자군을 일으켜(1268) 프랑스 왕 루이 9세와 함께 성지원정을 할 계획이었으나 자금 부족으로 1270년 8월까지 지체했다. 루이는 에드워드가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에드워드는 시칠리아에서 겨울을 보낸 뒤 아크레로 가서 1271년 5월부터 1272년 9월까지 정력적이고 용감한 활약을 벌여 명성을 얻고 가까스로 암살을 모면하기도 했으나 신통한 결과는 얻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시칠리아에서 1272년 11월 16일 헨리 3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왕위 등극과 성품

에드워드는 요크 대주교 월터 지퍼드와 필립 배셋, 로저 모티머, 그리고 자신이 신임하는 집사 로버트 버넬을 지명해 자신의 부재중에 자신의 이권을 안전하게 지키도록 조치했다.

헨리의 장례식 뒤에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모두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1272. 11. 20). 세습적 권리와 세력가들의 뜻에 따라 그의 왕위계승이 선포되었고 잉글랜드는 평화적으로 새로운 군주를 받아들였으며 버넬이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행정을 맡아보았다. 이처럼 조용하게 왕위계승이 이루어진 것은 치열한 내전을 겪은 지 5년밖에 안 된 잉글랜드의 통일성을 과시하는 의미가 있었다.

에드워드는 귀환여정을 여유 있게 보내면서 파리에서 잠시 멈추어 자신의 프랑스 영지에 대해 사촌인 필리프 3세에게 충성의 예를 표하고(1273. 7. 26) 가스코뉴에서 몇 달 간 머문 뒤 1274년 8월 2일 도버에 도착했고 8월 19일 웨스트민스터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이제 35세가 된 에드워드는 초기의 나쁜 평판을 씻어냈다. 그는 오만무례했으며 난폭하고 복수심이 강하고 잔인했다. 앙주가의 혈통에서 물려받은 격노하기 잘하는 성격은 헨리 2세에 필적할 정도였다.

자기 방식만을 고수하고 반대를 용납하지 않았지만 주변의 과단성 있는 견해에는 쉽게 따랐다. 가족에 대한 강한 애정과 친구에 대한 성실성, 용기, 뛰어난 군사적 능력, 지도력을 보였으며 잘생긴 용모에 훤칠한 키, 힘세고 튼튼한 몸을 지녔다. 그는 능률적이고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권력을 즐겼으며 정의로운 재판을 찬양할 줄 알았으나 자기 자신의 일과 관련해서는 대개 법의 조문만 지켰을 뿐 법의 정신을 지키지는 않았다.

분노를 자제할 줄 알았으며 인내심 있는 협상과 관용의 능력, 심지어는 이상주의적 자질까지 보이기도 했다. 사교를 좋아했고 유력한 자문가들의 권고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버넬과 엘리너 왕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에드워드의 좋은 면모가 부각되었으며 1294년경까지의 시기는 커다란 업적을 이룬 때였다. 그 이후에는 가정적인 안락과 서슴없는 직언이 없어지자 성격이 나빠져갔다.

그는 마음대로 전횡을 부렸으며, 소진해가는 기력을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에서 전쟁을 벌이는 데 쏟아부었다.

의회와 법령

현실적인 감각이 뛰어났던 에드워드는 1254년 이래로 잉글랜드 정치의 특색을 이루었던 '의회'의 값어치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전에 몽포르는 의회를 이용해 정부정책을 홍보했으며 문제를 결정할 때 주와 시의 대의원들을 의회에 소집해 광범위하고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내곤 했다. 에드워드는 이같은 관행을 재빨리 발전시켜 왕권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고양되는 민족의식의 뒷받침을 받아 왕실의 권위를 높여나갔다. 1275~1307년에 그는 기사와 시민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의회에 소집했다.

주와 시, 그리고 하급 성직자들의 대표를 망라한 1295년 의회가 보통 의회의 모범으로 꼽히지만 의회의 형태는 에드워드가 결정하기에 따라 회의 때마다 달라졌다(모범 의회). 1307년에 이르면 그와 같이 광범위하게 구성된 의회가 잉글랜드 정치의 두드러진 특색으로 자리잡게 되지만 의회의 권한은 여전히 불분명했고 그 조직형태도 아직 초기단계에 머물렀다. 에드워드는 의회를 비롯한 여러 가지 회의를 이용해 많은 종류의 법·절차·행정 문제들을 확실히 규명하고 개혁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1275~90년에 반포한 중요한 법령들은 그의 치세중에 이루어진 영광스러운 업적이다. 독창적이기보다는 보수적이고 규제적인 성격을 갖는 그 법령들은 대부분 에드워드의 대법관이었던 버넬의 공로였다. 버넬이 시행한 행정기구의 광범위한 발전 및 재편과 더불어 그 법령들은 잉글랜드 정치의 새시대를 열었다. 1275년에 시작된 심문영장 제도와 글로스터 법(1278), 심문영장법(1290) 등은 기존의 시민권을 통제하고 허가 없이 시민권을 새로 얻는 것을 막는 데 목적을 두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소작인들은 '어떤 근거'나 권리에 의해 자신들이 시민권을 보유하는지 입증해야 했다. 에드워드는 봉건적 군사제도를 부활하고 소지주들에게 기사의 직분을 갖도록 강요함으로써 지방통치기구를 강화하고자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의 토지법령, 그 가운데서도 특히 잡다한 내용을 담은 제2차 웨스트민스터 성문법(1285)과 퀴아 엠프토레스 성문법(3차 웨스트민스터 성문법, 1290)에 나오는 '데 도니스 콘디티오날리부스'(de donis conditionalibus) 조항은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결과적으로는 봉건주의를 약화시켰다.

양도불능의 부동산 소유법(1279)에 의해 왕실은 교회기구가 토지를 획득하는 것을 통제하게 되었다. 윈체스터 성문법(1285)은 공공질서를 보전하기 위한 경찰제도를 법제화하고 강화했다. 액턴 버넬 법령(1283)과 상인법(1285)은 무역과 상업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을 반영했다. 이러한 법령들은 효율성과 건전한 행정을 목표로 한 많은 법령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을 꼽은 것이다.

전쟁

한편으로 에드워드는 웨일스 자치공국을 멸망시켰다.

웨일스 자치공국은 리웰린 압 그루푸드 치하에서 웨일스의 모든 영주들을 관할했고 변경지방 영주들에게서 많은 영토를 되찾아 세력을 확장했다. 헨리 3세는 내부의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슈루즈버리 조약(1267)에 의해 리웰린의 기득권을 인정했으나 에드워드는 리웰린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로 결심하고, 리웰린이 충성의 의무를 끈질기게 회피하는 것을 공격의 구실로 삼았다. 그는 해군의 지원 아래 세 방면으로 군대를 진격시켜 웨일스를 침공했으며(1277) 리웰린을 스노도니아에서 포위하여 굶주리게 만들어 항복을 받아냈고 1247년 이래 리웰린이 정복한 땅을 모두 몰수했다.

이어서 그는 귀네드를 둘러싼 위압적인 성채들을 세웠으며 정복지를 주와 헌드레드로 재편했다. 잉글랜드의 통치에 웨일스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공국을 재정복하고 리웰린(1282)과 그의 동생 데이비드(1283)를 살해했다. 웨일스 법령(1284)에 의해 잉글랜드의 방침에 따른 공국의 재편을 완료했으나 웨일스 변경지방 영주들은 그대로 두었다.

1294~95년에 벌어진 또 한 차례의 웨일스 봉기가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나서 웨일스는 100년 이상 무력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1294년 이후 사태는 악화했다. 엘리너 왕비가 1290년에 죽고 버넬은 1292년에 죽었으며 그후 에드워드는 그만큼 훌륭한 조언자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웨일스를 정복하고 요새화하느라고 재정이 크게 나빠진데다 또다시 스코틀랜드 및 프랑스와 끝없는 전쟁을 치르면서 파산지경에 놓였다.

그는 성직자와 귀족들을 상대로 치열한 분쟁을 벌였으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지 않는 경솔하고 완고한 전제군주로 행동했다. 프랑스의 필리프 3세·4세는 그를 속여 파리 조약(1259)에서 약속한 대륙의 이권을 빼앗아갔다. 종주권을 구실로 그들은 끊임없는 간섭을 자행해 가스코뉴 변경지방을 조금씩 잠식해들어왔으며 에드워드의 행정기구를 마비시켰다.

1286년 필리프 4세에게 충성의 맹세를 한 후 에드워드는 가스코뉴를 방문해 행정기구를 재편하고 권위를 회복했다. 1289년 잉글랜드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부재중에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직권을 남용한 죄를 물어 많은 법관들과 관리들을 해임시켜야 했다. 1290년에 그는 조직적으로 유대인들의 재산을 박탈한 뒤 잉글랜드에서 추방했다.

그때 가스코뉴에 대한 프랑스의 간섭이 더욱 심해졌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선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적대적인 감정에 불이 붙었다. 1293년에 필리프 4세는 계략을 써서 에드워드의 동생인 랭커스터 백작 에드먼드로 하여금 형식적·일시적인 조치라는 전제 아래 가스코뉴 공작령의 양도를 명령하도록 만들어놓고 뒤에 가서는 원상회복을 거부했다. 웨일스의 봉기와 스코틀랜드 문제 때문에 에드워드는 이에 손을 쓰지 못하다가 마침내 1297년 바다를 건너 플랑드르에 상륙해 프랑스를 공격했으나 수하의 귀족들이 가스코뉴 침공을 거부한데다 월리스의 봉기까지 겹쳐 어쩔 수 없이 되돌아와야 했다.

그는 필리프와 평화협정을 맺고(1299)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설득에 따라 필리프의 누이 마거릿(마르그리트)과 결혼했으며 결국에는 전보다 줄어든 상태로 가스코뉴 공작령을 되돌려받았다.

1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우호관계를 유지해왔고 국경선은 비길 데 없이 평화로웠으나 에드워드는 250년에 걸친 지독한 증오와 야만적인 전투, 유혈적인 국경 침략의 서막을 열었다.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3세가 죽고(1286) 이어서 에드워드가 자기 후계자인 카나번의 에드워드(후에 에드워드 2세)와 결혼시키려고 했던 그의 손녀 노르웨이 마거릿이 죽자(1290) 왕위계승의 대가 끊어졌다.

그러자 미심쩍은 왕위계승 주장자들이 곳곳에서 발호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스코틀랜드 유력자들은 에드워드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에드워드는 귀족들과 왕위계승 주장자들에게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그런 후에 존 드 베일리얼을 왕으로 판정했다(1292). 베일리얼은 충성을 맹세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에드워드가 종주의 권한으로 스코틀랜드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사법권을 가지겠다고 고집하자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이에 반발하고 나서서 베일리얼로 하여금 에드워드의 요구를 물리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도록 했다(1295).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고(1296) 대관식용 돌인 스콘 석을 웨스트민스터로 옮겼다.

윌리엄 월리스가 1297년 봉기를 일으켰으며 에드워드는 폴커크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1298. 7. 22), 장기간의 전투를 치르면서도(1298~1303) 반란을 완전하게 진압하지 못했다.

에드워드 1 세 전쟁 중의 작전
에드워드 1 세 전쟁 중의 작전

말년

이 시기의 긴장된 상황 때문에 에드워드는 수하의 유력자들과 심한 충돌을 일으켰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들인 존 페컴(1279~92) 및 로버트 윈철시(1293~1313)와 교회의 자유권 및 사법권 문제를 놓고 격렬한 분쟁을 벌였다(교회와 국가). 1297년 윈철시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칙령 '클레리키스 라이코스'(Clericis Laicos, 1296)에 따라 성직자들에 대한 에드워드의 과세 요구를 거부하자 에드워드는 성직자들의 법적 권리를 박탈했다.

한편 귀족들은 가스코뉴를 침공하라는 그의 명령을 거역하고 에드워드가 플랑드르로 갔을 때 그의 섭정들에게 압력을 넣어 임의적인 과세를 금지하는 내용의 중요한 조항을 덧붙인 민권헌장을 인준하도록 함으로써(1297) 에드워드로 하여금 전쟁을 포기하고 결국에는 프랑스와 평화협정을 맺도록 만들었다. 보니파키우스보다 좀더 유화적인 클레멘스 5세가 교황이 되면서 에드워드는 윈철시를 추방하고 성직자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었지만(1306) 귀족들은 그같은 타결이 이루어지기 전에 더 많은 양보를 얻어냈다(1301). 에드워드는 1303년 다시 스코틀랜드를 정복해 1304년 스털링을 체포하고 1305년 월리스를 반역죄로 처형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가 마침내 평정된 듯이 보였을 때 로버트 1세(1274~1329)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1306년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 재정복을 위한 출정길에 나섰다가 칼라일 근처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