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파시오 8세

보니파시오 8세

다른 표기 언어 Bonifacius VIII
요약 테이블
출생 1235(~1240경), 교황령 아냐니
사망 1303. 10. 11, 로마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교황(1294~1303 재위).
본명은 Benedict Caetani.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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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기생애
  2. 필리프 4세
  3. 말기생애
  4.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평가

서유럽, 특히 프랑스의 강력한 신흥 군주들은 그의 권한이 미치는 범위를 둘러싸고 그에게 거세게 도전했다. 그가 교황으로서 이룩한 업적 가운데 〈교회법 대전 Corpus Juris Canonici〉의 제3부인 〈제6장 Liber Sextus〉을 발행한 일과 1300년을 희년으로 제정해 최초의 성년으로 삼은 일은 불후의 업적으로 인정된다.

초기생애

전통 있고 유력한 로마 가문에서 태어나 볼로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그뒤 여러 해 동안 교황청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281년 교황 마르티노 4세에게 카르체레툴리아노에 있는 성 니콜라오 성당 부제급 추기경으로 임명받았고, 1291년 니콜라오 4세 때에는 몬티부스에 있는 성 마르티노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이 되었다.

1290~91년 파리에서 열린 공의회에 교황사절로 참석해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지연시켰고, 프랑스와 아라곤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추기경 베네딕트 카이타니는 불행한 교황 첼레스티노 5세를 스스로 사임하게 하고, 그를 계승하여 보니파시오 8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된 후 첼레스티노를 퓨몬 성에 억류했다. 첼레스티노는 그곳에서 얼마 후 죽었다. 첼레스티노는 비록 자연사했지만, 보니파시오의 정적들은 이 죽음을 빌미로 그에게 혐의를 두고 공공연히 비난했다. 보니파시오를 비방하고 대적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영성파'(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세운 수도회 회원들로, 그의 청빈 규율을 엄격히 준수함)였는데, 그 중에는 시인 이아코포네 다 토디가 있었으며 그의 시 몇 편은 보니파시오에 의해 감금당한 기간에 쓴 것들이다. 보니파시오가 교황이 된 때부터 지속된 2가지 주요 국제 분쟁은 기옌과 플랑드르를 둘러싼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분쟁, 시칠리아 섬을 둘러싼 나폴리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분쟁이었다. 시칠리아 섬은 많은 항쟁을 벌인 끝에 교황청의 봉건영주권을 무시하고 나폴리 왕에게서 떨어져나갔다. 보니파시오는 내키지는 않았으나 결국 시칠리아 섬이 아라곤의 프레데리코의 영도하에 독립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4세 간의 반목을 중지시키려는 보니파시오의 노력은 또다른 중요한 문제로 난관에 봉착했다. 그것은 서로 전쟁을 벌이던 이 군주들이 교황청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고 한 문제로서 갈수록 심각해졌다. 중세 말기에 군주들이 관할지역 성직자들의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려 한 것은 많은 지지를 받았고 또 납득할 만한 일이었으나, 당시의 교회법에는 의문의 여지 없이 위배되는 것이었다. 평소 종결시키려고 애쓰던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분쟁이 교회와 교황청을 재정적으로 희생시키고 불이익을 가져다주자 보니파시오는 이를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1296년 그는 대칙서 〈클레리키스 라이코스 Clericis Laicos〉를 발표하여, 누구든 교황의 명시적인 승인 없이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면 자동적으로 파문당한다고 선언했다. 이 교서는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 로버트 윈첼시의 지지로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했으나, 프랑스에서는 왕과 국가, 법률가들의 결탁에 맞서 교황의 대권을 강하게 옹호해줄 사람이 없었다.

필리프 4세

필리프 4세는 대칙서가 발표된다는 소식을 듣고 돈과 귀중품들이 프랑스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명령하고 외국상인들을 추방함으로써 이 교서의 발표에 반발했으며, 심지어 칙서의 발표를 지연시켰다.

이런 조치들은 교황청 수입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는 했으나, 그것만 가지고는 1년 동안 프랑스 왕에게 대칙서의 철회나 다름 없는 포괄적인 유예조치를 취하도록 보니파시오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보니파시오에게 협상의 필요성을 느끼게 만든 것은 주로 2명의 추기경을 배출한 유력한 대립교황파 로마 가문인 가문의 한 분파가 보니파시오를 상대로 일으킨 폭동이었다. 이 폭동은 1297년 5월 막대한 교황청 재산을 무력으로 약탈한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보니파시오는 1년 동안 군대를 동원하여 콜론나 가문과 싸워 그들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그들은 파문을 면하기는 했지만, 이전의 직위와 재산은 되찾지 못했다. 그들은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킨 뒤 도망했다. 그들 중 일부는 필리프 왕에게 가서 심지어 대칙서가 발표되기도 전에 왕과 음모를 꾸몄다. 보니파시오와 프랑스 왕의 첫번째 분쟁 이후 곧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 화해는 교황이 필리프 왕의 조상이자 경건한 삶을 살았던 루이 9세를 성인으로 시성함으로써 확실해졌다.

2번째 분쟁은 1301년 프랑스 남부 파미에의 주교 베르나르 세세에 대한 날조된 고소와 즉결재판, 투옥을 둘러싸고 일어난 것으로서 이 분쟁은 화해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프랑스 왕은 교황청이 2세기 전의 전쟁을 통해 확보하여 계속 유지해 온 가장 근본적인 기득권 가운데 하나를 폐지하겠다고 위협했다. 그 기득권은 성직자들에 대해 세속군주가 아닌 교황이 직접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이에 타협할 수 없었던 교황은 칙서 〈아들아, 들으라 Ausculta Fili〉를 통해 필리프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이전에 취한 조치들을 철회하고, 특히 로마에 상소한 베르나르 주교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왕의 허락을 받은 대법관 피에르 플로트는 교황 칙서를 왜곡시켜 간추린 문서를 배포하여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1302년 4월 삼부회(프랑스 입법체) 총회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귀족들과 시민대표들은 열렬하게 왕을 지지했으며, 성직자들은 마지 못해 왕을 지지했다. 그럼에도 보니파시오는 이 분쟁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끝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프랑스 군대는 삼부회 직후 플랑드르 시민연맹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독일 왕이자 전도양양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합스부르크의 알브레히트 1세는 합법성 때문에 논란이 되어온 자신의 왕권을 교황이 인정해준다면 프랑스와 맺은 동맹을 포기할 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1303년초 교황은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의 이상적이고도 전통적인 우호관계(비록 이런 관계가 실현된 적은 거의 없지만)를 더욱 견고히 한다는 명분으로 독일 왕 알베르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승인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아래서 프랑스를 포함한 다른 모든 왕국들 위에 군림할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했다. 1302년 11월 보니파시오는 교황청이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다룬 훨씬 더 근본적인 선언문인 교서 〈유일한 거룩 Unam Sanctam〉을 발표했는데, 이 교서는 교황청 직무의 내용에 관한 과격하고도 극단적인 공식 표현 때문에 중세의 모든 교황청 문서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졌다.

이 교서는 전반적으로 세속권력에 대한 영적 권력의 우월성을 강력한 논조로 옹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권력이 서로 구별되고 둘 다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전통적인 겔라시아누스 교리를 분명하게 표명한다. 또한 마지막 교리적 명제문에서 교황은 그의 충만한 권능의 대상이 세속권력이 아니라 인간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이 권능에 복종하는 것은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선언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4세의 고문인 기욤 드 노가레가 플로트를 대신하여 왕의 적극적인 반(反)교황정책을 주도했다.

필리프는 이 정책을 추진하면서 교황의 다른 대적자들에게 지원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분쟁 초기에 보니파시오의 명을 받아 교황사절로 프랑스로 파견된 후 교황을 배반한 프랑스 추기경 장 르무안(요한네스 모나쿠스)이 있다. 파리의 루브르에서 열린 왕과 그의 고문들의 비밀회의에서는 보니파시오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교황이 되었다는 비난으로부터 이단자라는 비난에 이르기까지 입증되지 않은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이 비난들은 훗날 필리프 4세가 제소한 보니파시오의 사후 재판에 제출되었다. 루브르 회의에서 교회의 총공의회를 열어 교황을 단죄할 것을 요구한 적이 있는 노가레는 이 회의가 끝난 직후 교황에 대한 반란을 선동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다.

말기생애

노가레는 반란을 선동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보니파시오가 필리프의 파문을 공포하는 새로운 칙서를 발표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뒤 시아라 콜론나(유력한 콜론나 가문의 야심에 찬 인물)의 지지를 받고 몇몇 추기경들의 묵인하에 아냐니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는 교황을 체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냐니 시 지도자들과 즉시 공모하여 교황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틀 뒤에 이들은 생각을 바꾸어 교황을 구출했고, 따라서 노가레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만일 노가레가 교황을 공의회 앞에 끌고나가고 싶어하지 않았더라면 시아라 콜론나는 보니파시오를 죽였을 것이다. 아무튼 체포되어 있었던 2일 동안 교황은 신체적으로 모진 학대를 당한 듯하다. 그는 큰 용기와 인내로 모든 것을 참아냈고, 심신이 쇠약해진 채 로마로 돌아와 얼마 후에 죽었다.

보니파시오는 재위기간 동안 〈교회법 대전〉 가운데 〈제6장〉을 발행했으며 1300년을 희년으로 선포했다. 조토는 그림을 그려 이 희년을 기념했는데, 그림의 일부가 지금도 라테라노에 있는 산조반니 바실리카에 남아 있다. 보니파시오의 무덤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만들었으며, 기대어 서 있는 그의 모습을 새긴 석관이 바티칸 지하동굴에 남아 있다.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여 세운 많은 동상 가운데(그의 정적들은 이 동상들을 가리켜 그를 우상숭배자라고 비난했음) 여러 개가 남아 있다.

보니파시오가 교황의 티아라(교황관)를 더 높이고 그것을 두르는 관의 숫자도 1개에서 2개 혹은 3개까지(오늘날에는 3개를 두룬 삼중관이 쓰임) 늘렸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으며, 이것은 다른 자료들에서도 확인된다.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평가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맹렬한 공격은 당시 서방, 특히 프랑스의 민족주의적인 신흥 군주들이 교황의 영적 지배권을 공개적으로 배척한 최초의 사례였다.

13세기에 그가 교황의 충만한 권능에 대해 내세운 주장들은 전임 교황들이 내세운 주장들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이를테면 그의 주장들은 인노첸시오 4세가 내세운 주장들보다 온건했으며, 11세기의 대개혁가 그레고리오 7세 때부터 보니파시오 자신의 시대까지 신학과 교회법 분야에서 점점 정교하게 발전해왔던 견해들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보니파시오가 실패한 이유는 그가 새로운 견해 혹은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이 아니라 상황이 변했는데도 이 변화를 적절히 평가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성격에도 실패를 부채질한 요인이 있었다. 지적인 우월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병 때문에 늘 고생했던 그는 충동적이고 성격이 급했기 때문에 경솔한 행동을 많이 했다.

그는 콜론나가를 지나치게 거칠게 대했다(콜론나 가문이 카이나티 가문 출신인 보니파시오 교황을 미워한 것은 주로 이 두 가문 사이의 반목 때문이었음). 또한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그의 협력자들이 지닌 냉혹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서로 나뉘어 있던 이 두 세력이 손을 잡게 했고, 몰락을 자초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 8세에게 이러한 개인적인 결점이 있었다고 해서 문서위조, 중상모략, 협박, 교황 폭행 등을 저지른 공정왕 필리프 4세와 그의 신하들의 잘못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