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론나가

콜론나가

다른 표기 언어 Colonna family

요약 10세기 투스쿨룸 백작가의 후손으로 훌륭한 전통과 비중을 가진 로마의 귀족 가문.

콜론나(de Columna)라는 이름을 처음 쓴 사람은 투스쿨룸 백작 그레고리오의 아들 피에로였다. 그는 그레고리오가 죽자(1064경) 자기 몫의 상속분으로 프라이네스테를 비롯한 몇몇 장소와 알반 고개에 있던 콜론나 성을 물려받았다. 다른 로마 가문과 마찬가지로 콜론나 가문도 교황의 총애를 통해 부와 권력을 얻었다.

13세기에 이미 추기경과 로마 원로원 의원을 배출했다. 이후에도 계속 로마 시와 교회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가문의 자세한 기록은 라치오 및 로마 그 자체의 역사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중세를 통틀어 이들은 로마의 귀족 문벌들 가운데서도 가장 세력있는 가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들 가문과 카에타니 가문 및 오르시니 가문과의 반목은 오랫동안 봉건세력이 진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지역의 지방 역사를 지배했다. 그러나 카에타니 가문 출신의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의 치열한 싸움은 지방 싸움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보니파시오 8세가 콜론나 가문을 뿌리뽑으려 하자, 이들은 그와 적대 관계에 있던 프랑스의 단려왕 필리프 4세와 동맹을 맺었다. 1303년 9월 7일 스키아라 콜론나(1329 죽음)는 아냐니에서 보니파시오 교황에 대한 무장 공격을 주도하기도 했다.

교황이 죽자 콜론나 가문은 그들의 영토와 영향력을 회복했으며, 그후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로마는 콜론나 가문과 오르시니 가문과의 권력 투쟁에 시달리게 되었고 귀족 사회는 2개의 당파로 분리되었다. 이런 상황은 호민관 콜라 디 리엔초의 인민독재를 탄생시켰다. 이것은 로마의 모든 실력자들, 특히 콜론나 가문에는 큰 장애가 되었다.

1347년 11월 20일 로마의 포르타산로렌초에서 벌어진 혈전에서 리엔초는 콜론나가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런 장애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콜론나 가문의 세력은 약해지지 않았으며, 오래지 않아 콘스탄츠에서 추기경 오도네 콜론나가 교황 마르티노 5세로 선출됨으로써 현저하게 확대되었다. 마르티노는 교황직에 있는 동안(1417~31)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자기 가문을 위해 봉토를 얻어주었으며 프라스카티·팔리아노·제나차노를 비롯한 여러 곳의 교황령 내 광대한 토지로 그의 가문에 부를 가져다주었다.

이들 세력은 마르티노의 후계자 에우제니오 4세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그후 1세기가 넘도록 콜론나 가문은 계속되는 교황과의 갈등으로 기울어져갔다. 그러나 16세기말부터는 교황과 사이좋게 지냈으며 가문의 많은 인물들이 교회나 다른 강대국, 특히 스페인을 위해 일하는 고위성직자·군인·정치가로서 높은 자리에 올랐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콜론나 가문의 분파로는 콜론나 디 팔리아노, 콜론나 디 스틸리아노, 바르베리니 콜론나 디 팔레스트리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