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태저넷가

플랜태저넷가

다른 표기 언어 House of Plantagenet

요약 1154~1485년에 잉글랜드를 다스린 왕가.

플랜태저넷 왕가
플랜태저넷 왕가

14명의 왕을 배출했으며 그 가운데 6명은 분가인 랭커스터가와 요크가에서 나왔다.

이 가문의 왕위계승권이 생겨난 것은 앙주 백작 조프루아(1151 죽음)가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딸이며 신성 로마 황제의 미망인 마틸다와 결혼했을 때였다. 흔히 부르는 플랜태저넷이라는 이름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유래를 찾기가 어려우며 조프루아 백작의 별명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의 별명은 그가 금작나무(라틴어로 genista)의 잔가지로 장식한 모자를 쓰는 버릇에서 나왔다거나, 사냥감들이 많이 번식할 수 있도록 금작나무를 심었던(plant) 그의 습관에서 나온 것 같다는 등 다양하다. 어쨌든 플랜태저넷이라는 이름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니며 왕실 이외의 가문에서는 보통 이 이름으로 왕가를 칭했으나 조프루아의 후손들은 그뒤 250년 동안 이 이름을 쓰지 않았다.

어떤 역사가들은 헨리 2세를 포함해 이후 13명의 왕들을 가리켜 앙주 왕가 출신의 왕이라고 부른다. 또 어떤 역사가들은 헨리 2세와 그 아들들인 리처드 1세와 존만을 앙주 왕가의 왕이라 부르며 그 이후의 왕들, 특히 에드워드 1·2·3세는 달리 부를 더 나은 이름이 없으므로 플랜태저넷 왕가의 왕이라 한다.

1460년 조르푸아의 후손 가운데 플랜태저넷이라는 이름을 최초로 공식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요크 공 리처드로 그는 왕위를 요구하면서 스스로를 리처드 플랜태저넷이라 불렀다. 에드워드 3세는 많은 자손을 남겼고 그 자손과 그들의 결혼은 잉글랜드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에드워드의 후계자인 흑세자의 외아들 리처드 2세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1399년에 죽어 이 가계는 단절되었다.

그 때문에 왕위계승권은 흑세자의 바로 아래 생존한 동생 라이오넬의 외동딸인 필리파와 그 남편 마치 백작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라이오넬의 동생으로, 랭커스터 가문의 상속녀와 결혼해 랭커스터 백작이 된 곤트의 존이 랭커스터가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의 유일한 적자인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 존의 바로 다음 동생으로 요크 공작작위를 처음 받은(1385) 랭글리의 에드먼드는 요크 왕가의 시조로서 2명의 아들을 남겼다. 공작 2세인 에드워드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죽었으나 다른 아들인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는 라이오넬의 딸 필리파의 손녀이며 상속녀와 결혼해 요크 가문에 왕위계승권을 가져왔다.

리처드의 아들과 헨리 6세(헨리 4세의 손자),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과 상속자들의 왕위 다툼이 결국 장미전쟁을 낳았으며 이로 인해 두 가문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요크 왕가의 마지막 왕 리처드 3세가 튜더 왕가의 시조인 헨리 튜더(헨리 7세)에게 1485년 보즈워스 평야에서 패배함으로써 비로소 장미전쟁은 끝났다. 플랜태저넷 왕가의 마지막 적자는 요크 공 리처드의 손자인 워릭 백작 에드워드였으나 1499년에 처형됨으로써 플랜태저넷의 남계 혈통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