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슈

블랑슈

다른 표기 언어 Blanche de Cast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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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188, 카스티야 왕국 팔렌시아
사망 1252. 11. 12,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 왕 루이 8세의 아내이며, 루이 9세(성 루이)의 모후이자 섭정(1226~34, 1248~52).
(스). Blanca de Castilla. (영). Blanche of Castile.

전쟁과 결혼동맹으로 프랑스 영토를 지키고 통합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블랑슈는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딸인 엘러너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조모이자 잉글랜드 왕비인 아키텐의 엘러너는 스페인에 와서 11세가 된 블랑슈를 프랑스로 데려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어린 아들 루이와 결혼시키는 조약을 맺었다.

정략적 동기에서 이루어진 이 결혼은 블랑슈의 외삼촌인 잉글랜드 왕 존이 주선했고, 1200년에 잉글랜드 햄프셔의 포츠머스에서 거행되었다. 이 결혼은 프랑스의 일부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싸우던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짧은 휴전을 의미했을 뿐이다. 결혼을 통해 프랑스인이 된 블랑슈는 차츰 정신적으로도 프랑스인이 되어갔다. 물론 그녀는 가족에 대한 염려를 버리지 않았고 특히 외삼촌 존과 그의 동맹자들, 형부인 포르투갈의 페란, 사촌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나중에 신성 로마 황제 오토 4세)를 많이 염려했지만 1214년에 프랑스가 부빈에서 오토와 잉글랜드군을 물리친 것을 기뻐했다.

이 승리는 블랑슈가 항상 이루려고 애썼던 목표인 프랑스 통일의 첫 단계였다. 같은 해 블랑슈는 장차 프랑스 왕이 될 루이를 낳았다. 잉글랜드왕 존이 세상을 떠나자 블랑슈는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1216년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는 아내를 위해 잉글랜드를 침략했다. 잉글랜드인들은 그에 대항해 굳건히 맞섰고 결국에는 존의 아들이 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헨리 3세가 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블랑슈는 곧 이단인 카타르파 교도 정벌에 몰두하게 되었다.

선과 악의 창조자는 따로 있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종파인 카타르파는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번창하고 있었는데, 블랑슈는 이들에 대한 전쟁이 곧 성전(聖戰)이라고 굳게 믿었다. 1223년 루이 8세가 된 남편은 카타르파에 대한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지만 심한 이질에 걸려 1226년 프랑스 북부로 돌아왔다. 블랑슈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12세 된 아들 루이의 후견인이자 프랑스 섭정이 되었다.

블랑슈가 루이를 당장 왕위에 앉혀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루이 8세가 죽은 지 불과 3주일 뒤에 랭스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블랑슈가 당면한 가장 절박한 문제는 유력한 귀족들의 반란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이 반란은 필리프 2세의 서자(庶子)인 필리프 위르펠이 계획했고, 잉글랜드 왕 헨리 3세가 뒤에서 지원하고 있었다. 그런 역경에 직면하자 블랑슈는 세련된 외교관, 능란한 협상자, 강력한 지도자의 면모를 차례로 보여주었다. 하얀 옷을 차려입고 같은 색깔의 휘장을 늘어뜨린 백마에 올라탄 블량슈는 부대를 이끌고 앞장서서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어린 왕에 대한 유괴 미수 사건이 발생한 뒤, 그녀는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는 가차 없이 반란 공모자인 귀족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평민으로 채웠으며 지역 민병대도 창설했다. 그녀는 차츰 반란을 진압하고, 잉글랜드와 새로운 휴전을 맺을 수 있었으며, 1229년에는 툴루즈 백작 레몽 7세와 파리 조약을 맺어 프랑스 남부를 평정할 수 있었다. 그후 프랑스는 국내 안정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이 시기에 프랑스 전역에는 수많은 대성당들이 세워졌다.

블랑슈가 외교 수완을 보이지 못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1229년 파리의 라탱 지구에서 한 선술집 주인과 몇몇 학생들 사이에 말썽이 일어났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학생들을 마구 때린 다음 센 강에 집어던졌다. 경찰의 이러한 행동은 대학의 특권을 침해하는 일이었고, 교수와 학생들은 대학의 특권이 존중되지 않는다면 동맹파업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블랑슈는 경솔하게도 단호한 태도를 고집했으므로 대학은 문을 닫았고, 교수와 학생들은 파리를 떠나 시골과 국외로 가버렸다. 대학이 블랑슈 자신이 부여한 새로운 특권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올 때까지는 4년의 세월이 필요했고 교황까지 나서서 중재 역할을 맡아야 했다.

루이 9세는 1236년 4월 25일 성년이 되었지만 블랑슈는 여전히 왕의 가장 충실하고 확고한 지지자로 왕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들의 사생활에 관해서는 여느 때의 재치를 보이지 못했다. 그녀는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를 며느리로 직접 선택했지만 그녀를 무척 가혹하게 대했다. 1244년에 루이는 중병에서 회복된 뒤, 블랑슈의 소원을 무시하고 아내와 함께 십자군에 참여하겠다고 서약했다. 1248년에 그들은 출발했고 프랑스 왕국은 또다시 블랑슈에게 맡겨졌다. 루이가 이집트의 알만수라에서 패배한 뒤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몸소 루이와 프랑스군의 몸값을 구하러 갔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와 동맹자 및 교황을 찾아가 자금과 보급품을 간청했다. 심장병으로 몸이 쇠약해졌으나 섭정으로서의 의무를 게을리하지 않은 그녀는 회의를 주재하고 법률에 서명했으며 파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대성당 참사회가 일부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자 가난한 사람들이 갇혀 있는 감옥 문을 열기 위해 몸소 말을 타고 달려가기도 했다.

블랑슈는 즐겨 찾는 은둔처인 리스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 루브르 궁전으로 이송되어 수녀복을 입고 건초를 깐 침대 위에 누운 그녀는 모든 사람의 용서를 간청하고 마지막 종부 성사를 받은 뒤 숨을 거두었다. 블랑슈는 모뷔송 수도원에 묻혔고 심장은 리스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루이 9세는 팔레스타인의 자파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둘도 없이 훌륭한 모친이었던 동시에 그의 왕권을 지탱해 준 가장 강력한 지지자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