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오노르

엘레오노르

다른 표기 언어 Eleonore d'Aquitaine
요약 테이블
출생 1122경
사망 1204. 4. 1, 프랑스 앙주 퐁트브로
국적 프랑스·잉글랜드

요약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 존 왕의 어머니이다. 12세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했으며 자신의 영지 관리에는 더욱 적극적이었다. 당대의 유명한 음유시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푸아티에 궁정을 시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궁정 생활을 예절의 본보기로 만들었다. 프랑스에서 왕보다 더 넓은 영토를 가졌던 아키텐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 기욤 10세의 딸이며 상속녀였다.
1137년 기욤이 죽자 아키텐 공작령을 물려받았고 1137년 7월 프랑스 왕위계승자와 결혼했는데 그해 8월 그녀의 남편은 아버지 루이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엘레오노르는 그후 15년 동안 프랑스 왕비로 있었다. 그녀는 미르보 전투 뒤 은퇴해 앙주에 있는 퐁트브로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1204년에 죽었다. 퐁트브로 수도원 수녀들이 사망자 명부에 썼듯이 그녀는 '세계의 어느 왕비보다 뛰어난 왕비'였다.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 존 왕의 어머니이다.

12세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으로 여겨진다.

프랑스에서 왕보다 더 넓은 영토를 가졌던 아키텐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 기욤 10세의 딸이며 상속녀였다. 1137년 기욤이 죽자 아키텐 공작령을 물려받았고 1137년 7월 프랑스 왕위계승자와 결혼했는데 그해 8월 그녀의 남편은 아버지 루이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엘레오노르는 그후 15년 동안 프랑스 왕비로 있었다. 아름답고 변덕스러웠으며 루이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던 그녀는 그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때로는 남편을 위험한 지경에까지 내몰기도 했다.

1147~49년 그녀는 남편을 따라 불과 50년 전 제1차 십자군 원정(1096~99) 뒤에 세워진 예루살렘의 허약한 라틴 왕국을 투르크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제2차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예루살렘 왕국). 이 원정 기간, 특히 안티오크에 있는 숙부 푸아티에의 레몽의 궁전에서 보인 그녀의 행동이 루이의 질투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때부터 남편과 사이가 나빠졌다.

그들은 프랑스로 돌아온 후 잠시 화해했으나 결국 1152년 3월 이혼했다. 봉건적 관습에 따라 그녀는 아키텐을 다시 소유하게 되었고, 2개월 뒤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손자이며 앙주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헨리 플랜태저넷과 결혼했다. 1154년 헨리 플랜태저넷은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되어 잉글랜드, 노르망디, 프랑스 서부를 아울러 통치하게 되었다.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딸 둘을 낳았고 재혼해서는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낳았다. 그녀가 낳은 아들들은 3세 때 죽은 윌리엄과 헨리, 사자심왕 리처드,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제프리), 존이었다. 은 다른 형제들보다 오래 살아 1199년 잉글랜드의 왕관을 물려받았는데 그때까지 무지왕(無地王)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그녀의 딸로는 작센·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와 결혼한 마틸다,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와 결혼한 엘리너(레오노르), 시칠리아 왕 굴리엘모 2세와 결혼했다가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와 재혼한 조앤이 있다.

엘레오노르는 실로 '유럽의 할머니'라 불릴 만했다.

그녀는 임신기간에도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했으며 자신의 영지 관리에는 더욱 적극적이었다. 당대의 유명한 음유시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푸아티에 궁정을 시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궁정 생활을 예절의 본보기로 만들었다.

또한 당시의 2가지 주도적인 시(詩)의 경향, 즉 음유시인이 낭만적인 노래로 읊은 궁정연애시와, 켈트족의 전설이나 연대기 작가 몬머스의 제프리가 1135~39년경에 쓴 〈브리튼 열전 Historia regum Britanniae〉에서 유래한 역사적인 '브르타뉴 구전(口傳)'을 소재로 한 시들을 열렬히 후원했다.

1173년 아들들이 아버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그녀의 문화활동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남편보다 11세가 많았던 그녀는 오랫동안 남편의 부정에 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부추겼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어쨌든 아들들에게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했다. 반란은 실패했고 첫 남편 루이 7세의 땅 프랑스에서 피난처를 찾던 중 붙잡혔다. 반(半)구금생활을 하다가 1189년 헨리 2세가 죽은 뒤에야 풀려났고 그뒤에는 이전보다 더욱 깊이 정치에 개입했다. 그녀는 리처드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가 성지 원정을 간 동안 왕국을 다스리며 리처드의 형제 존과 프랑스의 존엄왕(尊嚴王) 필리프 2세가 꾸민 음모를 좌절시켰다.

리처드가 동방에서 돌아오다가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붙잡히자 몸값을 주고 몸소 아들을 호위해 잉글랜드로 데려왔다.

1199년 리처드가 후계자 없이 죽자 존이 왕위에 올랐다. 플랜태저넷 영토가 떨어져나갈 것을 염려한 엘레오노르는 1200년 손녀 블랑슈(블랜치)를 카스티야 왕궁에서 불러내 프랑스 왕자와 혼인시키기 위해 80세가 가까운 나이로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이 혼인을 통해 그녀는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가(家)와 프랑스 카페 왕조 간의 평화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같은 해 손자인 브르타뉴의 르튀르(아서)로부터 앙주와 아키텐을 지켜 프랑스에 있는 존의 영토를 공고히 했다. 1202년에도 그녀는 존이 도착해 아르튀르를 사로잡을 때까지 아르튀르에 맞서 미르보를 지킴으로써 존을 도왔다. 그러므로 존이 유럽 대륙에서 거둔 승리는 어머니 덕이었다.

그녀는 미르보 전투 뒤 은퇴해 앙주에 있는 퐁트브로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1204년에 죽었다.

잉글랜드에 대한 엘레오노르의 공헌은 죽고 나서도 계속되었는데 잉글랜드가 노르망디를 잃은(1204) 뒤에도 그녀의 세습 영지들은 계속 잉글랜드에 충성을 바쳤다. 많은 프랑스 역사가들은 그녀의 젊은 시절의 경박함에만 주목하고 성숙한 뒤의 강인함이나 정치적 지혜와 정력을 무시하여 그녀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름답고 공정했으며, 당당하면서도 온화하고, 겸손하며 우아했다." 퐁트브로 수도원 수녀들이 사망자 명부에 썼듯이 그녀는 '세계의 어느 왕비보다 뛰어난 왕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