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1세

리처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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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157년 9월 8일, 옥스퍼드
사망 1199년 4월 6일, 아키텐 공작령 샬뤼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제3차 십자군 원정(1189~92)에서 기사다운 풍모와 무용을 과시해 당대의 인기를 얻었고, 무수한 낭만적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근세로 올수록 역사가와 학자들에게서는 옛날만큼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리처드는 일찍이 정치적·군사적 능력을 보여 기사다운 무용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푸아투와 가스코뉴의 사나운 귀족들을 다루는 법을 빠르게 터득했다. 리처드는 무책임하고 성질이 급하며, 엄청난 정력가인 데다가 매우 잔혹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앙주 가문의 대부분 사람들에 비해 완벽성을 갖춘 인물로서, 탁월한 군인이자 능숙한 정치가였으며 사람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상당한 표현력을 지닌 서정시인이기도 했는데, 음유시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묘사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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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잉글랜드 왕
  4. 시칠리아
  5. 성지
  6. 감금
  7. 잉글랜드 귀환
  8. 평가
리처드 1세(Richard I)
리처드 1세(Richard I)

개요

노르망디 공작과 앙주 백작(1189~99)이기도 했다.

제3차 십자군 원정(1189~92)에서 기사다운 풍모와 무용(武勇)을 과시해 당대의 인기를 얻었고, 무수한 낭만적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근세로 올수록 역사가와 학자들에게서는 옛날만큼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초기생애

리처드는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사이에 난 셋째 아들로서 11살 때 어머니의 상속재산인 아키텐 공작령을 받았고 1172년 푸아티에 공작이 되었다.

리처드는 일찍이 정치적·군사적 능력을 보여 기사다운 무용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푸아투와 가스코뉴의 사나운 귀족들을 다루는 법을 빠르게 터득했다. 헨리 2세의 적자들이 모두 그랬듯이 그는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나 심려 및 책임감이 전혀 없었다. 형제들과 합세해 아버지에게 대반란(1173~74)을 일으켰으며, 아버지는 아키텐을 2차례나 침공해 리처드를 굴복시키고 용서를 빌게 만들었다.

그후 리처드는 자신의 영지 내에서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몰두했다. 그의 가혹한 통치에 분격한 가스코뉴 사람들은 1183년 반란을 일으키고 리처드의 형 헨리(Young King Henry)와 그 동생인 브르타뉴의 제프리(조프루아)에게 도움을 청해 리처드를 공작령에서 아주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자 자기 제국이 해체 위험에 처한 것에 경각심을 느낀 헨리 2세는 유럽 대륙에 있던 자기 영지의 봉건영주들을 동원해 리처드를 돕도록 했으며, 1183년 6월 11일 리처드의 형 헨리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반란군은 무너졌다(앙주 제국).

형이 죽었으므로 리처드는 이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및 앙주(노르망디와 앙주는 뗄 수 없는 하나로 간주되었음)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막내 동생 존에게 아키텐을 양도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남부 토박이였던 리처드는 자기가 자란 곳인 공작령을 양도하지 않으려 했으며, 심지어는 프랑스의 젊은 존엄왕 필리프 2세에게 아버지 헨리 2세에 대항할 것을 청원했다. 1188년 11월 리처드는 프랑스 땅에 있는 잉글랜드의 보유지 전체를 걸고 필리프에게 충성을 서약했으며, 1189년에는 필리프와 합세해 헨리 2세에게 공공연하게 항복을 요구했다.

그들은 르망에서 소뮈르까지 헨리를 추격해 리처드를 후계자로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핍박하여 끝내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1189. 7. 6).

잉글랜드 왕

리처드는 7월 20일 노르망디를 얻고 9월 30일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필리프와 달리 리처드에게는 오직 한 가지 야망만 있었는데, 그것은 1187년 살라딘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야기된 십자군 원정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의 장래에 대한 계획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무기를 사들이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았다. 하지만 그는 돈을 위해 앙주 제국을 해체하는 데는 앞장서지 않았다. 그는 필리프와 결별했으며 유럽 대륙에서 앙주 방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은 것은 단지 필리프도 십자군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처드는 자기 아버지의 보물들을 많이 처분하고 몇몇 직책들을 팔아넘겼다. 이렇게 해서 그는 강력한 병력을 마련해 1190년 시칠리아를 경유하는 성지(聖地) 항해를 출발했다.

시칠리아

시칠리아인들이 잉글랜드를 적대적으로 대하자 리처드는 10월 4일 메시나를 기습점령했다.

시칠리아인들은 독일 황제 하인리히 6세의 통치를 막기 위해 이미 시칠리아 출신인 레체의 탕크레드를 왕으로 뽑아 놓았고, 탕크레드는 리처드의 누이이자 전왕(前王)의 부인인 잉글랜드의 조운을 감금했으며 그녀 몫의 유산상속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메시나 조약을 맺어 리처드는 조운에게 그녀 몫의 유산과 자유를 찾아주고,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승인했으며 조카인 브르타뉴의 아서(아르튀르)를 후계자로 선언하여 탕크레드의 딸과 아서를 결혼시키도록 했다.

이 조약은 제3차 십자군에 참가하고 있던 독일인들을 화나게 했고 또한 이에 자극받은 리처드의 동생 존에게는 배신과 반역을 저지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뒤 리처드는 키프로스를 정복하여 키프로스의 리마솔에 머무는 동안 나바르의 베렝가리아와 1191년 5월 12일 혼례를 올리고, 6월 8일 아크레에서 다른 십자군들과 합류했다.

성지

십자군은 1191년 7월 아크레를 함락했으며 9월 7일에는 아르수프에서 리처드가 큰 승리를 거둔 데 힘입어 요파를 점령했다.

리처드는 2차례에 걸쳐 예루살렘 수㎞ 이내까지 진격했으나 제3차 십자군의 주목표였던 예루살렘 탈환 공적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또한 프랑스·독일·잉글랜드 군대들은 서로 격렬한 분쟁을 벌였다. 리처드는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의 깃발을 찢어 그에게 모욕을 가했으며, 존엄왕 필리프와 분쟁을 일으켜 필리프는 결국 아크레 함락 뒤 프랑스로 돌아갔다. 리처드는 또 자기 봉신인 기 드 뤼지냥을 예루살렘 왕의 후보자로 내세워 독일측 후보자인 몬페라토의 코라도와 경쟁하게 했다.

리처드가 코라도의 살해를 공모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1년간 성과없는 접전을 계속 벌인 끝에 1192년 9월 리처드는 살라딘과 3년간의 휴전협정을 맺었다. 협정 내용은 십자군이 아크레와 좁은 해안 지역을 계속 보유하고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성지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감금

리처드는 프랑스의 적대적인 태도 때문에 배를 타고 아드리아 해를 통해 잉글랜드로 돌아가야만 했는데, 도중에 폭풍을 만나 베네치아 부근 해변에 상륙하게 되었다.

그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레오폴트 공작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는 자기 신분을 위장했으나, 1192년 12월 빈에서 발각되어 도나우 강변 뒤른슈타인에 있는 공작의 성에 갇혔다. 이후 그는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겨져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성을 전전하며 갇히는 몸이 되었다. 13세기에 지어진 유명한 블롱델의 모험담은 잉글랜드에 전혀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채 성곽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리처드에 관한 이야기이다.

필리프 2세에게 넘기겠다는 협박에 못이긴 리처드는 하인리히 6세가 제기하는 가혹한 조건들을 모두 받아들여 15만 마르크의 막대한 몸값을 지불함과 아울러 왕국을 일단 신성 로마 제국에 양도했다가 봉토(封土)로 되돌려받기로 했다. 이 몸값 조달은 12세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재정지출에 속하며 당시 잉글랜드의 번영을 입증해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몸값의 대부분이 지불되어 1194년 2월 리처드는 석방되었다.

잉글랜드 귀환

리처드는 즉시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 왕권의 독립성이 손상된 것을 우려한 나머지 4월 17일 다시 한 번 즉위식을 올렸다.

그러나 채 1개월도 되기 전에 그는 노르망디로 갔으며 남은 5년 동안 다시는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여생을 필리프 2세와 싸우는 데 소비했으며 중간중간에 잠깐씩 휴전을 맺었고, 잉글랜드 통치는 유능한 최고사법관이며 캔터베리 대주교인 휴버트 월터에게 맡겼다. 리처드는 자신의 조급성 때문에 42세라는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필리프 2세(Philippe II)
필리프 2세(Philippe II)

한 농부가 리모주 자작의 영지에서 묻혀 있던 황금을 발견했는데, 자작은 이것을 리처드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리처드는 샬뤼에 있는 자작의 성을 포위공격하다가 운 나쁘게 부상을 입었고 1199년에 죽었다. 그는 부모인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왕비가 묻혀 있는 퐁트브르 대수도원에 매장되었고, 그의 조상(彫像)은 아직까지 그곳에 보존되어 있다.

평가

리처드는 전형적인 앙주 가문 사람으로 무책임하고 성질이 급하며, 엄청난 정력가인 데다가 매우 잔혹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앙주 가문의 대부분 사람들에 비해 완벽성을 갖춘 인물로서, 탁월한 군인이자 능숙한 정치가였으며 사람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상당한 표현력을 지닌 서정시인이기도 했는데, 음유시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묘사했다. 아버지나 존 왕과는 달리 그는 동성연애자였던 것이 분명한데, 베렝가리아 왕비와는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한 듯하며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