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6세

하인리히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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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165, 네덜란드 네이메겐
사망 1197. 9. 28, 이탈리아 메시나
국적 신성 로마

요약 독일 왕, 호엔슈타우펜 왕조 출신의 신성 로마 황제.
(영). Henry Ⅵ.

시칠리아의 왕 루제로 2세의 유복녀 콘스탄차(콘스탄체) 1세와 결혼하여 시칠리아 왕국을 획득함으로써 자신과 왕조의 세력을 강화시켰다.

독일의 왕위를 시칠리아처럼 세습화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가 죽은 뒤 바로 시칠리아의 왕이 된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후에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이었던 하인리히는 1169년 6월 밤베르크에서 독일 왕으로 선출되고, 그해 8월 아헨에서 왕위에 올랐다. 1186년 1월 밀라노에서 11세 연상인 콘스탄차와 결혼했다. 1189년 부활절에 프리드리히 1세가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떠나자, 하인리히가 제국의 통치를 맡게 되었다.

1189~90년에는 과거 바이에른과 작센의 공작이었던 사자공 하인리히의 반란을 진압했다. 1189년 11월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2세는 당시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걸쳐 있던 시칠리아 왕국을 자신의 이복 여동생 콘스탄차에게 물려주고 죽었다. 1190년 6월 십자군 원정 도중 프리드리히 1세가 죽자, 하인리히 6세는 사자공 하인리히와 화해하고 이탈리아로 가 1191년 4월 교황 첼레스티노 3세에 의해 황제 대관식을 올렸다.

한편 시칠리아에서는 독일 황제에게 통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민족주의 일파가 콘스탄차의 오빠인 루제로의 서자 탕크레드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선출했다.

대관식 후에 하인리히는 시칠리아 왕국 정복을 결심하고 나폴리를 포위했다. 그러나 다른 세력의 지원을 받아 사자공 하인리히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할 수 없이 포위를 풀고(1191.8) 독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1192년 12월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가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를 감금함으로써 그의 지위는 곧 강화되었다.

이듬해 2월 레오폴트 공작이 하인리히에게 잉글랜드 왕 리처드를 인도하자, 리처드는 석방되기 위해 그의 왕국을 하인리히에게 양도하는 데 동의했다. 대신 그것을 봉토로 되돌려 받고, 은화 10만 마르크를 보석금으로 지불하는 것과 함께 하인리히의 시칠리아 왕국 정복을 돕는 대신 추가로 5만 마르크 지불에 합의했다.

1194년 3월 사자공 하인리히와 화해하자, 하인리히 6세는 자유롭게 시칠리아로 주의를 돌릴 수 있었다.

1194년 1월 이미 롬바르디아의 도시들과 베르첼리 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의 충성을 확보해둔 뒤였다. 1194년 2월 탕크레드가 아직 어린 소년인 굴리엘모 3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남기고 죽음으로써 그의 일은 더욱 쉬워졌다. 그리하여 1194년 5월 하인리히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이탈리아에 도착했으며 11월 20일 팔레르모에 입성하여 12월 25일 시칠리아의 왕위에 올랐다. 1195~96년 겨울에는 신성 로마의 제위 세습화에 동의하도록 50여 명의 제후들을 설득해 뷔르츠부르크 회의(1196. 4)에서 다수가 여기에 찬성했다.

그러나 소수는 여전히 이에 반대했으며 에어푸르트 회의(1196. 10)에서는 반대세력이 불어났다. 결국 하인리히는 12월 관습에 따라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가 독일 왕으로 선출된 데 만족해야 했다. 1197년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하인리히가 남부 이탈리아에 가 있는 동안 시칠리아 왕국에서 그의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나 야만적이고도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그해 하인리히는 메시나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