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텐

아키텐

다른 표기 언어 Aquitaine
요약 테이블
위치 프랑스 남서부
인구 3,316,889명 (2013 추계)
면적 41,308㎢
언어 프랑스어
대륙 유럽
국가 프랑스

요약 프랑스 남서부의 주인 도르도뉴·지롱드·랑드·로테가론·피레네자틀랑티크 등을 포함하는 계획지구.

아키텐(Aquitaine), 보르도
아키텐(Aquitaine), 보르도

대체로 아키텐의 유서깊은 지방 서반부에 해당한다. 중심지는 보르도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에서 '아키타니아'(지금의 아키텐)를 피레네 산맥으로부터 가론 강까지 펼쳐진 지역이라고 언급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BC 27~AD 14 재위)는 아키타니아를 로마의 행정구역으로 삼았는데, 그 영역이 북쪽으로는 루아르 강, 동쪽으로는 마시프상트랄까지 이르렀다.

5세기에 서(西)고트족에게 점령당했으며, 6세기에는 프랑크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지방의 유력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지역적 주체성은 보존되었다. 8세기에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 탈환되었는데, 그는 이곳을 자신의 아들 루이(후에 황제 루이 1세가 됨)에게 하나의 왕국으로 주었다. 루이의 아들 페펭 1세와 페펭 1세의 아들 페펭 2세하에서 계속 왕국의 지위를 유지했는데, 그 주요도시들은 툴루즈·리모주·푸아티에였다. 9세기에 노르만족에 의해 파괴당한 후 정치적·사회적 대변동을 겪게 되었으며, 이 변화의 시기에 여러 봉건 영지가 생겨났다.

7세기에 이미 여러 무명인사가 사용했던 아키텐의 공작 칭호를 9세기말에 오베르뉴의 백작이자 클뤼니 대수도원의 설립자인 기욤 1세가 채용했다. 10세기 전반기에 오베르뉴·툴루즈·푸아티에의 백작들이 저마다 이 공작 칭호의 사용권을 주장했으나, 결국에는 푸아티에 백작 기욤 1세(아키텐의 기욤 3세)가 이 칭호를 확보했다. 강력한 푸아티에 백작 가문은 10~11세기에 걸쳐 아키텐에 대한 영유권을 유지했으며, 이따금 가스코뉴와 툴루즈까지 아키텐 공작령에 포함시켜 그 지명이 갖는 옛 중요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후 1137년에 최후의 공작 기욤 10세(푸아티에의 기욤 8세)가 후계자 없이 죽고, 그의 딸 엘레아노르가 루이 7세와 결혼함에 따라 이곳은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루이가 아키텐의 엘레아노르와 이혼하자 그녀는 1152년 앙주의 백작 앙리 플랑타즈네와 결혼했고, 아키텐 공작령은 엘레아노르의 재혼에 따라 새 남편의 소유가 되었다. 앙리는 2년 후 영국의 왕 헨리 2세가 되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후 아키텐을 자신의 아들인 사자심왕 리처드에게 넘겨주었으며, 리처드는 종종 반란을 꾀하는 봉신들을 제압하면서 생의 대부분을 아키텐에서 보냈다.

1199년 리처드가 죽자 이곳은 엘레아노르에게 되돌려졌다가 5년 후 그녀가 죽었을 때 영국 왕실에 합쳐졌고, 그 이후로는 프랑스 내의 다른 영국 소유지들과 같은 역사를 겪었다. 영국 왕실에 귀속될 당시의 아키텐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루아르 강으로부터 피레네 산맥에까지 이르렀으나 남동부는 넓은 툴루즈 백작령에 의해 축소되었다. 아키텐의 전와된 어형인 기옌이라는 이름은 10세기쯤에 사용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후 아키텐의 역사는 백년전쟁의 종식과 함께 프랑스에 완전 재통합된 가스코뉴기옌의 역사 속에 흡수된다.

남부에 솟아 있는 피레네 산맥을 제외하고는 거의 저지대로 이루어진 이 지방은 미디도소 봉에서 최고 높이 2,885m에 이르지만 대부분의 지대는 높이가 480m 이하이다. 로테가론과 도르도뉴 남부 이외의 지역에서는 연강수량이 800㎜ 이상을 기록하는데, 특히 피레네 산맥 쪽으로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해양성기후가 우세하게 나타나며 도시거주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지만 소도시들은 대체로 쇠퇴하고 있다.

16세기말에 도입된 옥수수는 그후로 이곳의 주요곡물이 되었다. 포도재배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며, 19세기말에 환금작물인 담배·사과·배·복숭아·강낭콩·완두콩 등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삼림지대가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보르도 이외에는 썩 발달한 공업지역이 없다.

지도
아키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