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왕 존

무지왕 존

다른 표기 언어 존 ,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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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167. 12. 24, 잉글랜드 옥스퍼드
사망 1216. 10. 18/19, 노팅엄셔 뉴어크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잉글랜드의 왕(1199~1216 재위).
별칭은 무지왕(無地王) 또는 실지왕(失地王) 존(John Lackland).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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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젊은시절과 왕위경쟁
  3. 즉위
  4. 프랑스와의 전쟁
  5. 교회와의 싸움
  6. 귀족 반란과 마그나 카르타
  7. 평가
존(John)
존(John)

개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벌인 전쟁으로 인해 노르망디를 비롯하여 프랑스에 갖고 있던 그밖의 영지를 대부분 빼앗겼다.

또한 잉글랜드에서는 봉건 영주들의 반란이 일어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1215).

젊은시절과 왕위경쟁

존은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헨리는 사랑하는 아들 존이 모리엔(사보이) 백작 움베르토 3세의 딸인 이사벨라와 결혼할 때 그에게 넓은 땅을 양도할 계획을 세웠지만(1173), 존의 형들이 이 계획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다. 잉글랜드에서 헨리는 존을 위해 대비책을 마련했다(1174~76). 글로스터 백작작위를 존에게 양도한 것도 그런 대비책의 하나였다. 존은 또한 아일랜드 영주의 지위를 받았는데(1177), 1185년 4월부터 그해말까지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정치적으로 무분별한 짓을 저질렀고, 그때문에 무모하고 무책임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헨리가 막내 아들 존을 계속 총애한 것은, 살아남은 헨리의 아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리처드(훗날의 사자심왕 리처드)가 1189년 6월에 반란을 일으킨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존은 아버지 헨리를 버리고 리처드 편에 가담했다.

1189년 7월 리처드가 즉위하자 존은 모턴 백작(이 칭호는 존이 평소에 쓰는 칭호가 되었음)이 되었고 아일랜드 영주의 지위를 승인받았으며, 해마다 6,000파운드의 수입이 들어오는 땅을 받았고, 글로스터 백작의 상속녀인 이자벨과 결혼했다.

그는 또한 리처드가 십자군원정을 떠나 잉글랜드를 비운 동안에는 잉글랜드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1190. 3). 그러나 존의 행동은 이제 왕위계승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었다. 당시 3세가 된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아서) 1세는 존의 형인 조프루아(제프리)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아들인데, 존과 왕위를 다투는 강력한 경쟁자는 이 어린 조카뿐이었다.

리처드가 아르튀르를 후계자로 인정하자(1190. 10), 존은 당장 맹세를 깨고 잉글랜드로 돌아와 리처드 밑에서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대법관 윌리엄 롱챔프에 대한 반대운동을 이끌었다. 1193년 1월에 리처드가 십자군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독일에서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존은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의 지배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193년 4월에 존은 휴전협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필리프와 다시 협정을 맺어 리처드의 소유지를 분할하고 잉글랜드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합의했다.

1194년 초에 리처드가 돌아오자 존은 모든 땅을 빼앗기고 추방되었다. 존은 5월에 리처드와 화해했고 1195년에 모턴과 아일랜드를 포함한 일부 영지를 되찾았지만, 그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1196년에 브르타뉴인들이 아르튀르를 필리프 2세에게 넘겨준 뒤였다. 이 사건으로 리처드는 존을 후계자로 인정하게 되었다.

즉위

후계자 계승 정책에 따르자면 아르튀르가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지만, 1199년에는 이 정책이 널리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해 4월 리처드가 죽은 뒤 존은 노르망디 공작의 지위를 받았다가 5월에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필리프 2세의 후원을 받는 아르튀르는 앙주에와 멘에서 리처드의 후계자로 인정받았고, 존은 1년 뒤에야 르 굴레 조약에 의해 필리프에게 수입과 영토를 양보하는 대가로 리처드의 프랑스 영지 전역에서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와의 전쟁

그의 첫번째 아내인 글로스터의 이자벨은 끝내 왕비가 되지 못했다. 존과 이자벨은 둘 다 헨리 1세의 증손이었기 때문에 이 결혼은 근친혼이라는 이유로 1199년에 취소되었다. 그후 존은 프랑스에 있는 자신의 영지인 푸아투의 혼란스러운 정치에 개입했고, 경쟁 관계인 뤼지냥 가문과 앙굴렘 가문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면서 앙굴렘 가문의 상속녀이며 뤼지냥 가문의 위그 9세와 약혼했던 이자벨과 결혼했다(1200. 8). 이 정략결혼에 분노한 뤼지냥 가문은 이듬해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난 것은 존의 2번째 결혼 때문이었다.

그들은 필리프 2세에게 호소했고 필리프 2세는 존을 궁정으로 소환했으나 존이 불응하자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났다. 존은 1202년 8월에 미르보에서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조카인 브르타뉴의 아르튀르를 사로잡았지만 노르망디를 잃어버렸다(1204). 1206년까지는 앙주와 멘, 푸아투의 일부도 프랑스 왕 필리프에게 넘어갔다. 헨리 2세와 리처드 시대에 예견되었던 이런 실패는 프랑스의 자원이 훨씬 우세하고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자원은 점점 고갈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실패는 존의 명성에 큰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존은 거의 모든 시간을 잉글랜드에서 보내야 했다. 또한 대법관이자 캔터베리 대주교인 휴버트 월터의 죽음(1205)은 이와 더불어 그의 정부가 훨씬 더 개인적인 성격을 띠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고, 그의 집안 사람들이 중요한 공직에 앉아 이런 성격을 더욱 조장했다. 대륙에서 맛본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그의 결심은 무모할 만큼 효율적인 재무행정에서 열매를 맺었다. 그의 재무행정의 특징은 소득세, 왕실 소유림 조사, 유대인에 대한 과세, 봉건적 토지 보유에 대한 대규모 조사, 그리고 그의 봉건적 특권을 점점 더 가혹하게 이용한 것 등이었다.

이런 조치들로 그는 나중에 폭군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교회와의 싸움

교황과의 관계는 그의 명성에 불길한 영향을 미쳤다.

휴버트 월터가 죽은 뒤 캔터베리 대주교의 선출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존이 지명한 사람의 선출을 무효로 하고 스티븐 랭턴을 선출하게 했다(1206. 12)(교황제). 존은 잉글랜드 왕이 주교 선출에서 누린 전통적 권리에 근거를 두고 랭턴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1208년 3월에 인노첸시오 3세는 잉글랜드에 성무금지령을 내렸고 존을 파문했다(1209. 11). 이 다툼은 1213년까지 지속되었고, 그때까지 존은 주교관구와 수도원의 수입에서 10만 파운드가 넘는 돈을 긁어모았다.

그러나 이 논쟁은 대륙에 있는 땅을 되찾으려는 존의 의도에는 위험한 장애물이었다. 1212년 11월에 그는 교황이 내세운 조건과 랭턴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했다. 그가 1213년 5월 15일에 도버 근처에 있는 유얼에서 잉글랜드 왕국을 로마 교황 특사에게 넘겨주고, 해마다 1,000마르크(666파운드 13실링 4펜스)의 공물을 교황에게 바치는 봉신으로서 왕국을 돌려받은 것은 그의 간절한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임이 분명하다.

1213년 7월에 랭턴은 존을 파문에서 해제했고 성무금지령은 1년 뒤에 풀렸다. 그리하여 존은 필리프와의 싸움만이 아니라 임박한 잉글랜드 귀족들과의 싸움에서도 교황을 확고한 동맹자로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이루었다. 그러나 성무금지령이 내려진 동안 그가 교회를 다룬 방식은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별로 반감을 사지 않았지만, 수도원의 연대기 편자들을 격분시켰다. 이들은 그때부터 존을 폭군이라고 비난했고, 그보다는 근거가 부족하지만 신성을 모독하고 신앙심이 없다는 비난도 퍼부었다(가톨릭 교회).

귀족 반란과 마그나 카르타

귀족들의 불만은 1212년 8월에 존에 대한 암살 음모로 절정에 이르렀다.

존이 웨일스 원정 계획을 세우자, 귀족들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존을 죽이거나 버리고 달아나자는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했다. 교황 인노첸시오가 존과 화해하면서 내세운 조건에는 이 음모에 연루된 사람들 가운데 유스티스 데 베스키와 로버트 피츠월터를 복권시키라는 항목도 들어 있었다. 귀족들은 곧 교황의 지지를 잃었지만 계속 스티븐 랭턴의 보호를 받았다. 불평분자들을 교묘하게 고립시킨 존은 오랫동안 계획했던 프랑스 원정에 비로소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214년 2월에 라로셸에 상륙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1220년까지를 기한으로 하는 휴전협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214년 10월에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훨씬 더 팽배해 있는 불만에 직면해야 했다. 이 불만 세력은 주로 북부와 동부 및 런던 주변의 여러 주에 집중되어 있었다. 양쪽은 서로 교황에게 호소하면서 오랫동안 협상을 벌였지만 1215년 5월에 결국 내전이 일어났다.

랭턴이 5월에 반란자들 편으로 돌아서자 존은 다시금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6월 19일에 러니미드에서 '귀족의 요구사항', 즉 마그나 카르타를 받아들였다. 마그나 카르타의 내용은 봉건적 권리를 보장하고 잉글랜드법을 고쳐 쓴 것이었다. 그러나 좀더 완강한 귀족들은 이 타협에 반대했고 존도 마그나 카르타에 도장을 찍은 직후에 교황 인노첸시오에게 호소했기 때문에, 이 타협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는 왕의 편에 섰고, 뒤이어 일어난 내전에서 존은 로체스터 성을 점령하는 한편 북부의 주와 스코틀랜드 국경지방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루이 왕자(나중의 루이 8세)가 귀족들의 요청으로 잉글랜드를 침공하자 존의 대의명분은 약해졌다. 존은 정력적으로 전쟁을 계속했지만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으로 타협에 따른 평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고, 이 타협안에는 반란자들의 원상복귀와 존의 아들 헨리 3세의 왕위계승 및 루이의 철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평가

존의 평판은 그가 죽을 당시에도 좋지 않았지만 후세의 문필가들로 말미암아 더욱 나빠졌다.

13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의 장점이 조금이나마 인정받은 시대는 그와 교황 사이의 논쟁을 염두에 둔 16세기뿐이었다. 존은 의심이 많고 복수심이 강하며 믿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브르타뉴의 아르튀르 1세는 그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 살해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루기 어려운 변경 영주의 아내인 마틸다 데 브라오즈는 왕궁의 감옥에서 아들과 함께 굶어죽었다. 그러나 존은 교양과 학식을 갖춘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신앙심은 독실하기보다 습관적이었지만, 코번트리 교회와 레딩 대수도원 및 우스터 성당에 많은 돈을 기부한 것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는 우스터에 묻혔는데 이곳에는 아직도 그의 동상이 남아 있다. 그는 대단히 활동적이어서 사냥을 무척 좋아했고 언제라도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이런 여행을 통하여 얻은 잉글랜드에 대한 지식은 어떤 군주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사법 행정과 재무 행정에 개인적인 관심을 가졌고,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재무와 사법 행정, 옥새와 왕실의 중요성, 과세 방법과 군대조직법, 도시에 특권을 부여하는 방식에 큰 발전을 이룩했다.

그의 성격은 변덕스러웠지만 정치적 판단력은 날카로웠다. 1215년에는 많은 귀족들이 국왕 편에 서서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