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노르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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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켈트족의 거주지였으나 BC 56년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5세기 후반에는 프랑크족 메로빙거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8세기부터 바이킹의 침략이 행해졌고, 911년 프랑크 왕 샤를 3세는 루앙과 센 강 어귀를 바이킹의 수장인 롤로에게 넘겨주었다. 그후 노르만족인 바이킹이 정착한 지방은 노르망디로 알려지게 되었다.
노르망디 공 윌리엄 1세는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노르망디와 함께 통치했다. 1204년 프랑스에 통합되었고 백년전쟁 중인 15세기 초에 다시 영국령이 되었으나 1450년 프랑스가 영구적인 지배권을 획득했다.
1791년 프랑스 혁명정부는 옛 노르망디 지방을 망슈·칼바도스·오른·외르·센앵페리외르 주로 나누었다. 노르망디는 1944년 6월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이곳에서 행해지면서 널리 알려졌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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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고대역사
  3. 프랑스 지방
노르망디
노르망디

개요

옛날의 노르망디 지방과 같은 지역이다.

고대역사

센 강 및 외르 강 계곡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그곳의 켈트족(族) 거주민들이 BC 56년에 카이사르에 의해 정복되어, 이 지방은 결국 로마의 속주 갈리아루그두넨시스세쿤다가 되었다. 주민들은 3,4세기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며, 5세기 후반에는 프랑크족 메로빙거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 프랑크족 왕국인 네우스트리아의 일부가 되었다.

해안은 8세기부터 고대 스칸디나비아 해적들인 바이킹의 침략을 받아 거듭 황폐해졌다.

노르망디 지방의 지배자였던 카롤링거 왕조가 약해지면서 바이킹의 약탈행위는 더 멀리 내륙까지 뻗쳤고, 마침내 프랑스의 단순왕 샤를 3세는 루앙 주변 영토와 센 강 어귀를 생클레르쉬르레프트 조약(911)에 의해 바이킹 최대 우두머리인 롤로에게 양도했다. 롤로 지배하에 많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이 지방에 정착하기 위해 이주했으며, 그들은 프랑스의 언어·관습·종교를 받아들였다.

노르만인(人)인 이들 바이킹들이 정착한 지방은 노르망디로 알려지게 되었다. 롤로의 뒤를 이은 개신교 노르망디 공(公)들은 일련의 전쟁을 통해 주변영토를 획득함으로써 매우 강성해져서 이들이 차지한 영역 내에서는 사실상 프랑스 국왕과는 무관하게 지배권을 행사했다. 노르망디 공이며 롤로의 먼 계승자인 윌리엄 공이 1066년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잉글랜드의 정복왕 윌리엄 1세가 됨으로써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지방을 자신의 지배하에 통합했다. 1087년 윌리엄 1세가 죽자 그의 아들들이 계승권을 둘러싸고 다투면서 노르망디 공은 곧 잉글랜드 왕이라는 등식은 깨졌다.

형제간의 싸움은 잉글랜드 왕 헨리 1세가 탱슈브레 전투에서 그의 형제인 노르망디 공 로베르를 패배시킨 1106년에 끝나고, 노르망디 공의 계승권도 당분간 잉글랜드 왕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1144년 앙주의 백작인 제프리 플랜태저넷이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그는 1150년에 이 공작령을 그의 아들 앙리에게 양도했고, 앙리 공은 1154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노르망디 지방은 서로 멀리 떨어진 영토들로 엮어진 소위 앙주 제국의 일부가 되어 헨리 2세와 그의 뒤를 이은 잉글랜드 왕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이유로 노르망디는 앙주가의 잉글랜드 왕들을 상대로 싸우는 카페 왕조의 프랑스 왕들에게 제1의 쟁탈목표가 되기도 했다.

노르망디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잉글랜드 앙주 왕가 지배자들로부터 빼앗기 위해 프랑스 카페 왕조의 루이 7세와 존엄왕 필리프 2세가 벌였던 군사적·외교적인 투쟁은 1204년 필리프 2세가 이 지방을 완전히 정복·합병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파리 조약(1259)이 체결되고서야 잉글랜드 왕 헨리 3세가 이 지방에 대한 권리를 공식적으로 포기하여 노르망디 공작령을 프랑스에 빼앗겼음을 인정했다.

영국은 이후로 백년전쟁 중인 15세기초에 이 지방을 다시 정복했으나, 포르미그니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이 1450년 영구적인 지배권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 지방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노르망디 공작령을 1465년 자신의 아우 샤를에게 주었다가 곧 되찾았으며, 마침내 1468년 투르에서 열린 프랑스 삼부회를 설득하여 노르망디 지방은 프랑스 왕권과 불가분임을 선언하게 했다.

그후로 이곳은 프랑스의 한 지방으로 통치되었다.

루이 14세의 행정관들은 노르망디의 제도들을 프랑스에 동화시키고 상업 및 해상활동을 증진시켰다. 낭트 칙령(1685)의 철회로 인해 노르망디 지방의 경제 및 해군력에 크게 기여했던 위그노 신도들이 대대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주해 나갔지만, 18세기에 곧 번영을 되찾았다.

1791년 프랑스 혁명정부는 옛 노르망디 지방을 망슈·칼바도스·오른·외르·센앵페리외르(지금의 센마리팀) 주들로 나누었다. 노르망디라는 이름은 제2차 세계대전사에서 1944년 6월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 연합군이 상륙한 장소로 나타난다.

이 지역은 흔히 들판의 경계가 되고 있는 산울타리들 및 완만한 구릉들이 사이사이에 있는 평평한 초원과 농지로 이루어졌다. 주요 경제활동은 농사·젖소사육·어업·관광업이다. 역사상의 수도였던 루앙에서는 섬유가 생산되고, 셰르부르·르아브르 항은 조선업과 무역중심지이면서 섬유업·정유업도 보조적으로 발달했다.

동부 노르망디 지방의 평야에 사는 시골 주민은 대부분이 큰 마을들에 집중되어 있는 편이다. 이농현상으로 농지 통합이 늘기는 했지만 농장들은 보통 작은 규모이다.

1528년 이후 개신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래도 로마 가톨릭이 우세하다. 개신교도 지역은 루앙·캉, 그리고 센마리팀 주의 루너리 마을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은 이 지방의 전통적인 생활, 특히 많은 지방교회들이 후원하는 자선단체들의 활동에서 여전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노르망디 지방에서는 7월초에 기조 시에서 열리는 국제적인 음악·민속 축제를 포함하여 유서깊은 많은 장(場)들과 축제들이 열린다.

지명 및 가문 이름들은 이곳이 북유럽인·앵글로색슨족·프랑크족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영어식 표현과 북유럽어(語)에서 파생된 말들을 많이 받아들인 노르만족 방언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노르망디의 요리법은 크림을 많이 사용하여 달걀·생선·가금류·채소 등과 함께 차려낸다.

칼바도스에서 생산되는 최상급의 사과술은 오크나무로 만든 조그만 통에서 견과들과 함께 숙성되거나 증류되어 '칼바도스'라는 이름의 유명한 사과 브랜디가 된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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