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정연애

궁정연애

다른 표기 언어 amour courtois

요약 중세 유럽의 서정시와 로맨스에 많이 표현된 연애관.
(영). courtly love. 기사도적(騎士道的) 사랑이라고도 함.

사랑을 바치는 남자와 귀부인과의 관계는 가신(家臣)과 군주의 관계와 매우 비슷하다.

11세기말 남부 프랑스의 아키텐과 프로방스의 궁정 음유시에 처음 나타난 이 개념은 사고와 감정의 혁명을 불러일으켜, 그 영향은 서구문화에 지금까지도 뚜렷이 나타나 있다.

궁정연애를 하는 남자는 자기의 귀부인을 섬기기 위해 존재했다. 당시의 결혼은 보통 사업적인 이해관계나 권력동맹의 밀약의 결과였기 때문에 그가 바치는 사랑은 예외없이 합법적인 혼인관계를 벗어난 부정한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남자는 자신이 전능한 사랑의 신을 섬기고 성녀(聖女)를 숭배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궁정연애에서는 부정(不貞)이 가장 치명적인 죄악이었다.

이 궁정연애 개념은 다른 11세기 이전의 문화에서는 거의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11세기 남부 프랑스 성곽문화 속의 생활조건은 여성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성 안에는 남자가 많고 여자는 얼마되지 않았다. 시인들은 육체적인 정열을 이상화하고자 결혼 상태를 넘어서는 지경을 바라보게 되었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궁정연애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는 데 자극을 준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의 시 〈연애술 Ars amatoria〉은 애인을 열정의 노예로서 사랑 때문에 탄식하고 떨며 얼굴이 창백해지고 잠을 못이루고 결국 죽게 된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

러나 오비디우스풍 애인의 여성숭배에는 감각적인 보상을 받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던 반면, 궁정연애에서는 겉으로는 마찬가지의 열정을 나타내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귀부인에 대한 존경심에 불타고 있다.

이런 이상적인 견해가 생겨난 배경은 당시의 열렬한 종교적 신앙심 특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종교적 사랑을 고려해볼 때 부분적으로 해명이 되는 바 거기에는 정통인 것과 이단적인 것이 뒤섞여 있다. 즉 프랑스가 십자군원정 기간에 이슬람 세계와 접촉을 갖게 되면서 아라비아의 신비주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데도 이유가 있었다.

이 신비철학은 궁정연애의 특색이 되는 사랑이란 달콤한 열병이며 충성스런 봉사를 요구한다는 관념을 구현하고 있다.

궁정연애는 사회적·성애적·종교적·철학적인 요소 등 여러 가지가 결합되어 생긴 복잡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상은 유럽 전역에 급속도로 퍼졌으며 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였다가 뒤에 잉글랜드 헨리 2세의 왕비가 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였다.

12세기 최후·최고 음유시인 중의 한 사람인 베르나르 드 방타두르는 엘레오노르를 칭송하여 여러 편의 격조높은 시를 썼다.

크레티앵 드 트루아는 엘레오노르의 딸 샹파뉴의 마리의 격려를 받아 궁정 로맨스 〈랑슬로:수레 탄 기사 Lancelot, ou le Chevalier de la Charrette〉를 지었는데, 이 작품은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도도하고 터무니없는 요구를 모두 들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앙드레 르 샤플랭은 3권으로 된 논문에서 궁정연애의 원칙을 성문화했다. 13세기의 장편 우화시 〈장미이야기 Roman de la rose〉에는 기쁨과 절망 사이의 사랑에 빠진 남자가 그려졌다.

이것은 곧 유럽의 문학 전체에 스며들었다.

중세독일 궁정가인(宮廷歌人) 미네징거의 서정시와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1210경) 같은 궁정 서사시들이 그 영향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탈리아의 시에는 일찍이 12세기에 궁정연애의 전형들이 나타났는데 14세기에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라우라에게 바친 소네트들 속에 그 진수가 담겨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보다 일찍이 단테가 궁정연애와 신비스런 환상을 융합시켜냈던 일이다.

단테베아트리체는 이승에서는 그의 지상(地上)의 영감의 대상이었고 〈신곡 La divina commedia〉에서는 낙원의 신비로 그를 인도하는 영적인 길잡이가 되었다.

궁정연애는 영국 중세문학의 대부분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영국에서 궁정연애는 결혼으로 이어지는 구혼 절차의 한 부분으로 채택되었으며, C. S. 루이스가 〈사랑의 우화 Allegory of Love〉(1951 개정판)에서 논했던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후기 연애문학에 이르러서야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