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디우스

오비디우스

다른 표기 언어 Publius Ovidius Naso
요약 테이블
출생 BC 43. 3. 20, 로마 술모
사망 AD 17, 모이시아 토미스
국적 로마

요약 <사랑의 기술>, <변형담>으로 유명하다. AD 8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으로 토미스로 추방되었는데, 여기서 쓴 글 가운데 특히 <슬픔>이 유명하다. 오비디우스는 지나치게 회의주의적이었고 독자적인 지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시를 제외하고는 어떤 대의명분에도 헌신하지 못했다. 시에 대한 헌신은 절대적이었다. 오비디우스가 후세의 시문학에 미친 영향은 주로 기법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는 애가 2행연구를 완성했고, 6보격을 모든 목적에 맞는 운율과 유창한 의사 전달수단으로 만들었다. 음유시인과 궁정연애를 노래한 시인들, 초서·셰익스피어·괴테 및 에즈라 파운드 등이 그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여자를 하나의 성으로서 순수하게 좋아했다는 사실과 이런 그의 인간적 특성 때문이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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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젊은시절
  2. 원숙기
  3. 후기생애

〈사랑의 기술 Ars amatoria〉·〈변형담 Metamorphoses〉으로 특히 유명하다. 그는 AD 8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령으로 토미스로 추방되었다. 부도덕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 그 이유지만, 그 행위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흑해 연안에 있는 로마 제국의 오지인 토미스에서 그는 계속 글을 썼고, 여기서 쓴 글 가운데에는 특히 〈슬픔 Tristia〉이 유명하다.

오비디우스는 흔히 후원과 동정의 대상이 되어왔으나, 그의 진정한 성격과 시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가 합리주의자이며 매우 지적인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유물론적인 시인 루크레티우스에게 본능적으로 공감했다. 그는 지나치게 회의주의적이었고 독자적인 지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시를 제외하고는 어떤 대의명분에도 헌신하지 못했다.

그는 시에 대한 신념 속에서 살고 죽었으며, 이 신념은 〈사랑 Amores〉에서 시작하여 유배지에서 쓴 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작품에 스며 있다. 시에 대한 그의 헌신은 절대적이었다. 낱말에 대한 감각적인 이해와 언어를 다루면서 느끼는 기쁨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이해와 기쁨이었다. 이런 특성과 함께 그는 넘쳐 흐르는 상상력과 풍부한 독창력도 갖고 있었다. 인간성에 대한 그의 이해는 베르길리우스만큼 깊지는 않다 해도 그보다 더 넓었고, 아마 보통 사람에게는 오비디우스가 더 감동적이고 이해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는 다정한 친구이자 익살스럽고 이해심 많은 연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문인이자 창조자이며 예술가였고, 가장 완전하고 정확한 의미에서의 시인이었다.

고대에 오비디우스가 후세의 시문학에 미친 영향은 주로 기법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는 애가 2행연구(二行聯句)를 완성했고, 6보격을 모든 목적에 맞는 운율과 유창한 의사 전달수단으로 만들었다. 베르길리우스의 영향을 직접 받은 시인들조차도 거의 모든 시행에서 오비디우스의 영향을 드러내고 있다.

중세에 오비디우스는 대다수의 고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신념과 지식의 원천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변형담〉은 그리스 신화의 풍요로움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력적인 통로를 제공했다. 그러나 중세뿐 아니라 그후에도 그의 주된 매력은 그의 글이 갖고 있는 인간성(쾌활함, 동정심, 생기발랄함, 그림처럼 생생하고 감각적인 묘사)에서 나온다. 그는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시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음유시인과 궁정연애를 노래한 시인들, 초서·셰익스피어·괴테 및 에즈라 파운드 등이 그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여자를 하나의 성(性)으로서 순수하게 좋아했다는 사실과 아울러 바로 이런 인간적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젊은시절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는 로마의 대다수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 술모(지금의 술모나)는 로마에서 동쪽으로 약 140㎞쯤 떨어진 작은 마을인데, 그는 시에서 이 고향의 아름다운 들판을 애정이 넘치는 어조로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그의 가문은 유서 깊은 명문일 뿐 아니라 상당히 부유했으므로, 아버지는 오비디우스와 그의 형을 로마로 유학 보낼 수 있었다. 오비디우스는 고향에서 초등 및 중등 교육과정을 빨리 끝냈기 때문에 로마로 떠날 당시 12세의 소년이었다. 로마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스승들 밑에서 당시 교육의 3번째 단계인 수사학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웅변학교에서 로마의 소년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즉흥적으로 유창하게 말하는 기술을 익혔다.

당시 사람들은 철학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 소년들에게는 웅변학교가 교육의 마지막 단계이자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교육방법은 대체로 법률과 관련된 주제를 미리 설정해놓고, 그 주제에 대한 틀에 박힌 웅변술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제는 가상의 상황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기괴하기도 했다. 오비디우스의 형은 법조인으로서 장래성이 있었으나 일찍 죽어 포부를 이루지 못한 반면, 오비디우스는 형과는 달리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던 법조인의 직업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무렵 오비디우스에 관하여 우리에게 귀중한 자료를 남겨준 대(大)세네카(BC 55경~AD 37경)에 따르면, 오비디우스는 격식을 차린 논쟁에 염증을 느낀 대신, 도덕적이거나 심리적인 고찰을 요구하는 '윤리적' 주제를 선호했다고 한다. 어쨌든 학창시절의 경험은 그의 문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웅변은 가장 극단적인 의미에서 '수사학적'이었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요점과 궤변 및 역설의 탐색, 개연성을 참신하고 독창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앞서 연설한 사람을 능가하고자 하는 야망 따위가 학교 웅변을 지배했다.

학교의 이런 경쟁적인 분위기는 오비디우스의 타고난 표현능력을 키워주고 감정 전달에 대한 그의 관심을 더욱 부추긴 것으로 생각된다.오비디우스는 로마 기사계급(평민과 원로원 의원의 중간 지위)의 일원으로서 공직을 가질 예정이었고, 그의 아버지도 아들을 공직자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우선 아테네(당시 아테네는 상류층 젊은이들이 교양을 쌓기 위해 즐겨 찾아가는 장소였음)에서 한동안 지낸 다음, 친구이자 동료 시인인 폼페이우스 마케르와 함께 그리스를 여행했다.

이 경험은 그의 시에서 고전적 풍경에 확고히 뿌리박은 신화적 연상의 형태로 열매를 맺었다. 그후 오비디우스는 공식 계급들을 올라가기 위한 첫 단계인 하급 법관직을 충실히 수행했지만, 곧 공직생활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가 초기 시에서 보여주는 법률적 구절과 은유에 대한 취향은 공직 생활의 소산인 것 같다.

직업을 떠난 오비디우스는 그때부터 시에 몰두하는 한편, 같은 또래의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와 선배인 호라티우스 등 여러 시인들과 사귀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와는 만난 적이 없었고, 티불루스는 오비디우스와 잘 알게 되기 전에 죽었다. 티불루스의 장례식에서 오비디우스는 애도시를 낭독했는데, 이 시는 그가 동시대 시인에게 바친 가장 따뜻한 찬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의미가 있다.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및 프로페르티우스는 모두 아우구스투스 체제를 대변하는 가이우스 마이케나스를 중심으로 한 그룹에 속해 있었던 반면, 확실히 그가 초기에 쓴 시의 유형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장려한 '공식적인' 도덕적 태도와 어긋나는 인생관이나 사랑과 시에 대한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아우구스투스 시대).

그의 첫번째 시집인 〈사랑 Amores〉은 BC 20년경부터 5편으로 나뉘어 띄엄띄엄 발표되었다.

이 시집은 애가체 운율로 된 일련의 짧은 시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코린나라는 여자와의 연애가 발전하는 다양한 단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주제에 대한 착상과 기법은 감정적이라기보다 지적이며, 이 시집은 연애시라는 장르를 은근히 희롱한 것에 가깝다. 나중에 그의 몰락을 가져오는 데 한몫을 하게 된 〈사랑의 기술〉은 BC 1년경에 발표되었다.

이 시는 여자를 유혹하여 밀통하는 기술을 메시지로 담고 있었던 만큼, 당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공개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도시개혁안과는 근본적으로 상치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주의의 목표와 야심에 진지하게 헌신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 시를 좋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시는 또한 경박하고 재치없는 문맥 속에 아우구스투스의 개인적 명성을 상징하는 것들을 수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 직후에 오비디우스는 이 시의 주장을 장난조로 철회한 〈사랑의 치료법 Remedia amoris〉이라는 시를 발표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무렵에 오비디우스는 전체적으로 보아 단조로운 극적 독백집 〈여주인공들의 편지 Epistulae Heroidum〉를 발표했다. 이 인물 스케치들의 주제는 사랑이나 소재는 신화적이며, 여기에서 〈변형담〉의 초기단계를 찾아볼 수 있다.

원숙기

오비디우스는 사랑을 노래한 시인으로서 자신이 직접 시의 등장인물이 되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심지어는 비밀을 폭로했기 때문에 존경과 주목을 받았다.

〈사랑〉·〈사랑의 기술〉·〈사랑의 치료법〉에서는 그가 젊은 시절에 행한 방탕의 흔적을 읽을 수 있지만, 작품에 나타난 그의 주장은 대부분이 그 당시의 일반적인 문학적 태도에 속하는 것이었다. 사실 오비디우스는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존경할 만한 가장이었던 것 같다. 그는 아주 젊었을 때 결혼했다가 곧 이혼했는데, 이 첫번째 아내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밖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2번째 아내에게는 아무 비난도 하지 않았지만, 이 결혼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지체높은 귀족가문의 딸과 3번째로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안정되어 있었고 상호간의 애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오비디우스의 딸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데, 이 딸은 아마 2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자식인 듯하다. 오비디우스는 독창적인 작품을 상당히 많이 발표했기 때문에, 이 무렵에는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위대한 아우구스투스 통치기간의 마지막 시인인 호라티우스는 BC 8년에 죽었고, 오비디우스와 경쟁할 만한 시인은 아무도 없었음). 〈사랑〉의 마지막 시에서 오비디우스는 이제 곧 좀더 야심적인 주제를 다루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3가지 주요장르에 속한 작품을 발표하여 이 약속을 지켰다.

비극 〈메데이아 Medea〉는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평론가인 퀸틸리아누스와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이 작품을 칭찬했고, 같은 주제를 다룬 세네카의 희곡에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하다. 오비디우스의 〈달력 Fasti〉은 로마의 1년과 종교축제를 설명한 책으로, 1개월에 1권씩 1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1~6월의 6권뿐이다.

그는 다양한 축제 모습을 묘사하고, 그 축제들의 전설적 유래를 추적하고 있다. 이런 '인과 관계를 다룬' 시는 헬레니즘 시대(BC 323 이후)의 시인들, 특히 칼리마코스의 특징이었는데, 오비디우스가 일부러 이 장르를 선택한 것은 '로마의 칼리마코스'를 자처하는 프로페르티우스의 주장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달력〉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문학 프로그램에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의도를 가진 국민시였고, 어쩌면 지배층의 눈에 벗어난 작가가 총애를 되찾기 위해 쓴 시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는 황실에 대한 아첨과 애국적인 구절이 많이 들어 있으며, 그 때문에 이 작품은 훌륭한 대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성이 떨어진다.

〈변형담〉도 당시의 문학적·정치적 배경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한다. 아우구스투스 통치기간의 문인들 가운데 가장 '아우구스투스적'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조차도, 계관시인이라는 지위에 따르는 일반의 기대와는 달리 공식적인 시(주요전투에서 거둔 승리를 찬양하는 서사시 따위)를 요청받으면 내키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베르길리우스는 마침내 서사시 〈아이네이스 Aeneid〉를 썼지만, 이 시는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아이네이스〉는 발표되자마자 국민적 서사시로 인정받은 유일무이한 작품이었던 만큼 이후 시인들에게 1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즉 베르길리우스 이후, 역사나 신화를 정면으로 다루는 어떤 서사시도 〈아이네이스〉에 뒤처지는 작품이 될 것이었다.

오비디우스의 본능과 지성은 그러한 서사시에 숨어 있는 함정을 조심하라고 그에게 경고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가 그랬듯이, 자기만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새로운 계획에 따라 서사시를 쓰기로 결정했다.

〈변형담〉은 전 15권으로 이루어진 장시로서 오늘날 남아 있는 오비디우스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6보격 운문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신화나 전설 중에서 변형(변신)의 모티프가 담겨 있는 이야기들을 집대성한 것으로, 이 이야기들은 천지창조(혼돈이 질서로 변한 최초의 변형) 때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어서 신으로 격상되기까지(이것도 역시 내전이라는 혼돈이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라는 질서로 바뀐 마지막 변형임) 연대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변형이라는 모티프의 중요성은 실질적이라기보다 표면적이며, 이 시의 근본적 주제는 열정으로, 이것은 시인이 사용하는 온갖 교묘한 이야기의 연결 및 배열 방식보다도 더 많은 통일성을 작품에 부여하고 있다. 오비디우스의 초기 시를 지배했던 성애에 대한 강조는 인간 감정(그가 묘사한 신들이란 인간에 다름없었음)의 거의 모든 형태에 대한 탐구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오비디우스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그의 풍부한 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의 재치와 수사적 표현의 뛰어남, 신화에 대한 지식, 서술 및 묘사의 타고난 재능, 독특하고 풍부한 상상력 등이 이 작품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로마의 시가 대부분 그러하듯 〈변형담〉도 매우 문학적인 바탕을 지닌 작품이다. 오비디우스가 읽어서 흡수한 엄청난 양의 그리스와 로마 시는 이 작품에서 창조적인 변용을 거쳐 독창적이고 유례없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의 문체 역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어법을 개성적으로 변형한 것으로, 이 시에 포함되어 있는 장르와 어조의 다양한 변화에 잘 맞추어져서 독자들이 상당히 긴 이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안정되고 기분 좋은 속도로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소재와 소재를 다루는 기법에서 〈변형담〉은 아우구스투스 통치기간의 문학작품답지 않을 뿐더러, 언어를 제외하고는 로마적인 동시에 그리스적이기도 하다. AD 8년에는 이 작품이 아직 정식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무리가 되어 있었다. 오비디우스의 인생에 뜻밖의 재난이 닥쳐온 것은 그가 확고히 성공의 절정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던 바로 이 순간이었다.

후기생애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엘바 섬에 있었던 오비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직접 면담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면담에서 그는 엄한 꾸지람을 받은 뒤, 흑해 연안에 있는 토미스로 추방되었다. 이런 벌을 받는 이유에 대해 오비디우스 자신은 시 〈사랑의 기술〉과 또 1가지 죄 때문이라고 여러 번 언급했는데, 이 죄가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으며 그저 범죄가 아니라 무분별한 짓이었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2가지 혐의가 정확히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미 여러 해 전에 출판되었던 〈사랑의 기술〉이 뒤늦게 작가에게 불리한 증거로 들추어졌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좀더 최근에 저지른 '잘못'과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잘못이 무엇이든 간에, 아우구스투스는 그것을 자신과 자기 가족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대해 진노했다. 오비디우스 자신이 〈사랑의 치료법〉에서 말했듯이, 성공한 사람은 누구나 적을 갖게 마련이다. 〈사랑의 기술〉뿐 아니라 〈변형담〉의 몇몇 대목에서도 그는 공인된 가치관을 명백하게 무시하고 있으며, 이것을 교묘히 이용하면 각자의 이미지를 사회와 정치에 불만을 품은 반체제 분자로 만들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우구스투스가 전부터 오비디우스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었다면, 또는 당시에 오비디우스가 저지른 '잘못'(그것이 심각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을 계기로 하여 여러 해 전에 그에게 모욕당한 일이 갑자기 생각났다면, 아우구스투스는 위험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불쾌감을 안겨주는 이 인물을 로마에서 제거할 절호의 기회로 붙잡았을지도 모른다.

오비디우스의 상황은 기묘했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대역죄(라틴어로는 마예스타스)였는데, 대역죄에는 수많은 죄가 포함될 수 있었다. 그는 황제의 사저에서 재판을 받았고, 황제가 직접 형을 선고했다. 사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뜻대로 억류된 운명이었다. 그는 시민권을 박탈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하지도 않았고, 시를 쓰거나 가족과 친구에게 연락하는 것도 금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쓴 책은 공공도서관에서 사라졌고, 그가 추방된 뒤 처음 몇 년 동안 토미스에서 보낸 시들 가운데 아내와 아우구스투스에게 보낸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에도 수취인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오비디우스와 알고 지내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아우구스투스가 죽을 때까지, 그의 시는 은밀히 유포되었던 게 분명하다. 지금도 이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수수께끼는 아우구스투스가 공공연한 논평을 억누르는 데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준다.

8년말에 오비디우스는 토미스로 떠나, 이듬해 봄에 도착했다.

이곳(지금의 루마니아 콘스탄차)은 로마 제국의 변경에 위치한 반쯤 그리스화된 항구로서, 주위의 이방 부족들로부터 주기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곳에는 읽을 책도 교양있는 상류층도 없었고, 라틴어는 거의 쓰이지 않았으며, 날씨는 혹독했다. 이따금 외적의 침략으로 위험이 눈앞에 닥치면, 오비디우스는 건장한 시민들과 함께 방어에 참여하기도 했다. 아내는 그의 재산을 지키고 영향력있는 친구들을 통해 중재역할을 하느라 로마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오비디우스는 혼자였다.

그는 두 번 다시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 고독과 우울 속에서 오비디우스는 다시금 시로 돌아가, 이제 좀더 개인적이고 내향적인 시를 쓰기 시작했다. 〈슬픔〉·〈흑해에서 보낸 편지 Epistulae ex Ponto〉는 모두 다양한 형태로 자비를 호소하고 있다. 이 글들은 모두, 심지어는 아내한테 보낸 편지까지도 황제와 나아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한 '공개'시이다.

이 작품들은 비록 정신적 자서전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추방당한 시인의 생활에 대한 훌륭한 보고서로서, 지금껏 작가가 쓴 어떤 작품 못지않게 그 자신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려 준다. 〈슬픔〉의 제2권을 이루는 변명은 특히 흥미로운 것으로, 독자를 당혹하게 만드는 이 작품은 그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해가 되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이 시를 포함하여 유배지에서 쓴 다른 시에서도 황제에게 비굴하게 아첨하고 자신을 비하했지만, 그의 개인적 자존심과 결부되어 있는 입장(시인이라는 지위)에서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황제라 하여도 시에 대해서만은 어떤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되풀이하여 암시하거나, 심지어는 노골적으로 말하기까지 했다. 오비디우스가 역경 속에서 보인 행동을 두고 비굴하다고 여기는 비평들은 작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그의 시적 재능이 심각하게 손상되지 않았다는 증거는 그의 시 〈이비스 Ibis〉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토미스에 도착한 직후에 공들여 쓴 이 장시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적에 대한 저주인데, 책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썼지만 신화에 대한 깊은 지식을 보여 주는 걸작이다. 그러나 고국에서는 그에게 용기를 줄 만한 어떤 반응도 없었기 때문에, 오비디우스는 훗날 자신에게 성공을 안겨준 것과 같은 종류의 시를 계속 쓸 의욕을 잃어버렸고, 그후에 쓴 〈흑해에서 보낸 편지〉는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생활이 줄곧 우울하지는 않았다. 토미스에 정착하여 이제 그곳이 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그는 토미스와 그곳 주민들에게서 좋은 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현지의 역사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심지어는 현지 언어인 게트어로 시를 쓰기까지 했다. 그는 토미스 주민들이 그에게 바친 경의에 진심으로 감동했던 것 같다. 그리고 죽음이 다가왔을 때, 그는 별 아쉬움 없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