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페르티우스

프로페르티우스

다른 표기 언어 Sextus Propert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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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BC 55~43 사이, 이탈리아 움브리아 아시시
사망 BC 16 이후, 로마
국적 로마

요약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비가 시인.

BC 29년에 발표된 4편의 비가 가운데 첫번째 작품은 여주인공(프로페르티우스의 애인으로, 진짜 이름은 호스티아)의 이름을 따서 〈킨티아 Cynthia〉라고 부른다.

이 비가 덕분에 그는 마이케나스를 중심으로 하는 문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프로페르티우스의 생애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어머니에게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나중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이 끝난 뒤 제대 군인들을 재정착시킬 필요가 생기자, 그의 가족 영지를 일부 몰수했다(BC 40경). 프로페르티우스의 수입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움브리아를 떠나 로마로 갔다. 그는 시인들(오비디우스와 바수스 포함)을 친구로 사귀었고, 정치나 법률이나 군대 생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첫번째 연애 상대는 연상의 여인인 리킨나였지만, 이 연애는 그후 그의 시에 나오는 유명한 '킨티아'에게 그가 느낀 진지한 애정에 비하면 일시적인 기분에 불과했다.

프로페르티우스가 쓴 4편의 비가(일부 편집자들은 2번째 작품을 다시 2편으로 나누기도 함) 가운데 첫번째 비가는 그가 이 시의 여주인공 '킨티아'를 처음 만난 해인 BC 29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는 〈킨티아〉라는 제목으로 알려졌지만, 그후 오랫동안 나머지 3편의 비가와 따로 분리되어 팔렸기 때문에 〈모노비블로스 Monobiblos〉라고 부르기도 했다. 4편의 비가를 모두 수록한 완본도 나와 있었다. 영향력있는 문학 후원자인 마이케나스가 프로페르티우스를 집으로 초대한 것을 보면 〈킨티아〉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던 모양이다. 마이케나스의 집에서 그가 마이케나스 문단을 이루고 있는 주요 인물들을 만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인물들 가운데에는 베르길리우스(프로페르티우스는 그를 존경했음)와 호라티우스(프로페르티우스는 호라티우스를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음) 같은 시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영향은 그의 작품에 뚜렷이 드러나 있으며, 특히 비가 제3편은 호라티우스의 영향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2세기 작가인 아풀레이우스의 말에 따르면, 킨티아의 진짜 이름은 호스티아였다. 킨티아는 고급 창녀였다는 설도 있지만, 비가 제1편 16절은 킨티아가 귀족 집안 출신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프로페르티우스는 킨티아의 다른 애인들만 언급했을 뿐 남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 여자는 유부녀였을 가능성이 크다.

시에서 킨티아는 아름답고 열정적이며 거리낌없는 여자로 나타난다. 킨티아는 프로페르티우스가 다른 여자와 만나는 것을 격렬하게 질투했으며, 화를 내면 무섭고, 상냥할 때는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여자로 묘사되어 있다. 프로페르티우스는 애인이 아닌 다른 여자한테서 쾌락을 추구하고 있을 때도 여전히 킨티아를 깊이 사모했고,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은 뒤에는 항상 후회하는 마음으로 킨티아에게 돌아갔으며, 킨티아가 그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할 때면 행복을 느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러 번 격렬한 소동이 벌어진 뒤, BC 24년에 프로페르티우스는 마침내 이 격정적인 연애를 끝내고 킨티아와 헤어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개인적 시는 사실과 상상을 뒤섞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의 내적 증거에서 추론한 이 연대가 확실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나중에 그는 킨티아와 사귄 시간을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시절로 회상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자세가 아니라 그의 진정한 느낌이었을지 모르지만, 킨티아가 죽은 뒤(킨티아는 프로페르티우스와 헤어진 뒤 오래 살지 못했던 것 같음) 그는 킨티아와 냉정하게 헤어진 것을 후회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비가(제4편 7절)에서 그는 킨티아의 유령을 불러내어 연애의 모든 매력과 비루함을 재현한다. 그는 킨티아의 성격이 가진 불쾌한 측면을 가볍게 다루려고 애쓰지도 않았지만, 킨티아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킨티아를 사랑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프로페르티우스의 시적 재능은 경륜과 함께 원숙해졌다.

제2편의 시는 규모로 볼 때 제1편보다 훨씬 야심적이며 화려한 기법을 보여준다.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그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제3·4편에서 시인은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마르켈루스의 때이른 죽음을 애도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며느리인 코르넬리아를 찬양하는 웅장한 조가(제4편 11절, 〈비가의 여왕〉이라고도 함)를 지었기 때문이다. 시적 재능이 무르익음에 따라 프로페르티우스의 지위와 영향력도 높아졌다. 초기의 비가에서는 사랑이 중심 주제일 뿐 아니라 그의 종교이자 철학이기도 했다.

제2편의 중심 주제도 역시 사랑이지만, 그는 이제 제1편의 대중적 성공에 약간 당황한 것 같다. 그는 끊임없이 사랑에 빠져 있고 사랑 이외에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글을 쓰지 못하는 재능있는 건달로 여겨지지 않기를 갈망한다. 제2편에서 그는 서사시를 쓰기로 마음먹고, 죽음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며, 당시의 천박한 물질주의를 비난한다(유베날리스 같은 후세의 풍자 작가와 비슷한 방식). 그는 여전히 잔치에 가기를 좋아하고,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와 신전, 극장, 지붕을 씌운 현관, 악명높은 구역이 있는 대도시에서 편안한 기분을 느낀다.

어떤 점에서 보면 그는 로마 제국주의와 아우구스투스의 통치에 전반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보수적인 속물이다. 그러나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알고, 예술 작품에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사치스러운 허례허식을 비난하지만, 당시의 유행을 정당하게 평가한다.

그의 동시대인들 가운데 일부는 그가 게으른 생활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사회에 어떤 기여도 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프로페르티우스는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생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예술가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고, 시와 예술은 단순히 시간을 멋지게 보내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비가 제3편 3절에서 그는 예술 창조과정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창조적 예술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제3·4편에서 프로페르티우스는 탄핵문과 찬가를 비롯한 다양한 문학형식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한다.

그의 시들 가운데에는 칼리마코스필레타스 같은 알렉산드리아 시인들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 많다. 프로페르티우스는 이들의 영향을 솔직히 인정하고, 장식적인 알렉산드리아풍으로 이탈리아의 주제를 다루는 '로마의 칼리마코스'임을 자처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아마 로마 신화와 로마 역사의 여러 측면을 다루고 있는 제4편의 비가들에 가장 잘 나타나 있을 것이다. 오비디우스는 이 일련의 비가에서 영감을 얻어 〈파스티 Fasti〉를 썼는데, 이는 로마에서 1년 동안 열리는 종교 행사를 노래한 작품이다. 제4편의 비가들은 비가와 서사시를 절충한 형식을 갖고 있다. 제4편에는 또한 기괴하고 사실주의적인 시 몇 편과 독특한 조가 2편, 시적 편지 1편도 실려 있다.

프로페르티우스가 오늘날에도 갖고 있는 2가지 장점은 고대인들에게도 감명을 준 것 같다.

그들은 프로페르티우스의 첫번째 장점을 '블란디티아'(blanditia)라고 불렀는데, 막연하지만 표현력이 풍부한 이 낱말은 부드러운 윤곽, 따뜻한 색깔, 모든 종류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민하고 거의 관능적인 감각, 호소력 깊은 우울한 부드러움 따위를 의미했다. 이것은 그의 서술적인 구절과 감정 묘사에 가장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보다 훨씬 주목할 만한 그의 2번째 재능은 시적 '파쿤디아'(facundia)이다.

이것은 인상적이고 적절한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는 어휘를 광범위할 뿐 아니라, 놀랄 만큼 대담하고 자유롭게 구사했다. 라틴어의 시적 문체가 느닷없이 구어체로 바뀌고, 인상적인 표현을 추구할 때는 언어를 한계점까지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을 줄 때가 많다.

프로페르티우스가 비가 2행연구, 특히 장단단 5보격을 다룬 방식은 특별히 인정할 만하다.

그것은 힘차고 다양하며 생생하다. 2행연구가 허용하는 운율과 중간 휴지 및 생략의 문제에서, 프로페르티우스는 카툴루스보다는 엄격하지만 오비디우스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운율을 다루었다. 그러나 프로페르티우스는 좀더 엄격한 오비디우스의 어법 쪽으로 차츰 기울어졌다. 특히 5보격 마지막에 2음절어를 즐겨 사용한 점이 그렇다. 그의 많은 비가에서는 정교한 대칭구조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때문에 비평가들은 많은 비가를 연(聯)으로 나누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프로페르티우스가 조상들한테서 영향을 받았듯이, 그의 후계자들(특히 오비디우스)은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폼페이의 벽에 새겨진 낙서는 1세기에 그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가를 입증한다. 중세에 그는 사실상 완전히 잊혀졌고, 르네상스 시대 이후 그는 일반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기보다는 전문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20세기에 심리학이 발견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고 있는 근대 독자들에게는 열정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사려 깊은 그의 정신이 나타내는 자기 표출이 특히 흥미롭다.

킨티아와 헤어진 뒤 프로페르티우스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킨티아 다음에 사랑하게 된 여자와 결혼해(이것은 아마 BC 18년에 제정된 율리아 법에 따라 결혼한 남자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임) 아이 1명을 낳은 것 같다.

아시시에 있는 비문과 플리니우스(61/62~113경)의 편지에 적혀 있는 두 구절은 프로페르티우스가 역시 시인인 가이우스 파센누스 파울루스 프로페르티우스라는 자손을 가진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말년에 그는 로마의 고급 주택가인 에스퀼리누스 언덕에서 살았다. 그가 죽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BC 16년에는 아직 살아 있었음이 분명하다. 제4편 비가에는 그해에 일어난 2가지 사건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제4편은 그가 죽은 뒤에 편집되었을 것이다. 프로페르티우스는 흔히 접근하기가 까다로운 시인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는 많은 필사본 가운데 어떤 것이 정확한가를 명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의 작품에 풍부하게 들어 있는 모호한 신화적 인용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인용은 장식을 위해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프로페르티우스가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표현하는 일종의 감정적 속기법이다. 또한 감미로운 그리스어 이름들이 교묘하게 짜여져 화려한 언어무늬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