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케나스

마이케나스

다른 표기 언어 Gaius (Cilnius) Maecenas
요약 테이블
출생 BC 70경
사망 BC 8
국적 로마

요약 로마의 외교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고문이며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같은 시인들을 돌봐준 돈 많은 후원자였다.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 후대에 세네카의 비난을 받았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의 외가와 친가는 아레티움(로마에서 북쪽으로 약 56㎞ 떨어진 아레초)에 있었고, 특히 외가인 킬니 집안은 그곳에서 몇 백 년 동안 위세를 떨쳤다. 타키투스는 한때 그를 킬니우스 마이케나스(에트루리아족은 어머니의 성을 사용했음)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그의 공식적인 이름은 가이우스 마이케나스였다.

그가 상당한 부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상속을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지위와 영향력은 나중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 덕분이었다. 그는 비록 에퀴테스 계급(원로원 계급보다는 약간 낮으나 원래 특권층이며 원칙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계급)에 속했지만 자신의 혈통이나 권력이 어떤 원로원 의원보다 우월하다고 여겨 원로원 의원직을 거절했다.

필리피 전투(처음에는 옥타비아누스 편이었던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를 암살한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를 BC 42년에 무찌른 전투)에 참여한 듯하나 전투원으로 참여한 것 같지는 않다.

2년 뒤에는 고문의 자격으로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공화국 최후의 위대한 장군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화해시키기 위해 폼페이우스의 친척 스크리보니아와 옥타비아누스의 결혼을 성사시켰으나 이들은 곧 이혼했다. 그해 말경 안토니우스와 조약을 맺어 브룬디시움(이탈리아 반도의 동남부에 있는 지금의 브린디시)에서 발발한 위험한 무장충돌을 끝내고 안토니우스를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결혼시키는 등 옥타비아누스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BC 38~37년에는 안토니우스를 설득해 타렌툼(지금의 타란토)으로 오게 했으며 서로마를 완전히 손에 넣으려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여러 척의 군함을 빌려주게 했다. 옥타비아누스가 BC 36년에 폼페이우스와, BC 31년에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하는 동안 그는 로마와 이탈리아의 행정을 맡았다. 비록 직위나 군대통수권은 없었지만 마이케나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동로마에서 돌아올 때 그를 죽이려던 음모를 비밀리에 재빨리 분쇄했다. 당시는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였지만 그는 이 사건을 빼고는 유혈사건에 끼어들지 않았으며, 온화하고 인간미있는 성격 때문에 뭇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옥타비아누스가 계속 로마를 비우고 있는 동안 옥타비아누스의 최고부관인 아그리파와 함께 비공식적인 황제대리일을 맡았다.

옥타비아누스의 옥새를 사용하고 그의 공문서를 마음대로 고칠 수도 있었으며,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BC 27년 원수정치(元首政治)를 정착시킨 뒤부터는 국내외 문제에 계속 깊이 관여했다. 그는 고문관들 가운데 가장 신임을 받았으며 아그리파측 파당(派黨)과 맞서는 파벌을 이끌었다. 또한 왕조를 이루겠다는 아우구스투스의 염원에 뜻을 같이해 황제의 조카 마르켈루스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힘썼다.

이무렵에 테렌티아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아름다운 반면 변덕스러운 성미였다. 그녀의 양오빠인 바로 무레나는 황제와 다툰 뒤 직위를 빼앗겨 황제 암살계획을 세웠는데, 마이케나스는 이 음모가 이미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테렌티아에게 누설해 그녀의 오빠가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나 결국 무레나는 처형당했다.

마이케나스는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누설행위를 용서받기는 했지만 그뒤 황제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BC 23년 황제에게 위기가 닥친 후로는 아그리파가 공동섭정자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사위이며 후계자감으로 떠올랐다. BC 17년경까지만 해도 그는 아그리파 가문이 보잘것없다고 빈정댈 만큼 당당했지만 병이 든 후로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다. 그의 가정생활은 불행했는데 테렌티아는 그에게 싫증을 느꼈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정부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은 그는 에스퀼리누스 언덕(로마 동쪽 고원)에 있는 자신의 저택과 정원을 포함한 전재산을 황제에게 넘겨주었으며, 황제와의 우정을 한 번도 깨뜨린 적이 없었다.

그는 고대 작가들에게 공적 생활에서는 정력적이고 유능한 인물로 비친 반면, 궁정 신하로서는 사치스러웠다는 대조적인 인상을 남겼다. 너그러운 문학후원자로서 훗날 그의 이름은 예술후원자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원은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그는 당대 시인들의 천재성을 이용해 아우구스투스의 새로운 제국정권을 찬미하려고 했던 것이다. 베르길리우스호라티우스가 공공이익이라는 주제를 작품에서 다룬 것은 그 때문인 것 같으나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는 별로 그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후원한 문인들과의 관계가 어떠했던가는 추측에 그칠 뿐이지만 호라티우스와는 절친했던 것이 분명하다. 베르길리우스의 〈농경시 Georgics〉, 호라티우스의 〈송가집 Odes〉 첫 3권과 〈서간시 Epistules〉 제1권 같은 영원한 명작들은 그와 관련이 있는데, 이러한 영예는 다른 어떤 문학 후원자도 누릴 수 없는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그 자신이 쓴 산문과 시는 단편만이 남아 있다. 산문은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문체가 미숙하다는 이유로 아우구스투스·세네카·퀸틸리아누스의 비웃음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