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단테

다른 표기 언어 Alighieri D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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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265, 이탈리아 피렌체
사망 1321, 이탈리아 라벤나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 서유럽 문학의 거장. 인간의 속세와 운명을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그려낸 <신곡>으로 널리 알려졌다. 작품은 지옥·연옥·천국을 여행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작품 속에서 당대 사회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또한 시어로 이탈리아어를 선택해 문학발달과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단테는 시 외에도 수사론·도덕·철학·정치사상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저술들을 집필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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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기생애
  2. 지적 발전과 공적 경력
  3. 망명시절
  4. 신곡
  5. 단테에 대한 평가와 영향
단테
단테

후에 <신곡(La divina commedia)>으로 제목이 바뀐 기념비적인 서사시 <희극(La commedia)>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위대한 중세문학작품은 인간의 속세 및 영원한 운명을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시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아주 포괄적인 차원에서 보면 지옥·연옥·천국을 여행하는 형식을 취한 우화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난 시인의 박학다식함, 당대 사회문제의 예리하고 포괄적인 분석, 언어와 시상의 창의성 등은 놀라울 정도이다.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를 시어로 선택함으로써 단테는 문학발달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상어). 그는 조국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시가 문화에 표현능력을 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가 수 백년 동안 서유럽에서 문학어로 쓰이게 되는 데 기여했다. 시 이외에도 중요한 이론적 저술들을 썼는데 그 범위는 수사론에서부터 도덕·철학 및 정치사상에까지 이른다.

고전전통에 매우 정통한 사람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보에시우스의 작품들을 인용했으나 비전문가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당대 최신의 스콜라철학과 신학을 매우 능숙하게 활용했다. 박학다식함과 당대의 뜨거운 정치논쟁에 개인적으로 연루된 사건들로 인해 중세정치철학의 주요 논문 가운데 하나인 <제정론(De monarchia)>을 썼다.

초기생애

단테(Alighieri Dante)
단테(Alighieri Dante)

단테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대부분 그 자신의 입을 통해서이다.

1265년 피렌체에서 해가 쌍둥이 성좌를 운행하고 있을 때(5. 21~6. 20) 태어났으며 평생 고향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황제를 지지했다 하여 추방당한 피렌체(귀족)파인 기벨린 당에 대항하여 기병으로 싸운 이야기, 위대한 스승 브루네토 라티니와 재능있는 친구 구이도 카발칸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또한 처음으로 예술적인 모험을 시작한 시(詩)문화를 비롯하여 시작(詩作)을 하는 과정에서 구이도 구이니첼리의 도움을 받았음을 기술하고 그의 가문은 고조부인 카차구이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카차구이다는 〈천국편〉에 나오는 노래 중편에 등장하며 단테의 성(姓) 알리기에리는 카차구이다의 부인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그의 먼 조상들이 아르노강 둑을 따라 정착했던 로마 병사의 후예들이라는 사실에서 긍지를 느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단테는 더 가까운 가족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신곡〉에는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언급도, 형제나 누이에 대한 언급도 없다. 〈신생 La vita nuova〉에 누이 1명이 언급되어 있는 듯하며, 아버지가 단테와 친구 포레셰 도나티 사이에서 농담조로 주고받는 무례한 소네트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단테는 1265년에 태어났으며 그의 가족이 지지한 구엘프당이 1266년에야 망명에서 돌아왔다는 사실로 볼 때 단테의 아버지는 꼭 망명해야 할 이유가 있을 만큼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단테가 14세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이름은 벨라였지만 가족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가 죽은 뒤, 아버지는 라파 디 키아리시모 치아투피와 재혼하여 아들 프란체스코와 딸 가에타나를 두었다. 단테의 아버지는 1283년 이전에 죽은 듯하며 당시 성년에 들어선 단테는 고아로서 아버지 소유의 재산을 팔 수 있었다. 아버지 알리기에리는 자식들에게 피렌체와 시골에 있는 소유지를 물려주어 대단하지는 않지만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재산을 남겼다. 이 무렵 단테는 이미 1277년부터 약혼한 사이였던 젬마 도나티와 결혼했다.

단테의 인생은 황제파인 기벨린 당과 교황파인 구엘프당 사이에 벌어진 오랜 대립의 역사에 의해 결정되었다(구엘프와 기벨린). 13세기 중반 이후 그들의 대립관계는 잔인하고 치명적이었다.

두 파는 번갈아가며 우선권을 획득했는데 그때마다 상대에게 무서운 형벌을 가했고 유형을 내렸다. 1260년에는 얼마동안 지배권을 쥐고 있던 구엘프당이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패했으나(〈지옥편〉 10곡, 32곡), 1266년에는 교황과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아 베네벤토에서 기벨린당을 물리치고 그들을 영원히 피렌체에서 쫓아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단테는 전후(戰後)의 긍지와 영토 확장주의의 분위기로 가득찬 도시에서 토스카나 전역에 정치적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열망을 품고 성장할 수 있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로마와 고대 도시국가의 문명과 비교했다.

피렌체는 정치력을 신장했을 뿐만 아니라 지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피렌체의 지적 우월권을 확보하는 데 지도적인 인물은 망명에서 돌아온 브루네토 라티니였다. 〈지옥편〉에 묘사된 단테와 위대한 스승의 만남은 단순히 한 학생과 선생의 만남이라기보다는 한 세대 전체가 그들의 지성적 사부와 만난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라티니는 젊은 세대 가운데 구이도 카발칸티, 포레세 도나티, 단테를 포함한 우수한 인재들에게 새로운 민중 의식을 일깨워주었고, 그들의 지식과 작가로서의 역량을 조국 피렌체를 위해 쓰라고 격려했다.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존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단테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심지어 〈천국편〉(8곡, 117)에서 단테는 사람이 도시국가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사정은 인간에게 훨씬 더 나빴으리라는 생각은 어떤 논쟁의 여지도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당대의 역사가 조반니 빌라니는 라티니를 "피렌체인들을 순화시키고 그들에게 좋은 화술(話術)을 가르치고 우리 공화국을 정치 철학, 즉 정치론(la politica)에 따라 지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선도자이자 스승"이라고 불렀다.

라티니의 가장 중요한 저서 〈보전(寶典) Les Livres du Trésor〉(1262~66)은 라티니가 망명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냈기에 프랑스어로 씌어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전 인용문의 보고였으며, 그책에 담긴 교양은 바로 단테의 교양이었다. 이 저서 제2권의 첫 부분에는 일찍이 라틴어가 아닌 근대 유럽 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Ethics〉의 일부가 실려 있다. 라티니는 철학·윤리학·정치학 분야의 거의 모든 논제나 주제를 다루는 데 키케로와 세네카의 작품을 자유롭게 인용하였고, 통치 문제를 다룰 때는 자주 〈구약성서〉의〈잠언〉을 인용했는데, 이는 단테도 마찬가지였다.

라티니의 저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성서,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의 글들이 초년의 단테에게 문화적 지주가 되었다. 특히 로마는 가장 고무적인 동화(同化)의 원천을 제공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키케로가 숭배되기 시작했고, 키케로는 시민으로서의 지식인의 존재를 역설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인의 좋은 본보기가 되는 인물로 인식되었다. 단테의 교양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된 라티니의 유산에서 또 하나의 로마적 요소는 영광에 대한 사랑, 즉 전력을 다해 남보다 뛰어나려는 노력을 하면서 명성을 추구하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라티니는 〈지옥편〉(15곡)에서 인간이 불멸의 존재가 되는 방법을 단테에게 가르쳐주는 인물로 찬미된다. 작별을 고하며 라티니는 그의 저서 〈보전〉을 읽으라고 권하는데, 그는 자신이 그 책을 통해 계속 기억되리라 믿는다.

단테에게는 뛰어난 지적·미적 자신감이 있었다. 〈신생〉(3장)에서 자신이 말했듯이 그는 18세가 되었을 때 이미 혼자 시작(詩作) 기술을 터득한 상태였고, 〈신생〉의 첫 시가 된 초기 소네트 1편을 당대의 가장 유명한 시인들에게 보냈다. 그가 받은 여러 답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카발칸티에게서 온 것이며, 그로 인해 두 사람의 위대한 우정관계가 시작되었다.

위대한 정신들의 만남이 모두 그렇듯이 단테와 카발칸티의 관계도 복잡한 것이었다.

〈신생〉의 제3장에서 단테는, 그가 첫번째 책을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쓴 것은 카발칸티의 권유에 따른 일이었다고 말한다. 뒤에 이탈리아어로 쓴 〈향연 Convivio〉과 라틴어로 쓴 〈속어론(俗語論) De vulgari eloquentia〉에서 단테는 라틴어가 아닌 현지 토속어를 변호하는 첫번째의 위대한 르네상스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데,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은 그에게 현지 토속어로만 글을 쓰라고 설득하였던 카발칸티와의 논의에서 점차 무르익은 것이었다.

단테는 그에게 이런 지적인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신생〉을 가장 훌륭한 친구(primo amico)인 카발칸티에게 바쳤다.

그러나 뒤에 단테가 피렌체의 6인 통령(統領)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을 때 카발칸티를 추방하려는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카발칸티는 망명생활 동안 말라리아에 걸려 1300년 8월에 사망했다.

〈지옥편〉(10곡)에서 단테는 그의 위대한 친구에 대한 기념문을 썼는데 이것은 라티니에 대한 추도문과 마찬가지로 비통한 찬사였다.

두 경우 모두 단테는 그들에게 입은 은혜와 그들에 대한 애정을 기록했고, 그들이 지닌 위대한 장점들을 평가했지만 각각의 경우에 마찬가지로 그들과 헤어진 사실들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자신을 위해서 옛 친구와 스승들이 주었던 것과는 다른, 더 강력한 미적·지적·정신적 후원을 찾아야만 했다. 카발칸티의 평가와는 달리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정신적 안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단테가 창조한 베아트리체의 형상은 모든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허구의 여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단테의 사상이 변화하고 경력의 부침(浮沈)을 겪음에 따라 베아트리체 역시 그의 작품에서 크나큰 변화를 겪는다. 〈신생〉에서는 신성한 존재였으나 〈향연〉에 나오는 칸초네에서는 세속적 여인으로 나오며, 〈신곡〉에서 더욱 깊은 이해력을 지니고 등장하여 단테를 '속된 무리'로부터 인도 해준다.

〈신생〉(1293경)은 단테가 생전에 만든 2권의 시집 가운데 첫번째 것이며, 2번째 작품은 〈향연〉이다.

둘다 운문과 산문이 혼합된 작품(prosimetrum)인데, 두 작품에서 산문은 약 10년의 기간을 두고 지은 시들을 서로 연결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사용되었다. 〈신생〉은 1283년 이전부터 대략 1292~93년에 쓴 시들을 모은 것이고 그보다 더 규모가 크고 야심적인 작품 〈향연〉에는 1294년 직전부터 〈신곡〉을 쓸 때까지 쓴 가장 중요한 시들이 실려 있다.

단테가 '작은 책'(libello)이라 부른 〈신생〉은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 책은 42개의 짤막한 장(章)으로 나뉘고 25편의 소네트, 1편의 '발라타', 4편의 칸초네에 관한 주석이 실려 있다. 5번째 칸초네는 베아트리체의 죽음 때문에 극적으로 중단되고 만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시 자체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산문으로 된 주석이 제공해주는데, 그 이유는 일부의 시들이 실제로는 거기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시기에 씌어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매우 단순한 것으로 단테가 9세였을 때 동갑인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난일, 18세가 되었을 때 그녀가 단테에게 건넨 인사, 그녀에 대한 사랑을 감추기 위해 단테가 강구한 여러 방편, 그녀가 더 이상 아는 체하지 않았을 때의 위기감, 그녀가 그를 경시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갖게 된 고뇌, 결국 그 고뇌를 초월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미덕만을 노래하기로 한 결심 등을 다루고 있다.

또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한 젊은 친구의 죽음, 베아트리체 아버지의 죽음, 단테 자신의 예언적인 꿈) 끝에 마침내 베아트리체가 죽고, 슬픔에 잠겨 있는 동안 일시적으로 베아트리체를 대신하여 호감을 주는 젊은 여인 '고귀한 부인'(donna gentile)이 유혹의 손길을 뻗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는 베아트리체에게로 돌아가게 되며 그녀를 영원히 찬양하게 된다는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서 단테는 시간이 좀 흐른 뒤 그녀에 대해서 "일찍이 어떤 여인에 대해서도 쓴 일이 없는" 시를 쓰리라 결심한다.

그러나 이처럼 자서전적인 목적으로 씌어진 듯이 보일지라도 〈신생〉은 기이할 정도로 개인과는 관계가 없다. 이 책의 배경을 살펴보면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세부적인 묘사를 피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그래서 베아트리체가 실제로 누구인가를 따지는 일은 별 의미가 없게 된다.

주석에 사용된 언어는 높은 수준의 보편성을 고수하며, 사람의 이름이 명시된 일도 드물다. 예를 들면, 카발칸티는 단테의 '가장 좋은 친구'로 3번 언급되며, 단테의 누이는 '가장 가까운 혈연으로 연결된 여인'으로 언급된다. 단테는 감정적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를 제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강한 감정적 반응이 보이지 않게 거리를 둔 것처럼 보인다. 단테가 10여 년에 걸쳐 쓴 시들을 배치해 넣은 시집은 좀더 큰 전체 구조라든가 시어(詩語)의 보편성 등을 지방 시인들의 작품수준을 능가해보겠다는, 초기부터 변함없이 견지해온 그의 야심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지적 발전과 공적 경력

단테에 버금가는 당대의 문학가는 구이도 구이니첼리였다.

그는 당시 유행했던 일종의 지방시 즉 '자유시'(自由市)의 시문(詩文)을 변화시키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한 시인으로, 그의 시는 카발칸티와 단테가 바라고 있던 것, 즉 세련되고 명쾌한 미감(美感)에 내포된 비범한 즐거움의 감각을 제공해 주었다. 그의 시가 호소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철학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인 내용 때문이었다. 그의 시는 귀부인을 칭송하고, 그녀가 숭배자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미덕인 '고귀한 감정'(gentilezza)을 찬양하기 위해 씌어졌다.

그가 격찬했던 사랑이라는 개념은 순화되고 고귀한 삶의 의미의 일부였다. 〈신생〉의 시적·정신적 전환점에 기여한 것은 바로 그러한 구이니첼리의 영향이었다. 17~21장에 씌어진 바와 같이 단테는 마음의 변화를 경험했으며 고뇌의 시를 쓰는 대신 그의 연인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로 결심했는데, 특히 〈사랑을 이해하는 귀부인들 Donne ch'avete intelletto d'amore〉이라는 칸초네가 그런 시이다. 이 칸초네 바로 뒤에 〈사랑과 고귀한 마음은 하나라네 Amore e 'l cor gentil sono unacosa〉라는 소네트가 이어지는데, 이 소네트의 첫 행은 구이니첼리의 "모든 고귀한 마음 속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네"(Al cor gentil ripara sempre amore)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

이로써 단테는 '돌체스틸누오보'(dolce stil nuovo) 또는 청신체(淸新體)라는 새로운 시 양식을 쓰기 시작했는데, 좀더 지방적인 시의 협소한 한계를 넘어서는 단순한 수단으로서 이 양식의 중요성을 그는 〈연옥편〉(24장)에서 극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철학적 시에 대한 관심으로 단테의 인생이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 사실은 〈향연〉에 잘 나타나 있다.

베아트리체가 죽은 뒤 마음의 위안을 찾으려했던 단테는 철학, 특히 보에티우스와 키케로의 작품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잠시 슬픔을 잊기 위해 시작한 일이 평생의 본업이 되었고 그의 인생 경로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말았다. 〈신생〉에 등장하는 우아한 여성이 철학이라는 이름의 귀부인으로 바뀌어 곧 단테의 생각을 전부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철학에 관한 토론을 듣기 위하여 피렌체의 종교 학교들을 다니기 시작하였고, 30개월도 채 되기 전에 "그녀(철학)에 대한 사랑이 다른 모든 생각을 쫓아버렸다"고 말한다.

〈지성을 통해 3차원의 영역을 움직이는 그대 Voi che 'ntendendo il terzo ciel movete〉라는 시에서 그는 베아트리체 및 〈신생〉과 연관된 청신체, 즉 감미로운 옛 문체를 버리고 철학과 관련된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새 문체로 전환하게 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이 기간의 연구가 일련의 칸초네로 표현되었고 이 칸초네들은 결국 〈향연〉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시적 토대가 되었다.

또 하나의 큰 변화는 도시자치정부 코뮌의 정치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이었다.

1295년 의약(醫藥)조합(철학자들도 가입할 수 있었음)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공직에 관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그가 공직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시(市)정치사상 아주 위험한 때였다. 구엘프당과 기벨린당의 시대에 시민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던 것처럼 1290년대의 피렌체는 다시 한번 둘로 양분된 도시가 되었다. 당시 피렌체의 집권당이던 구엘프파가 코르소도나티가 이끄는 '흑당'(黑黨)과 단테가 속한 '백당'(白黨)으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백당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 후 흑당을 추방했다.

1295년 이후 단테의 활동에 관해서는 많은 정보가 남아 있다. 1300년 5월 그는 주요한 외교사절로서 이웃 도시인 산지미냐노에 파견되었는데, 이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전쟁준비를 갖추고 왕위에 오르려는 야심에 대항하여 토스카나 도시국가들로 구성된 구엘프당 동맹의 결속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였다.

1300년 행정장관으로 선출되었을 때 단테는 이미 교황(보니파시오 8세)의 정책에 저항하기로 결정한 코뮌정치가들의 대변인으로 인정받았던 것 같다. 이리하여 교황권의 범위에 대한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프당은 1266년 피렌체에서 프랑스 군대와 교황 군대의 동맹에 의해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렇지만 1300년까지 단테는 교황의 야심적인 영토확장정책을 반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또 한번의 더 큰 지적 세계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온건파 구엘프당원이었던 단테는 교황이 정치에 관여하면 나쁜 결과가 온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고, 이 경험을 통해 결국 제정(帝政)의 정치적 권위가 교황에게서 유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가장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입장은 〈향연〉을 필두로 나중에 논쟁적인 저작 〈제정론〉과 〈신곡〉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더욱이 여러 사건들이 발생하여 단테는 계속 교황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 프랑스(필리프 4세의 동생인 발루아가(家)의 샤를 왕이 보니파시오와 제휴했음), 추방된 구엘프 흑당이 새로 동맹을 맺었는데, 발루아의 샤를 왕이 피렌체 입성허가를 원했을 때, 도시 자체는 정치적인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에 빠져버렸다. 교황의 본의가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사절단이 로마로 파견되어 교황과 이 문제를 놓고 토론하게 되었는데, 단테가 그 사절단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당혹스럽게 생각해 "내가 가면 누가 남고, 내가 남으면 누가 가는가?"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결국 단테는 책략에 넘어갔다. 교황은 다른 두 사절은 떠나 보내고 단테는 붙잡아 두었다. 1301년 11월초 발루아의 샤를 군대는 피렌체 주둔을 허락받았다. 바로 그날 밤 추방당했던 흑당이 은밀하게 다시 피렌체로 들어와 6일 동안 도시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단테는 처음 로마에서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시에나에 와서야 이 사건에 대한 전말을 알게 되었다. 1302년 1월 새 피렌체 정부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단테가 이에 응하지 않자 3명의 전(前)통령까지 포함하여, 범하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기소당했다. 다시 출두명령을 받고도 출두하지 않자 1302년 3월 10일 단테는 다른 14명의 백당 당원과 함께 화형선고를 받았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위기를 겪게 되었다. 〈신곡〉에서 이러한 불화의 이야기가 강렬하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사실상 그가 이 사건을 길고 긴 예언이 지적하는 주된 극적 장면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곡〉은 그 자신의 개인적 재난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길을 보이려는 목적에서 쓴 작품이기도 하기에 이 시는 진정한 〈신곡〉이 될 수 있었다.

망명시절

단테의 초기 망명생활에 관한 정보는 아주 부족하지만 대략적인 윤곽을 그릴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알려져 있다.

처음 단테는 추방된 구엘프 백당에 들어가 군사적 탈환을 모색하려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듯하다. 그러나 이 노력은 아무 결실을 맺지 못하였음이 드러났다. 분명 단테는 피렌체의 또다른 추방자인 기벨린당원들에게 점차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고, 저술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귀환을 보장받기로 결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 〈향연〉(1304~07경)이다.

단테가 계획한 것은 15권으로 된 저서였는데, 그 가운데 14권에는 여러 다른 칸초네에 관한 주석을 쓰기로 했다.

그는 4권밖에 완성하지 못했으나 다양한 방법으로 완성된 이 주석들은 시의 영역을 넘어 아마추어 철학자가 닥치는 대로 많은 것을 늘어놓은 교훈들의 개요가 되었다. 단테가 〈향연〉에서 의도했던 것은 〈신곡〉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도전적인 도덕적·정치적 쟁점들을 적절한 윤리적·형이상학적인 구조 속에 담아내려는 것이었다.

〈향연〉 제1권은 많은 부분이 감동적이며 체계적으로 속어를 옹호하는 데 씌어졌다.

미완성에 그쳤으나 이 책과 짝을 이루는, 〈속어론 De vulgari eloquentia〉(1304~07경)은 주로 품위있는 시어(詩語)를 바탕으로 하는 시작(詩作) 기술에 관한 소(小)논문이다. 단테는 〈향연〉에서 속어의 사용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제1권의 마지막 문장에서 그 영광된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한다.

"이것이 새로운 빛, 새로운 태양이 되리라. 해묵은 태양이 질 때 떠오르게 될 새로운 태양은, 빛을 비추지 않는 해묵은 태양 때문에 그늘과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어주리라."

단테가 묘사했던 혁명은 바로 당시 지배계층이던 성직자들의 라틴 문화가 황혼기로 접어들고 속된 지방 도시문학의 출현을 의미했다.

단테는 자신이 이 둘 사이에 있으며, 새롭게 참정권을 얻은 민중 독자들을 교육시키는 철학자이자 중개자라고 생각했다. 단테가 공표했던 이탈리아 문학은 곧 주도적인 문학이 되었고 이탈리아어는 유럽의 주도적인 문학어가 되었으며 이러한 위치는 3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향연〉에 엿보이는 단테의 성숙한 정치·철학 체계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 이 저서에서 그는 처음으로 제국의 전통, 특히 로마 제국의 전통을 옹호하는 감동적인 글을 썼다.

단테는 〈향연〉에 영혼이 신에게 귀의하게끔 도와주는 인간 고유의 욕구, 즉 '오르메'(horme)라는 중요한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그 욕구는 본보기와 교리를 통한 적절한 교육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잘못 인도되어 파괴력으로 사회를 분열시키게 된다. 〈향연〉에서 단테는 정치 사상과 인간의 욕망에 대해 자신이 이해하는 바를 결부시켰다. 즉, 교황이 세속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면 그때는 인간의 욕망을 신에게 향하도록 하는 적절한 정신적 본보기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황제의 권한이 약해진다면 그때는 사람의 의지에 물리적 제한을 가할 만한 법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테는 이와 같은 요인이 이탈리아가 빠져들었던 혼돈을 설명해준다고 생각했고, 결국 이런 상황을 치유하려는 바램을 품고 〈신곡〉이라는 서사적 과업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일어나 처음에는 엄청난 희망을 품다가 나중에는 더 큰 실망에 빠져들고 말았다. 1308년 11월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공(公)이 독일 왕으로 뽑혔고, 보니파시오의 뒤를 이은 교황 클레멘스 5세가 1309년 7월 하인리히를 로마의 왕으로 선포하고 그를 로마로 초대했다.

하인리히는 로마의 성(聖)베드로 대성전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을 쓰게 될 예정이었다. 다시 한번 황제의 통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이탈리아를 흥분시켰으며 단테도 황제 지지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황제의 출현으로 평화가 회복되면서도 황제가 정신적으로는 종교적 권위에 예속할 것을 선언케 되리라는,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이상이 곧 실현되리라고 생각했다. 1310년 이탈리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리히 7세의 매력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 시간을 북방에서 허비한 나머지 적들에게 세력을 규합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단테가 주시했던 대로 이 성스러운 운명의 순간에 반대하는 데 가장 앞장선 인물은 피렌체 시정부였다.

이 시기에 단테가 쓴 중요한 정치적 서간체 작품들은 그가 전(全)이탈리아에서 큰 존경을 받고 개인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서간체 작품에서 그는 하인리히를 찬양하며 부지런히 일을 처리하라고 간청했고 피렌체 시정부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후의 행동에서 단테가 보니파키우스의 이중성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클레멘스 자신도 하인리히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행동은 단테가 가장 위대한 논쟁서 가운데 하나인 〈제정론〉(1313경)를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향연〉에서 다루었던 정치적 논쟁을 확장시켰다. 클레멘스의 속임수에 격분한 분위기 속에서 단테는 그가 지닌 논쟁의 힘을 교황이 정치적 통치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 다시 말해 황권의 정치적 권위가 교황으로부터 나온다는 주장을 반대하는 데 쏟았다.

단테는 〈제정론〉의 마지막 문장에서 인간을 위해 신이 마련한 목적지는 2가지라고 서술한다. 하나는 지상낙원의 형태로 나타나는 현세의 행복이고 다른 하나는 천상낙원의 형상으로 구현되는 영생의 행복인데, 이렇게 목적지는 다르지만 이 2가지가 서로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현세의 행복이 어떤 면에서는 영생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므로 로마 정부가 절대 로마 교황직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님을 독자들에게 확신시키며 끝난다.

단테가 지녔던 문제는 그가 비유적인 언어와 역사적 예를 들어 이야기했더라면 더 잘 옮길 수 있었을 미묘한 관계를 이론적 언어로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교황과 황제 사이에 형성된 관계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단테는 교회에 대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가지고 있었던 선의(善意)와 같은 특수한 역사적 사례들을 지적하며 그러한 관계가 가치있는 것임을 시사했다. 하인리히 7세의 임무 실패에 대해 단테가 실망한 이유는 하인리히의 초기 후원자가 외관상 클레멘스 교황으로 보였고 또 그 같은 상황이 두 최고 권력가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재수립하는 데 이상적으로 보였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다.

신곡

신곡(La divina commedia)
신곡(La divina commedia)

단테의 망명시절은 그 자신도 거듭 되풀이하여 말하듯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어렵게 편력하는 시기였다.

이에 대해서는 〈천국편〉(17곡)에서 카차구이다의 "남의 빵이란 얼마나 쓴 것인지 또 남의 층층대를 오르고 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라는 감동적인 비가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그렇지만 단테는 추방기간 동안 시를 씀으로써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는데, 이 위대한 시는 1308년 이전에 쓰기 시작된 듯하며 죽기 바로 전인 1321년에 끝을 맺었다. 아울러 그는 마지막 몇 년간 북부 이탈리아의 많은 귀족 저택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라벤나에서 유명한 프란체스카의 조카 구이도 노벨로 다 폴렌타의 환대는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단테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당시 최고의 문필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구이도 자신이 추도사를 진행한 훌륭한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신곡〉의 구성은 단순하다.

일반적으로 단테 자신으로 추정되는 한 인간이 기적적으로 저승세계로 여행 할 수 있게 되어 지옥·연옥·천국에 사는 영혼들을 찾아가게 된다. 그에게는 안내자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는 베르길리우스이고 또 하나는 '천국'을 소개하는 베아트리체이다. 1300년 부활제인 성(聖)금요일 저녁부터 부활절(일요일)을 약간 넘긴 시간에 일어난 이 허구의 만남을 통하여 단테는 추방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물론 실제로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그는 이미 추방된 몸이었음). 이런 식의 구상을 통해 단테는 망명 중에 겪게 될 이야기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의 재난에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지를 설명하고 이탈리아가 처한 난관의 해결책까지도 제시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유랑은 한 나라의 제반문제를 포괄하는 소(小)우주가 되면서 아울러 인간의 타락상을 나타내게 된다. 단테의 이야기는 이처럼 역사적 특수성과 전형성을 지닌다. 〈신곡〉의 구조를 이루는 기본 구성 요소는 곡(曲 canto)이다. 이 시는 100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크게 〈지옥편〉·〈연옥편〉·〈천국편〉의 3편으로 나뉘어져 기법상 각 부마다 33개의 곡이 있다.

그러나 〈지옥편〉에는 시 전체의 서문 역할을 하는 곡이 하나 더 있다. 대부분의 곡은 136~151행 정도의 길이이며, 시의 운율체계는 3운구법(韻句法:aba bcb cdc 등)이다. 이처럼 이 시기에는 신성한 숫자인 3이라는 숫자가 이 작품의 어디서나 나타난다.

단테의 〈지옥편〉은 위치상으로나 목적상으로 볼 때 그보다 앞선 위대한 고전들과는 다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Odyssey〉(7권)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Aeneid〉(6권)에서는 저승세계의 방문이 이 중간에 나온다.

왜냐하면 이 책의 중간 부분에서 인생의 본질적인 가치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테는 전통을 따르되 실제로는 저승세계를 방문하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하게 함으로써 전통을 변형시켰다. 그 이유는 그의 시의 정신적 유형이 고전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이기 때문이다. 단테의 지옥으로의 여행은 세상을 떠나는 영혼의 행동을 나타내며, 또한 이것은 우연히도 그리스도 자신이 죽은 계절과 일치하고 있다(이런 점에서 단테의 방법은, 찬란하나 결함있는 반역 천사장 루시퍼를 비롯하여 그의 타락한 천사들이 맨 먼저 모습을 나타내는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과 유사함). 〈지옥편〉은 잘못된 출발을 나타내는데, 이곳에서 주인공 단테는 타락한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데 다소 방해가 되었던 해로운 가치들을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지옥편〉의 복귀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단테가 지옥에 떨어진 망자들의 명부를 보는 것이 이 시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중립자들, 지체 높은 이단자들,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필리포 아르젠티, 파리나타 델리 우베르티, 피에로 델레 비녜, 브루네토 라티니, 성직 매매 교황들, 오디세우스, 우골리노 등은 엄청난 힘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지옥의 방문은, 베르길리우스와 후에 베아트리체가 설명하듯이, 진정한 회개를 시작할 수 있기 전에 거쳐야 할 극단적인 방법, 즉 고통스럽지만 꼭 겪어야만 할 일이다. 이것은 〈지옥편〉이 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왜 불완전한지를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독자들은 흔히 34곡에서 마지막으로 사탄과 만나는 장면이 극적 혹은 감정적 힘이 부족하여 실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옥으로의 여행은 주로 이별의 과정을 의미하며 따라서 더욱 완전한 발전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독특한 반(反)클라이맥스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 그런 끝맺음이 불가피한 이유는 사탄의 마지막 등장이 어떤 새로운 것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사탄이 인간 역사에 존재함으로써 생긴 슬픈 결과들은 이미 지옥을 통과하면서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연옥편〉에서는 주인공의 영혼이 갱생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시작된다.

사실상 이 부분의 여행을 이 시가 제시하는 진실한 도덕적 출발점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순례자 단테는 연옥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자신의 개성을 억누른다. 단테가 물리칠 필요가 있는 본보기들과 대면하게 되는 〈지옥편〉과는 대조적으로 〈연옥편〉에서는 본보기로 나타나는 인물이 거의 없다. 회개자들 모두가 인생의 길을 따라 순례하는 순례자들이다. 단테는 소외된 관찰자로서 공포감을 느끼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가담한다. 〈지옥편〉에서 본의 아닌 소외감에 대한 시가(詩歌)로서 거기서 단테가 자신이 예전 주장했던 것이 얼마나 유해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면 〈연옥편〉에서는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적 심상의 생활을 순례행각과 가장 어울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당당한 모습으로 지상의 낙원에 다시 찾아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현세의 기만적인 약속들을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엄격한 제도에도 불구하고 연옥은 영혼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는 곳으로 좀더 넓은 시각으로 즐길수 있다. 〈지옥편〉(7곡)에서는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에 관한 토론이 나오는 한 곡(曲)에서만 철학을 암시하지만, 〈연옥편〉에서는 역사·정치·도덕 분야의 모든 관점들이 개방되어 있다.

더욱이 〈연옥편〉은 시와 예술의 곡(曲)이기도 하다. 단테가 황량한 지옥세계를 지난 뒤에 "여기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시가 되살아나리니"하고 외쳤을 때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진의(眞意)였다. 지옥에 배정된 시인은 하나뿐이며 천국에 마땅한 시인은 둘을 넘지 않지만, 연옥에서는 독자들이 음악가 카셀라와 벨라쿠아, 시인 소르델로를 만나고 2명의 구이도, 즉 구이니첼리와 카발칸티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화가 치마부에와 조토를 비롯하여 여러 세밀화가들의 이야기도 듣게 된다. 연옥의 상단부분에서 독자들은 단테가 그의 고전적 전통을 재건하는 모습을 보게 되며, 다음으로 그가 포레세 도나티를 만났을 때 고전적 전통보다 더 고양된, 조국의 위대한 전통에 훨씬 가까이 가게 된다.

보나준타 다 루카와 만나면서 '청신체'의 진정한 원천에 관한 설명을 듣고, 구이도 구이니첼리를 만나서는 기교라든가 시적 제어력 등의 부분에서 그가 당시 세력을 떨치던 지방 시인 구이토네 다레초를 어떻게 능가했는지를 듣는다. 이 곡(曲)들은 〈지옥편〉(4곡)에 나타난 생각, 즉 단테가 지체높은 이단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서사시에 관한 계획을 알려주며 자기의 위치가 고전작가들과 나란히 "6번째"에 속함을 다시 알리는 내용이다.

〈연옥편〉에서 단테는 그 전통을 확장하여 스타티우스(그의 〈테바이드 Thebaid〉는 사실 지옥 밑바닥에 있는 더 음산한 현상들을 제공함)까지 포함시키지만 또한 그의 더 근대적인 전통이 구이니첼리에게서 시작된 것임을 보여준다. 구이니첼리와 만난 다음 단테는 바로 지상 낙원에서 오래도록 기다린 베아트리체와 재회하게 된다.

이와 같이 단테는 고전에서 그의 도덕적·정치적 이해뿐만 아니라 서사시의 개념, 즉 당대의 가장 중요한 쟁점들을 충분히 포함할 만큼 큰 범위를 지닌 이야기라는 개념을 끌어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그리스도교적 소재를 이루고 있는 사랑의 철학을 배운 것은 바로 조국의 전통에서였다.

이것은 물론 단테의 안내자인 베르길리우스가 다른 안내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극(劇)이 존재하지 않는 노래 속에서 베르길리우스를 거부함으로써 유일한 극적 사건이 이루어진다.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를 안내자로 등장시킨 것은 문학사상 가장 풍부한 문화적 전유(專有) 가운데 하나였다. 우선 단테의 시에서 베르길리우스는 고전적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또한 그는 역사적 인물로서 〈지옥편〉(1곡)에서 이렇게 소개된다. "사람은 아니나 옛날엔 사람이었다.

나의 어버이는 둘다 만토바 출생의 롬바르디아 사람들이었고 나는 뒤늦게나마 율리오 치하에서 태어나 그릇되고 거짓투성이인 제신들의 로마에서 살았다." 더욱이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고향(당대의 이탈리아 지역)과 연관이 있으며 그의 배경은 전부 로마제국이다(베르길리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대에 태어나 아우구스티누스 대제를 찬양했음). 그는 시인으로 나타나며 그의 위대한 서사시의 주제는 단테의 시의 주제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나는 시인이었고 자랑스런 일리온이 타버린 뒤 트로이에서 온 안키세스의 정의로운 아들에 대해 노래했었다." 단테 역시 부당하게 쫓겨난 피렌체의 정의로운 아들을 노래했는데, 아이네아스가 더 나은 도시를 찾아야 했듯이 그의 경우는 천상의 도시를 찾아야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주의깊게 연구한 시인이며 그로부터 얻어낸 시적 양식은 그 아름다움으로 단테에게 많은 영예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단테는 수년간 베르길리우스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베르길리우스의 정신이 되돌아왔을 때는 오랫동안 침묵한 나머지 미약해보였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한 사람의 명문가를 넘어선 로마 제국의 시인이자 단테에게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며 현자(saggio), 혹은 도덕적 스승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긴 하나 신의 은총을 받은 특사로서, 그가 돌아온 것은 일찍이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믿음과 연결된 더 소박했던 신앙들이 소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물론 베르길리우스 혼자로는 충분치 못했다. 그러나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를 거부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는 슬프게도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즉 그의 의식 어디에서도 역사의 지배 과정으로부터 개인적인 자유를 얻으려는 생각이 보이지 않음을 발견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에게 추방객으로서 생존하기 위한 도덕적 교훈을 베풀어주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 자신의 시의 주제이자 단테의 시의 주제였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역사의 과정에 대한 믿음을 고수했으며 로마제국에서 정점을 이루었던 역사의 과정은 그에게 깊은 위안이 되었다. 반면 단테는 역사를 초월하는 인물로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역사가 그에게는 악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천국편〉에서는 진정한 영웅적 실현이 이루어진다. 단테의 시는 죽음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과거의 인물들을 묘사한다. 그들의 역사적 영향은 계속되어 그들의 모든 행위는 추종자들에게 경이감과 동화(同化)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고조부 카차구이다, 성 프란키스쿠스, 성 도미니쿠스, 성 베르나르두스 같은 인물들을 만나면서 단테는 자신을 승화시키게 된다.

따라서 〈천국편〉은 실현과 완성의 시이다. 그것은 앞의 2편에 이미 묘사되었던 것을 실현하고 있으며, 미학적으로는 기대와 회고로 이루어진 정교한 시체계를 완성하고 있다.

단테에 대한 평가와 영향

단테의 〈신곡〉은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과 영예를 얻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400년까지 이 작품이 지닌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12개 이상의 주석이 나왔다. 조반니 보카치오는 이 시인의 일생에 대해 글을 쓴 뒤 1373~74년에 〈신곡〉에 관해 처음으로 공개강연을 했다(이것은 단테가 고대고전들과 함께 대학교과과정에서 채택된 첫번째 근대작가였음을 뜻함). 단테는 '시성'(詩聖 divino poeta)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1555년 베네치아에서 그의 위대한 시의 제목에 '성스러운'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인 훌륭한 책이 출판됨으로써 그의 시는 단순한 〈희극〉이 아닌 〈신곡〉이 되었다.

서사시가 호소력을 잃고 다른 예술 형식(주로 소설과 드라마)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을 때도 단테의 명성은 계속되었다.

사실 그의 위대한 시에서 독자들은 고전작품 특유의 힘을 즐길 수 있다. 후세대도 자신의 지적인 관심사가 단테의 시에 반영되어 있음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시대에 이어 19세기에도 독자들은 〈지옥편〉에 등장하는, 힘세고 연민을 느끼게 하는 불운한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20세기초의 독자들도 이 시가, 그 구조와 논지와는 무관하며 때로는 그것들과 대조를 이루기조차 하는 미학적인 언어표현력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후대의 독자들은 이 시가 강한 건축물처럼 각각의 여러 부분들이 반영되고 조화되기도 하면서 잘 통합되어, 아주 복합적인 음향을 지닌 걸작임을 증명하는 데 열중했다. 단테는 생생한 묘사를 통해 뛰어난 전형들의 작품목록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예시(豫示)와 대응면에서 위대한 문장가적 재능을 갖춘 시를 창조했다. 더욱이 그는 중요한 정치적·철학적·신학적 주제들을 모두 조화시켜 작품을 쓰는 한편 도덕적 지혜와 고양된 윤리적 안목을 보여주기도 했다.

단테의 〈신곡〉은 650여 년 동안 인기를 누려온 시이다. 놀랍고도 상상력이 풍부한 착상이 주는 소박한 힘으로 끊임없이 여러 세대에 걸친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작품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구세계의 모든 고등교육에서 주요 교과목으로 쓰였으며 계속하여 현대에 와서도 중요한 시인들에게 지침이 되었고 자양분을 제공해주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단테를 "그리스도교적인 최고의 상상력"이라 불렀으며 T.S. 엘리엇은 "근대세계는 셰익스피어와 단테가 나눠 가졌다. 제3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근대에서 단테에 필적할 만한 사람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밖에 없다고 하여 그를 발군의 작가로 높이 평가했다. 사실상 근대사상과 관련을 맺으며 세계에 등장시킨 전형들을 창조하는 데 두 사람은 쌍벽을 이룬다. 단테는 셰익스피어처럼 역사적인 인물들로부터 보편적 전형을 창조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신화의 보고를 더욱 풍부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