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 5세

클레멘스 5세

다른 표기 언어 Clemens V
요약 테이블
출생 1260경, 프랑스 보르들레 지역
사망 1314. 4. 20, 프로방스 로크모르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교황(1305~14 재위).
(영). Clement Ⅴ. 본명은 Bertrand de Got.

아비뇽을 교황의 주재지로 선택함으로써 최초의 아비뇽 교황이 되었다.

그후 아비뇽은 1377년까지 교황청 소재지가 되었다.

1295년 3월부터 코맹주의 주교로 있다가 1299년 보르도의 대주교가 되었다. 1305년 프랑스의 필리프 4세의 책략으로 페루자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을 많이 임명함으로써 프랑스 출신 교황이 계속 나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클레멘스는 교황 재위중 필리프 때문에 괴로운 일을 많이 겪었다.

필리프는 교회가 세속적인 일에 간섭하지 못하게 했으며, 클레멘스를 강요하여 정부에 대한 성직자들의 특별세 납부를 금했던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교서인 〈클레리키스 라이코스 Clericis Laicos〉와 교황의 수장권을 정한 〈우남 상크탐 Unam Sanctam〉을 무효로 만들었다.

필리프는 1307년부터 강력한 종교수도회인 성전기사단을 해체하려 했고, 그가 이 성전기사단을 이교라고 고발하자 클레멘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311년 도피네 비엔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의 앞날을 예견한 클레멘스는 1309년 아비뇽에 와서 이곳을 교황주재지로 결정했다.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교회 행정 중심지로는 로마보다 아비뇽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비엔 공의회는 1311년에 열렸다. 클레멘스는 공의회의 결정을 승인하여 절대적인 물질적 가난을 준수하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극단주의자들인 신령파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1312년 4월 필리프는 공의회를 거치지 않고 성전 기사단을 탄압하도록 클레멘스에게 압력을 가했다. 클레멘스는 필리프가 직접 성전기사단을 해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또한 필리프와 그의 측근을 비난한 모든 사도들의 서신들을 교황의 등록대장에서 없애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기사단을 해체해야만 했다.

클레멘스는 1308년 독일 왕으로 하인리히 7세가 선출되고 1312년 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것을 지지했으나, 하인리히가 나폴리의 왕 로베르토에 대항해 전쟁을 준비할 때에는 비엔 공의회와 프랑스의 압력을 받아 로베르토 편에 서야 했다. 그결과, 클레멘스는 신성 로마 제국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으며, 1313년 하인리히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인리히가 죽은 직후 황제 자리가 비어 있을 때 클레멘스는 통치권을 주장하면서 로베르토를 이탈리아의 황제 대리로 임명했다.

클레멘스는 노골적으로 그의 친척들을 우대했으며, 감추어 둔 재산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클레멘스는 노련한 교황이었으나 나약했고 암으로 고생했다. 그가 편찬한 〈클레멘스 교령집 Clementinae〉은 자신의 교령과 비엔 공의회의 교령을 모아놓은 것으로 후임 교황인 요한 22세가 1317년에 공포했으며, 교회법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또한 페루자에 있는 학교를 대학교로 승격시켰으며, 파리대학교,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교, 옥스퍼드대학교, 스페인의 살라망카대학교에서 아시아 언어 강좌를 개설했다.

단테는 클레멘스를 혹평했는데, 그가 프랑스에 굴복하여 필리프 왕의 조종을 받았고 하인리히를 반대한 한편, 성직을 매매하고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겼다는 이유에서였다. 단테는 〈연옥편 Inferno〉 19편에서 클레멘스를 '법을 무시하고 추악한 일을 행하는 목자', '제2의 야손'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