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7세

하인리히 7세

다른 표기 언어 Heinrich VII
요약 테이블
출생 1269/74경, 에노 발랑시엔
사망 1313. 8. 24, 이탈리아 시에나 근처 부온콘벤토
국적 독일

요약 룩셈부르크의 백작(하인리히 4세), 독일 왕(1308~13 재위), 신성 로마 제국 황제(1312~13 재위).
(영). Henry Ⅶ.

자신의 아들을 보헤미아의 왕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가문의 지위를 강화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제국에 확고히 묶어두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1288년 아버지 하인리히 3세를 계승하여 룩셈부르크의 백작이 되었다. 1308년 11월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 왕으로 선출되어 이듬해 1월 아헨에서 즉위식을 갖고 룩셈부르크 왕가의 첫번째 독일 왕이 되었다.

보헤미아를 얻은 것은 보헤미아의 공주 엘리자베트를 통해서였다. 그녀는 형부인 케른텐의 하인리히로부터 보헤미아 왕위 찬탈을 제국이 도와주는 대가로 하인리히 독일 왕의 아들 룩셈부르크의 요한(얀)에게 청혼했다. 1310년 8월 30일 결혼한 이들 부부는 바로 독일-보헤미아 군을 이끌고 보헤미아로 떠나 12월 19일 프라하를 점령했으며 요한은 얀으로 보헤미아 왕위에 올랐다. 또한 하인리히는 1311년 1월 밀라노에서 롬바르디아의 왕위를 차지했다.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의 도시들이 그에게 항복했다. 그는 선포한 평화와 공명정대한 정의의 계획에 따라 싸우는 세력들을 화해시키고 유배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황제를 편드는 기벨린(황제파) 당원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피렌체인들과 토스카나와 로마냐에 있는 구엘프(교황파) 동맹에서는 의혹과 불만의 소리가 일어났다(→ 구엘프와 기벨린). 1311년 2월 소요가 발생하여 브레시아 반란(1311. 5)으로 발전되었으며, 하인리히는 9월이 되어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1312년 5월초 로마에 간 하인리히는 앙주 가문 출신의 나폴리 왕 로베르토의 군대가 그에 대항하여 도시의 일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6월 29일 대관식에서 교황이 임명한 추기경들에 의해 황제의 관(冠)을 썼다. 8월 하인리히는 토스카나의 구엘프 세력에 대한 원정을 위해 로마를 떠났다.

토스카나의 여러 도시들을 정복했지만, 토스카나에서 구엘프의 지도격 도시인 피렌체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에게 우호적인 피사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낸 뒤, 1313년 8월 나폴리 원정을 떠났다. 도중에 시에나를 점령하려다 실패하고 열병에 걸려 죽었다. 그는 피사의 성당에 묻혔다. F. 슈나이더가 쓴 2종류의 전기 〈황제 하인리히 7세 Kaiser Heinrich Ⅶ〉(3권, 1924~28)와 〈단테의 황제, 하인리히 7세 Heinrich Ⅶ, Dantes Kaiser〉(1940)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