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마 왕조

파티마 왕조

다른 표기 언어 Fatimid dynasty

요약 북아프리카에 세워진 정교일치제의 왕조(909~1171).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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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팽창기
  2. 이집트 정복
  3. 쇠퇴
  4. 멸망
파티마 왕조(Fatimid dynasty)
파티마 왕조(Fatimid dynasty)

아바스 왕조칼리프에 도전해 이슬람 세계의 맹주가 되려 했으나 실패했다. 왕조의 통치자들은 선지자 마호메트의 딸인 파티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왕조의 이름도 파티마라고 정했다.

북아프리카와 이집트는 파티마 왕조가 들어서기 전에는 다른 통치자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바그다드에 있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되어 있었으나 이슬람의 수니파에 속했기 때문에 이슬람 세계의 상징적인 우두머리로서 바그다드 칼리프의 명목상 종주권을 기꺼이 인정해왔다.

그러나 새로운 파티마 왕조는 수니파와는 종교적으로 반대 입장에 있는 이슬람 시아파의 또다른 분파인 이스마일파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이슬람 세계에 기존의 정치적·종교적 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과거의 통치자들과는 달리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를 찬탈자로 보고 배척했으며, 그 명목상의 권위마저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파티마 왕조의 추종자들에게는 이 왕조의 구성원들이야말로 선지자의 딸인 파티마와 그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의 후손이자 이스마일파의 이맘(이슬람의 정신적 지도자)으로서 정당한 칼리프로 여겨졌다. 그들은 그 혈통이나 신의 선택으로 볼 때 진실한 신앙의 수호자이자 전이슬람 세계와 이슬람 공동체의 정통성을 지닌 우두머리였다.

파티마 왕조의 의도는 이 지역에 또다른 주권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바스 왕조를 대신해 새로운 칼리프국으로 들어앉는 것이었다.

팽창기

이스마일파의 포교자들은 9세기에 이슬람 제국의 여러 지역에 자리를 잡고 수니파의 지배와 아바스 왕조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는 설교를 하고 다녔다.

여러 차례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뒤 이스마일파는 예멘에 확고한 거점을 확보하고 이곳에서 북아프리카로 사절을 보내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909년경 이들은 자신들의 '이맘'이 출현했음을 선언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그들은 이맘이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스스로를 알 마디(신이 안내하시는 자)라는 메시아적 칭호를 가지고 출현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새로운 국가와 왕조의 발흥을 알리는 것이었다.

나라를 세운 지 처음 반세기 동안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들은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만을 다스렸으며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주민의 대부분은 수니파의 분파 중 하나인 말리키 학파였고, 나머지는 소수파였으나 강력한 세력을 가진 하와리지파였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지배자가 강요하는 이스마일파의 교리에 쉽게 순응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니었으며 파티마 왕조에 완강히 저항했다.

이스마일파 자체에서도 얼마 안 가 국가와 혁명, 즉 칼리프인 알 마디(909~934 재위)와 그를 권좌에 오르게 한 포교자들 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또한 베르베르인과 이웃의 이슬람 통치자들과도 정치적 갈등을 빚었으며, 북아프리카를 다스렸던 전임 통치자들로부터 물려받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에서는 비잔틴 세력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집트 정복

파티마 왕조는 이러한 어려움을 해쳐나가면서도 아바스 왕조의 세력 중심지인 동쪽으로 팽창하겠다는 궁극적 목표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 첫 단계가 이집트의 정복이었다. 초대 칼리프인 알 마디는 튀니지 동쪽 해안에 있는 마디야(920 건설)에 수도를 정했고, 그의 뒤를 이은 알 카임(934~946 재위), 알 만수르(946~953 재위), 알 무이즈(953~975 재위)도 이곳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알 마디는 913~915, 919~921, 925년에 걸쳐 3차례 이집트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알 무이즈 칼리프 시절인 969년 마침내 동방 진출의 첫번째 장을 마무리지었다. 파티마 왕조의 군대는 나일 강 유역을 정복하고 시나이 반도를 지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남부로 향했다. 이들은 이집트의 이슬람 왕조의 옛 행정중심지였던 알후스타트 근처에 카이로를 건설하고 제국의 수도로 삼는 한편, 그곳에 교리 학교를 겸하는 이슬람 사원을 새로 건립했다.

이 교리 학교는 왕조의 모계 선조인 마호메트의 딸 파티마 '앗 자라'(눈부시게 빛나는 자)가 죽은 뒤에는 알 아자르라 불렸다.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 통치자들은 1세기가 넘도록 이스마일파의 이맘이 지배하는 범이슬람 국가의 건설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애썼다. 변경에서 벌어지는 전쟁, 지중해의 분쟁, 국내의 여러 지방에서 일어나는 소요와 같은 다른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될 경우에는 수니파와 합의를 보기도 했으나 그같은 의견 조정이 오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국은 제국인 동시에 혁명적인 정권이었다.

칼리프는 방대한 제국을 다스리며 군사적·정치적 수단을 이용해 영토를 확장하려는 주권자였다. 그 심장부는 이집트였으며 절정기에 제국 영토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를 비롯해 홍해의 아프리카 쪽 해안, 시리아, 팔레스타인, 예멘, 그리고 메카와 메디나 등 2곳의 성지를 포함해 헤자즈까지 달했다. 이렇게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일은 이슬람 통치자로서는 매우 가치 있는 일로, 그에게 커다란 종교적 위신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신도들이 매년 행하는 성지 순례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칼리프는 제국의 황제이자 이맘이었다. 이맘은 이스마일파 신도들에게는 그들이 어디에 있든간에 정신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이스마일파의 교리에 따르면 알라 신의 화신으로서 인간을 언제나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존재였다. 그러한 점에서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는 수니파인 아바스 왕조 중심의 질서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인 한편, 그 질서를 뒤엎으려 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자 피난처였다. 그는 아바스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든 지역에 포교자와 정탐꾼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조직망을 구성해 사람들을 이스마일파로 개종시키거나 파티마 왕조의 대의명분을 위해 일하도록 만드는 데 활용했다.

이들의 임무는 설교를 하는 것 외에도 가능하다면 수니파의 질서와 그것을 지지하는 정권의 타도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었다. 이들은 카이로에 있는 최고본부의 지도에 따라 매우 세심하고 비밀스럽게 활동을 벌였다. 파티마 제국 안에서 이들의 조직은 전통적인 군사조직과 관료조직에 뒤이어 사실상 정부의 3번째 조직이 되었으며, 중세 이슬람 세계에는 없던 것, 즉 제도화된 국가종교와 비슷했다.

포교자들이 해야 할 가장 주된 임무는 이스마일파의 교리를 공식화하고 퍼뜨리는 것이었다.

이스마일파의 교리체계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계승을 부정하고 자신들이야말로 정당한 칼리프임을 주장하는 파티마 왕조에게 신학상의 근거를 제공했으며, 따라서 파티마 왕조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이름난 이스마일파 교리학자들은 처음에 튀니지에서, 뒤이어 이집트에서 이제는 고전이 된 이스마일파의 교리를 공식화하는 책을 썼다. 또한 파티마 왕조는 큰 도서관과 대학들을 세웠는데, 그 기능은 포교자들을 훈련시키고 카이로에 온 개종자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포교 활동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음에는 틀림없으나 수니파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파티마 왕조의 웅대한 전략에 비추어보면 그 일부분에 불과했다. 이같은 전략속에서 이스마일파의 신앙을 전세계에 퍼뜨리려는 목표와 파티마 왕조의 제국을 확장하려는 의도가 서로 만나 합쳐졌다. 이와 같은 활동과 연계하여 상업활동을 크게 확대하고, 페르시아 만을 통과하는 수니파의 무역로를 침해하면서 아시아와 근동 간의 홍해 무역을 발전시키는 경제정책을 폈다. 그결과 파티마 왕조는 홍해의 양쪽 해안을 모두 지배권 아래 두었고, 예멘에 대해서는 종주권을 획득했으며, 아라비아 동부와 중앙 아시아, 인도에까지 포교자들을 파견했다.

쇠퇴

파티마 왕조
파티마 왕조

1057~59년에 파티마 왕조의 동방 팽창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 이라크의 한 장군이 모술에서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로 선언하고 이후 1년을 바그다드에서 보냈다. 그러나 파티마 왕조의 지원을 받지 못한 그는 바그다드에서 셀주크 투르크에게 쫓겨났다. 이 사건은 파티마 왕조와 이스마일파의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전환점이 되었다.

파티마 왕조가 이슬람 세계의 맹주가 되는 데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대다수의 수니파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를 채택하고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스마일파의 주장은 교리상으로 볼 때 이슬람 세계의 일반적인 합의점과 동떨어져 있었고 11, 12세기에 수니파가 다시 세력을 얻었을 때 그것에 대한 거부감은 확연해졌다. 십자군의 침입은 간접적으로 그 운명의 방향을 결정했다. 즉 12세기에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세계 간에 대접전이 벌어지자 이슬람 쪽에서는 교리 다툼으로 내부분열을 일으킬 만한 여지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파티마 왕조는 해외 영토확장에서는 많은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이집트 정복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는 그 지역 자체의 반대 세력뿐만 아니라 비잔틴 제국, 셀주크 투르크, 그리고 유럽의 십자군과 같은 외적들의 대대적인 공격에 직면하여 연이어 패퇴를 거듭했다. 파티마 왕조가 심혈을 기울인 동방 진출이 지체되고 멈추게 된 곳도, 그리고 얼마 뒤 이들을 파멸시킨 새로운 세력이 발흥한 곳도 시리아였다.

이같은 대외적인 어려움은 의심할 나위없이 이집트 안에서 불만을 높였고 이러한 국내의 불만은 다시 대외적인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처음에 칼리프들은 본질적으로 정부의 우두머리로서 완전히 자기 뜻에 따라 여러 문제를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대가 점점 중요한 세력으로 등장했고 베르베르인·투르크인·수단인·누비아인 부대들 간에 분파적인 불화가 일어났다. 군대내 분파들간의 싸움은 알 하킴(996~1021 재위)의 통치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

더욱이 알 하킴의 기괴한 행동은 칼리프의 권위와 종교적 위신의 실추를 가져왔다. 그의 계승자들은 정부 고관들과 장군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오랫동안 제위에 있었던 알무스탄시르(1036~94 재위)의 시대에 이집트는 분파간의 싸움으로 무정부와 폭정의 악순환에 빠졌으며, 기근과 전염병이 계속되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동쪽과 서쪽 지방은 새로 나타난 지배자나 침입자에게 빼앗겼다. 1073년 유능한 장군인 바드르 알 자말리가 칼리프의 초청을 받아들여 카이로에 와서 정권을 잡았다. 하룻밤 사이에 그의 휘하 장교들은 주요 장군들과 장교들을 모두 잡아들여 죽였다. 알 자말리는 군 총사령관, 포교단의 단장, 와지르의 직함을 모두 차지했다. 이는 그가 군사·종교·관료 조직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의미했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주로 군사지도자로서였다. 그는 질서를 회복했으며 한동안은 번영을 가져오는 조치들을 취하기도 했다. 이집트는 군 총사령관을 수반으로 하고 그의 군대가 지탱하는 군사정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바드르 알 자말리의 자리는 영구적이었으며 그의 아들이 뒤를 이었다. 그뒤에는 군부 지도자들이 계속 그 자리를 차지하여 파티마 왕조 칼리프들의 후견자 노릇을 했다. 그뒤 등장한 사령관들은 이스마일파가 아닌 자들도 있었다.

멸망

바드르와 그의 후임자들은 파티마 왕조를 몰락의 위기에서 구해냈으며, 거의 1세기나 멸망의 시기를 늦추었다. 바드르는 동쪽의 셀주크 투르크의 도전에 대응하면서 시리아와 아라비아 등지에서 종교와 무력을 사용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시리아에서는 파티마 왕조의 군대가 패배를 거듭했으며 아라비아에서는 지지세력이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바드르의 아들이자 후임자인 알 아프달은 전이슬람 세계의 칼리프가 되겠다는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목표를 사실상 포기했다. 1094년 칼리프인 알 무스탄시르가 죽은 뒤 새로운 칼리프를 선택한 인물은 알 아프달이었다. 죽기 전에 알 무스탄시르는 자신의 맏아들로서 이스마일파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니자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아직 어린 니자르의 동생 아흐마드는 지지자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후원자가 나타날 경우 그에게 전적으로 매달려야 할 운명에 있었다. 알 아프달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자기 누이동생과 아흐마드를 결혼시켰고, 알 무스탄시르가 죽자 자신의 처남이 된 아흐마드를 알 무스탈리(1094~1101 재위)라는 왕호를 가진 새 칼리프로 선포했다. 알 아프달의 이러한 행위로 이스마일파 조직은 위부터 아래까지 온통 분열되었다.

이집트에서조차도 새로운 칼리프에 반대하는 세력이 나타났으며 페르시아, 이라크, 중앙 아시아에서 활동하던 하산 에 사바흐의 이스마일파 포교단은 새 칼리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카이로에 있는 파티마 왕조 당국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뒤 하산에 사바는 새로운 이스마일파 운동을 일으켰는데, 시리아 지파의 이름을 따서 아사신이라 불렀다. 이들은 니자르와 그 후손들을 정당한 '이맘'이라고 선포하고 카이로의 칼리프들에 대해서는 찬탈자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알 무스탈리를 인정했던 예멘의 이스마일파 교도들도 1130년 알 무스탈리의 아들인 알 아미르(1101~30 재위)가 아사신파에게 암살당한 뒤 그의 사촌인 알 하피즈(1130~49 재위)가 칼리프의 자리에 오르자 칼리프와의 관계를 끊고 떨어져나갔다. 예멘인들은 알 아미르가 남긴 어린아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이맘이라고 주장하며 카이로의 알 하피즈와 그 계승자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왕조는 1171년에 멸망했다. 최후의 칼리프 4명은 권력이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희망도 없이 단지 이집트의 일개 군주로 전락했다. 1171년 마지막 칼리프가 죽은 뒤 명목상의 와지르인 살라딘이 이집트의 진정한 통치자가 되었고, 이미 종교적·정치적 힘을 상실한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직위는 공식적으로 철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