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세르

나세르

다른 표기 언어 Jamal ⁽Abdan-Nāṣer
요약 테이블
출생 1918. 1. 15, 알렉산드리아
사망 1970. 9. 28, 카이로
경력 이집트의 군인, 정치가, 2대 대통령
국적 이집트

요약 논란이 많았던 아랍 세계의 지도자. 단명했던 아랍 연합공화국을 세웠고, 이스라엘과 두 차례 전쟁을 치러 패배했으며, 요르단 내전을 중재하는 등 아랍 세계의 정치에도 관여했다. 수단에 주둔해 있던 이집트군에서 복무하는 동안, 세 명의 동료 장교 즉, 나중에 아랍 연합공화국의 부통령이 된 자카리아 모히에디네, 육군원수가 된 아브델 하킴 아메르, 그의 후임 대통령이 된 안와르 아스 사다트를 만났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이집트 왕조를 타도할 것을 목적으로 한 '자유장교단'이라는 비밀 혁명조직을 결성했다. 1952년 7월 23일 89명의 자유장교단원들과 함께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제를 몰락시켰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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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권력장악
  4. 나세르에 대한 평가
나세르(Gamal Abdel Nasser)
나세르(Gamal Abdel Nasser)

개요

논란이 많았던 아랍 세계의 지도자로서 단명했던 아랍 연합공화국(1958~61)을 세웠고, 이스라엘과 2차례 전쟁(1956, 1967)을 치러 패배했으며, 요르단 내전(1970)을 중재하는 등 아랍 세계의 정치에도 관여했다.

초기생애

알렉산드리아 바코스 지구의 비포장 도로변 흙벽돌집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지방 우체국장을 맡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이집트 정부는 나세르가 농민 출신임을 보이기 위해 공식자료에서 그의 선조들이 살던 상(上)이집트의 원시 마을인 바니무르를 그의 출생지로 기록했다. 그의 아버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빈곤한 삼각주 마을인 알카타티바로 전근했고 여기서 나세르는 처음으로 학교에 다녔다. 그뒤 카이로로 가서 당시 영국 정부의 감옥에서 막 풀려난 삼촌과 함께 유대인 9가구가 사는 건물에 방을 얻어 살았다.

학교에서 영국인 교사들을 포함해 여러 교사들과 끊임없이 충돌을 빚었고 반(反)영국 가두시위에 자주 참여했으며 어느 한 시위에서 일격을 맞아 일생 동안 이마에 흉터가 남았다. 중학교를 마친 뒤 몇 달 동안 법과대학에 다니다가 왕립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소위로 졸업했다.

수단에 주둔해 있던 이집트군에서 복무하는 동안, 3명의 동료 장교 즉, 나중에 아랍 연합공화국의 부통령이 된 자카리아 모히에디네, 육군원수가 된 아브델 하킴 아메르, 그의 후임 대통령이 된 안와르 아스 사다트를 만났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이집트 왕조를 타도할 것을 목적으로 한 '자유장교단'이라는 비밀 혁명조직을 결성했다.

신생 이스라엘에 대항한 1948년 아랍 전쟁에서 나세르의 대대는 다른 두 대대와 함께 팔루자 지대(Faluja Pocket)라고 부르던 아랍의 몇 개 마을에서 이스라엘군에게 몇 주 동안 포위당하기도 했다.

권력장악

1952년 7월 23일 나세르는 89명의 자유장교단원들과 함께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제를 몰락시켰다. 사다트는 파루크 왕과 몇몇 지배층 인사들을 즉각 공개처형하자고 주장했으나 나세르는 이를 물리치고 파루크 왕 일행의 망명을 허용했다. 모하마드 나기브 소장을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하고 나세르가 이끄는 11명의 장교들로 구성된 혁명평의회가 정부를 장악했다. 그뒤 1년 이상 나세르는 눈치빠른 외국 특파원들도 그의 존재를 모를 만큼 자신의 실제 역할을 잘 숨겼다.

1954년 봄 복잡한 일련의 정치적 음모로 나기브는 해임·연금당하고 나세르가 막후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스스로 총리가 되었다. 같은 해 한 광신적인 이집트인이 알렉산드리아의 대중집회에서 나세르를 암살하려 했다. 범인은 자신이 '무슬림 형제단'의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했으므로 나세르는 이 극단적인 아랍 종교조직을 탄압했다.

1956년 1월 나세르는 일당 정치체제에 이슬람교를 공식 종교로 삼는 사회주의 아랍 국가를 표방한 이집트 헌법을 공포했다. 6월 국민투표에서 500만 명의 투표자중 99.948%가 단일 대통령 후보인 나세르에게 찬성표를 던졌고 99.8%의 찬성으로 헌법이 승인되었다. 그가 명목·실질상의 통제권을 장악하자 이집트의 앞날은 밝아 보였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전쟁물자에 관한 비밀협정을 맺었고, 영국과 미국은 아스완 하이 댐 공사의 첫 단계에 2억 7,000만 달러를 원조하기로 했다. (→ 수에즈 위기)그러나 1956년 7월 20일 미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미국의 원조를 취소했고 다음날 영국도 이 조치를 따랐다. 5일 뒤 알렉산드리아의 대중집회 연설에서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 이후 5년 동안 이집트가 징수하는 통행세로 댐을 건설할 것을 약속했다.

10월 29일 자녀 중 1명의 생일파티에 참석해 있을 때 나세르는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를 침입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이틀 뒤 프랑스와 영국 비행기가 이집트 비행장을 공격했다.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의 샤름앗샤이흐까지 점령했고 이집트 공군이 사실상 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세르는 아랍 세계에서의 명성을 전혀 손상받지 않고 치욕스러운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54년에 쓴 〈혁명의 철학 Philosophy of the Revolution〉에서 그는 "어떤 영웅도 수행하지 못했던 영웅적이고 영광스러운 역할"에 대해 언급하고, 5,500만 명의 아랍인, 2억 2,400만 명의 아프리카인, 더 나아가 4억 2,000만 명의 이슬람교도의 지도자가 되리라는 포부를 펼쳐 보였다.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아랍 연합공화국'을 결성했고, 나세르는 아랍 연합공화국이 언젠가는 전 아랍을 통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1961년 시리아가 탈퇴했으나 이집트는 여전히 아랍 연합공화국이라는 명칭을 고집했다. 아랍 연합공화국은 나세르 자신의 3단계 구상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세르에 대한 평가

나세르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소련의 원조로 건설한 아스완 하이 댐이 1968년에 가동되기 시작했고 20세기의 현대적인 생활방식을 여러 마을에 도입했으며 산업화도 촉진했다. 토지개혁으로 1인당 40만㎡ 이상의 토지소유가 금지되었고, 부패척결운동이 부분적으로 성공했으며, 여성들에게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권리를 부여했다. 이탈리아·그리스·프랑스·영국 등 외국인이 이집트에서 차지하고 있던 정치·경제적 지위는 새로운 중간계급에게 넘어갔고 이들 외국인은 이집트를 떠나도록 권유 또는 강요당했다.

나세르의 돋보이는 점은 여러 반대세력 즉 공산주의자, 콥트교도, 유대인, 기존 정당, 경쟁 관계에 있던 군부파벌, 땅을 빼앗긴 지주, 나기브 지지자 등 영국 지배 아래서 이익을 보던 사람들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18년 동안 이집트의 정치 지도자였다는 사실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나세르는 이집트를 경찰국가로 변모시켜 우편물을 개봉했으며 통신매체를 엄격히 검열했고 주요신문은 국유화했으며, 전화를 도청하고 이집트를 방문한 사람들의 방을 수색했다. 서구적 의미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일당의 공직 후보자들은 나세르와 그 측근들이 뽑았고 정적들은 사막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대부분 농민들의 생활은 그대로였으며 출생률은 여전히 높아 생활 수준을 높이려는 시도를 무색하게 했다. 외교에서 나세르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의 네루와 함께 비동맹노선 혹은 '적극적인 중립'을 주창했다. 1955년 아시아·아프리카 국가의 반둥 회의에서 그는 세계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이스라엘에 대한 승인을 거부한 그는 1956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사회개혁에 사용될 수 있는 거액의 자금을 군비에 쏟았다.

이집트군은 1962년에 시작된 예멘 내전에서 공화군을 지원했다(→ 중동전쟁). 그러나 나세르가 유엔 평화유지군의 가자 지구와 샤름앗샤이흐로부터의 철수를 요구하고 이스라엘의 해상 운송을 막기 위해 아카바 만을 봉쇄하자 1967년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 이집트 군대는 철수했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이집트 공군기가 비행장에서 파괴되고 이집트군이 수에즈를 넘어 퇴각하게 되자 나세르는 사의를 표명했으나 그를 지지하는 대규모 가두시위가 일어나고 국회의 투표에서 신임을 얻게 되어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소련은 파괴된 이집트의 모든 전쟁 장비를 즉각 교체하기 시작했고 이집트군의 포대를 엄호하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따라 지대공 미사일을 설치했다.

그는 1970년 미국이 제안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안을 잠정적으로 받아들인 뒤 심장마비로 죽었다. 나세르는 공적인 삶에서는 복잡하고 혁명적이었으나, 개인적으로는 대체로 보수적이고 소박했다. 그는 권력의 외로움을 알고 있었다. 키는 1.8m가 넘었고 몸무게는 90㎏ 가량 되었으며 짧게 깎은 회색머리에다 가무잡잡한 피부, 운동선수 같은 체격을 가졌고 따뜻하고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현대의 어떤 아랍 지도자도 나세르가 죽기 전 15년 동안 중동 전역에 걸쳐 얻은 만큼의, 때로는 광적이기까지 한 아랍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심지어 이집트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던 2번의 패전에 따른 손실도 이 카리스마적이고 거의 신화적이기까지 한 군장교의 인기를 퇴색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외국의 지배로 짓밟혔던 국민의 존엄성을 되찾아 준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나타난 진정한 이집트 지도자였다. 그러나 아랍 세계의 통일을 이루려던 그의 야망은 결국 실패했고 죽기 전에는 소련의 군사 원조에 대한 대가로 이집트의 정치적 독립을 어느 정도 양보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