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레스

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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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8. 2. 25, 미국 워싱턴 D. C.
사망 1959. 5. 24, 워싱턴 D. C.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행정관료.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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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경력
  3. 국무장관시절
  4. 평가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덜레스(John Foster Dulles)

개요

1953~59년 드와디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기에 대소련 정책을 입안했다.

초기경력

덜레스는 앨런 매시와 에디트 포스터 덜레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형제들은 5남매였다.

외할아버지는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던 존 왓슨 포스터이며 처 삼촌인 로버트 랜싱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지냈다.

뉴욕 주 워터타운 공립학교에 다녔는데, 아버지는 이곳에서 장로교 목사로 봉직하고 있었다. 프린스턴대학교·조지워싱턴대학교·소르본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1911년에는 뉴욕 설리번-크롬웰법률회사에 입사하여 국제법을 담당했다. 덜레스는 1927년까지 이 회사의 사장으로 있었다.

그러나 국무장관이라는 목표로부터 잠시도 한눈을 판 적이 없는 그는 마침내 1907년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해 19세 때 민간인 자격으로 중국을 대표한 할아버지 존 포스터를 따라 제2차 헤이그 국제평화회의에 참석했다. 30세의 나이에 윌슨 대통령에 의해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파견되는 미국 대표단의 법률고문에 임명되었고 후에 전쟁배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덜레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워싱턴 D. C.의 덤바턴 오크스에서 국제연합(UN) 헌장을 기초하는 일을 도왔으며 1945년에는 샌프란시스코 UN 회의에서 수석고문으로 활약했다.

미국이 수용할 수 있는 대일(對日) 강화조약이 소련의 회담 참석으로 채택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조약체결을 위한 평화회담을 소집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대신 덜레스에게 일본과 개인적으로 협상하여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는 어려운 임무를 부여했다. 덜레스는 여러 관련국들의 수도를 방문했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과 48개국이 사전에 동의한 바 있는 조약에 서명했다.

국무장관시절

자신의 뛰어난 업적에 용기를 얻고 있던 덜레스는 1953년 1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덜레스는 국무장관으로의 임명을 일반적으로 대통령의 고유권한으로 생각되어온 외교정책 수립에 대한 위임으로 간주했고 언젠가는 자신의 측근에게 "이상을 가지고 있는 한 오직 우리 국무부만이 외교정책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 몰두했던 그는 주도면밀한 정책 입안자였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자 재임기간 동안 왕성한 외교활동을 수행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서유럽의 방위에는 효율적일 수 있으나 중동·극동 및 태평양 제도 등을 방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그는 이러한 힘의 공백상태를 메우는 데 주력했다.

1954년 덜레스는 마닐라 회의를 개최하여 동남아시아 제국과 이해관계를 가진 8개 국가들을 중립적인 방위조약체로 결합시킨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를 결성했다. 잇따라 체결된 1955년 바그다드 협정은 후에 소위 '중동의 북부 원형국가군'이라 불리는 터키·이라크·이란·파키스탄의 바그다드 조약기구(CENTO)로 개칭되었다.

유럽에서는 1938년 이전 오스트리아의 국경선을 회복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있을지 모를 장래의 병합을 금지하는 오스트리아 국가조약(1955)을 체결하는 데 일조했고,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를 중재하여 트리에스테 지역을 자유지역으로 확정한 트리에스테 협정(1954)을 체결하게 했다.

덜레스의 외교정책에는 3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공산주의에 대한 뿌리깊은 혐오인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의 깊은 종교적 신념에 기초한 것이었다. 둘째, 굽힐 줄 모르는 강인한 성격으로 그는 여론에 따르기보다는 여론을 주도해나갈 것을 고집했다. 셋째, 국제법률가로서 조약의 가치에 대한 강한 신념이었다. 이 3가지 요인 중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격렬한 적대감은 그의 외교정책의 중심사상이었다. 그는 항상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제문제 Problems of Leninism〉라는 책을 지니고 다니며 측근들에게 히틀러의 〈나의 투쟁 Mein Kampf〉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그 책을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소련을 궁지로 몰아넣음으로써 개인적인 만족을 얻는 것 같았다. 실제로 1956년 그는 어느 잡지에 '벼랑을 두려워하면 싸움에서 진다'라는 글을 기고했으며, 심지어는 오스트리아 국가조약 협상 도중 소련의 침공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가 그에게 협상할 양보를 간청했을 때도 그는 사소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해 타협하기를 거부했다. 덜레스가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고 소련이 이에 굴복한 것이다.

그는 미국의 동맹국들에게도 이와 마찬가지로 비타협적이었다. 유럽 방위공동체 설립에 대한 그의 주장은 자유세계를 양극화할 소지가 있었는데 1953년 그는 프랑스의 반대로 인한 동기구 비준의 실패는 양국관계에 '고통스러운 재평가'를 초래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바로 이 표현과 그가 파리 회견에서 미국은 소련의 어떠한 침략에 대해서도 '대량핵보복'으로 응수할 것이라고 한 선언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미국 대외정책의 정책명칭이 되었다.

1956년 7월 아스완 댐 건설에 미국의 원조를 요청한 이집트의 가말 아브델 나세르 대통령에 대한 그의 단호한 거절은 중동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에 종언을 고하는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과거의 친(親)이집트 정책에서 완전히 선회하여 나세르를 가리켜 '주석뿔 달린 히틀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비록 나중에 가서 자신의 거절이 보다 미묘한 문제를 일으켰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시인했지만 소련 진영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인 나세르가 이미 소련을 자신의 맹방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미국에 대해 단호하게 등을 돌릴 것이라는 믿음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평가

덜레스에 대한 국내외 비판자들은 그를 국제정치의 개척자라기보다는 거칠고 융통성없는 책략가로 보았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러한 비판을 모두 무시하고 자신의 국무장관을 가리켜 "우리시대의 진정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와 그의 정책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어떻든간에 비공산권의 많은 주요정치가들은 냉전시대에 공산주의전략을 분쇄한 그의 강건함을 신뢰해왔다. 덜레스는 암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59년 4월 15일 사퇴했고 자유훈장을 수여받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