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

중동전쟁

다른 표기 언어 Arab-Israeli wars , 中東戰爭
요약 테이블
대륙 중동
국가 이스라엘, 아랍 국가

요약 1948년 이스라엘은 네게브 지방 전역을 점령했고 1956년 이스라엘군은 수에즈 운하 동쪽에 있는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1967년 전쟁 결과 아랍측은 구 예루살렘 시, 시나이 반도와 가자 지구, 웨스트뱅크, 골란 고원을 잃었다.
19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30년 동안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했고 양국 간 공식적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아랍인과 이스라엘인 사이의 적대감은 1980년대 내내 지속되어 팔레스타인인의 시위와 폭동이 계속되면서 대대적 민중봉기의 성격을 띠었다. 군부대를 동원하여 봉기를 진압하려는 이스라엘 정부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1948~49, 1956, 1967, 1973, 1982년의 전쟁이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제1차 중동전쟁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국가수립이 선포된 직후에 일어났다. 이집트·트란스요르단·이라크·시리아·레바논에서 출병한 아랍군들은 유대인에게 할당되지 않은 팔레스타인 남부와 동부 지역을 점령한 다음 구(舊)예루살렘 시의 작은 유대인 거주지역을 점령했다. 그 사이 이스라엘군은 유대 구릉지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간선도로를 장악하고 아랍군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1949년초까지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를 제외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사이의 옛 국경에 이르는 네게브 지방 전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1949년 2~7월 이스라엘과 아랍 제국들은 각각 단독강화조약을 체결했고, 협상이 시작될 당시의 분계선이 임시 국경선으로 정해졌다.

이집트에서 민족주의자 가말 아브델 나세르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새로운 긴장이 고조되었다. 1956년 10월 나세르가 유럽 소유의 수에즈 운하를 점령함으로써 야기된 국제적 위기의 와중에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아랍의 기지들을 파괴하기 위해 시나이 반도를 침공했다. 이스라엘군은 5일 만에 가자·라파·알아리시를 탈취하고 수천 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수에즈 운하 동쪽에 있는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했다(수에즈 위기).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은 아카바 만을 통해 공해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했는데, 그것이 이집트에 또하나의 위협이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한 이후 12월에 국제연합(UN) 비상군이 이 지역에 주둔했고, 1957년 3월 이스라엘군은 마침내 철수했다.

아랍군과 이스라엘군은 1967년 6월 5~10일에 6일전쟁으로 불리게 된 3번째 충돌을 일으켰다. 1967년초 이스라엘의 마을들에 대한 시리아의 포격이 가열되었다. 이스라엘 공군이 그 보복으로 시리아의 미그기 6대를 격추하자 나세르는 시나이 국경 부근에 주둔해 있던 이집트 군대를 동원했다. 이 전쟁중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공군을 궤멸시키고 제공권을 확보했다. 전쟁 결과 아랍측은 구 예루살렘 시, 시나이 반도와 가자 지구, 웨스트뱅크로 알려진 요르단 강 서안의 요르단령, 이스라엘-시리아 국경지대의 골란 고원을 잃었다.

6일전쟁 후 산발적으로 벌어지던 전투는 1973년에 또다시 전면전으로 발전했다. 10월 6일에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건너고 시리아가 골란 고원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해 들어왔는데, 10월 6일은 유대인의 성일(聖日)인 욤키푸르(Yom Kippur:'대속죄일'이라는 뜻)였기 때문에, 이 전쟁은 욤 키푸르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아랍군은 과거의 전쟁 때보다 강력한 공격성과 전투력을 보여주었으며, 이스라엘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시리아의 영토로 진격해들어갔으며, 수에즈 운하를 건너 운하의 서안을 점령함으로써 이집트의 제3군을 포위했다.

중동전쟁 (Arab-Israeli wars)
중동전쟁 (Arab-Israeli wars)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그해 11월 휴전협정에 서명했고, 1974년 1월 18일에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의 미틀라 고개와 기디 고개 서쪽으로 철병하고 이집트는 운하의 동안(東岸)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규모를 감축할 것을 규정했다. 양국군 사이에는 UN의 평화유지군이 배치되었다. 이 협정은 1975년 9월 4일에 조인된 또 하나의 협정에 의해 보완되었다. 1974년 5월 31일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UN 완충지대에 의한 양군의 분리와 포로 교환을 규정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1979년 3월 26일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양국간에 30년 동안 계속되어온 전쟁을 정식으로 종식시키는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불리게 된 이 조약의 규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전체를 이집트에 반환하고, 그 대가로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양국 사이에는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캠프데이비드 협정 (Camp David Accords)
캠프데이비드 협정 (Camp David Accords)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지 6주도 지나지 않은 1982년 6월 5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 고조되어온 긴장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요새가 많이 배치되어 있는 베이루트레바논 남부에 제트기 공격을 가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6월 14일까지 이스라엘의 지상군은 레바논의 베이루트 근교까지 침공하여 이 도시를 포위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진격을 중지하고 PLO와 협상을 시작하는 데 동의했다. 많은 지역과 서베이루트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포격이 있은 후 PLO는 다국적군의 감시하에 이 도시에서 철수했다. 마침내 이스라엘군도 서베이루트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여 1985년 6월에 이르자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국경 밖으로 완전 철수했다.

아랍인과 이스라엘인 사이의 적대감은 1980년대 내내 일촉즉발의 상태로 지속되었다. 1987년 12월 이스라엘 점령지역인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 및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팔레스타인인의 시위와 폭동이 계속되면서 이러한 소요 사태는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점령통치에 대항하는 대대적인 민중봉기(그러나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무장을 한 것은 아니었음)의 성격을 띠었다. 군부대를 동원하여 봉기를 진압하려는 이스라엘 정부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