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미술

이집트 미술

다른 표기 언어 Egyptian art

요약 주로 BC 3000년 이후의 왕조시기에 이집트와 누비아의 나일 강 계곡지역에서 제작된 기념비적 건축물과 회화·조각·공예품의 총칭.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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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왕조시대 이집트 미술
  2. 왕조시대 이집트 미술
  3. 고왕국시대 이집트 미술
    1. 건축
    2. 조각
  4. 중왕국시대 이집트 미술
  5. 신왕국시대 이집트 미술
    1. 건축
    2. 회화·조각
    3. 공예
  6. 그리스·로마 시대 이집트 미술
이집트 미술(Egyptian art)
이집트 미술(Egyptian art)

이집트 미술의 발전과정은 대체로 그 나라의 정치사와 궤를 같이하지만 아울러 뿌리 깊은 이집트적 사회제도의 산물이기도 했다. 공식적인 종교에 의해 지탱되는 위계적 사회구조는 권위주의적 법률에 순종할 것과 강제적 윤리를 지킬 것을 요구했다. 이집트 미술은 아마도 다른 어느 나라의 예술보다도 한층 더 권력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강력한 선전도구로써 기존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미술의 발전과정은 대체로 그 나라의 정치사와 궤를 같이하지만 아울러 뿌리 깊은 이집트적 사회제도의 산물이기도 했다. 공식적인 종교에 의해 지탱되는 위계적 사회구조는 권위주의적 법률에 순종할 것과 강제적 윤리를 지킬 것을 요구했다. 이집트 미술은 아마도 다른 어느 나라의 예술보다도 한층 더 권력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강력한 선전도구로써 기존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미술의 특성을 낳는 데는 지리적 요소가 주요한 작용을 했다. 나일 강은 유망한 농업적 조건을 이집트에 선사함으로써 미술과 공예가 발전하기에 좋은 안정된 생활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아울러 사막과 바다는 사방에서 이집트를 보호하여 거의 2,000년 동안 외세의 큰 침략 없이 그같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사막의 구릉에는 광물과 좋은 석재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어 미술가들과 공예가들이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다만 좋은 목재가 부족했는데 그때문에 이집트인들은 레바논과 소말리아로, 그리고 중개인들을 통해 열대 아프리카 등지로 원정을 다녔다. 전반적으로 유용하고 귀중한 물자를 찾으려는 노력이 대외정책의 방향을 결정하고 무역로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이집트의 물질문명을 풍부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대 이집트 미술은 이집트 문화의 종교적 신앙을 반영하여 지상의 삶은 내세의 영생에 비하면 잠시 지나가는 막간극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했다. 신분과 계급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내세에 자신들이 지니고 갈 유용한 장식물을 수집했으며 자신들의 매장지에 대해 최대한의 관심을 쏟았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미술품의 대부분은 고대의 무덤과 결부된 것들이다.

선왕조시대 이집트 미술

이집트 제1왕조가 성립하기 이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암벽화·무늬토기·점토인형·화장용구 등 선왕조시대(~BC 2925)의 다양한 유적이 발견되었다. 구리와 동석은 매우 일찍부터 장신구 재료로 쓰여왔다. 도기는 이 시기의 특유한 산물로서 세련된 기법과 대담한 장식기술의 발전을 보여준다.

단단한 석재를 이용한 작업은 선왕조시대 후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조각은 작은 동물상 조각이라든가 석판 팔레트(원래 눈화장 용구)의 부조장식 따위에서 출발했다. 기본적인 드로잉 및 회화 기법은 상이집트 암벽화에 나오는 동물화라든가 배 타는 장면, 사냥장면과 아울러 더욱 세련된 히에라콘폴리스의 무덤벽화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목재가 귀했기 때문에 건축에는 나일 강의 진흙과 갈대를 이용하다가 이후에 햇빛에 말려 만든 벽돌을 사용했다.

왕조시대 이집트 미술

고증에 따르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통합(BC 3100경)을 계기로 이집트 문화의 다양한 흐름이 하나로 모여 풍요한 단일문화를 이루게 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왕조시대(BC 2925경~2575경)의 가장 유명한 미술품은 '나르메르 왕의 팔레트'로서 나르메르 왕이 적들을 물리치는 장면을 묘사하여 이집트의 통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그림은 개별장면을 선명하게 처리하고 파라오를 신성하게 묘사한 점에서 오랜 기간 이집트 미술에서 나타나는 인물표현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머리는 옆모습으로 그렸으나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어깨가 정면을 향한 반면 상반신은 절반 정도 옆으로 기울었고, 다리는 또다시 옆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그린 미술가의 주된 의도는 가능한 한 많은 세부묘사를 담는 데 있었다. 즉 한 시점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가 알고 있는 모습들을 모두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을 중앙에 배치하여 형식적 통일성을 부여했으며 인물들의 크기를 달리해 상대적인 신분의 차이를 표현했다.

문화의 응집성이 전반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이런 류의 예술적 관행은 BC 2000년대말에 이른바 아마르나 양식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왕국시대 이집트 미술

건축

고왕국시대(BC 2575~2130경) 이래로 무덤(죽은 자의 영주지)과 신전(신의 영주지)에 석재가 쓰이기 시작했다.

진흙벽돌은 여전히 가장 흔한 일상적 건축재료로서 왕국을 짓는 데도 쓰였고 요새라든가 신전 경내와 도시의 성벽, 신전 주변의 부속건물 등을 짓는 데도 쓰였다. 고대 이집트의 성읍도시는 대부분 나일 강 계곡의 범람원인 경작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편 신전과 무덤은 대체로 나일강의 홍수가 미치지 않는 지역에 지어졌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따라서 이집트 건축에 대한 연구는 어쩔 수 없이 장례 및 종교 건축물에 비중을 두게 된다. 하지만 자연이나 사람의 손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진흙벽돌 구조물은 이집트의 건조하고 더운 기후 덕분에 약간은 남아 있다.

이집트의 묘소 건축은 크게 발전했으며 대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대규모 피라미드를 짓고 그 안에 군주의 시신을 보관하는 매장실을 두었으며 그 주변에는 여러 무덤과 신전으로 이루어진 건물군을 배치했다.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의 2대왕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이다.

이 최초의 석재 건축물은 위로 갈수록 크기가 작아지는 6층의 계단을 포개 올린 디자인과 방대한 규모(544×277m)의 경내시설이 볼 만하다. 경내시설은 양질의 석회석을 붙인 사각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 멤피스의 왕궁과 연관된 구조물을 나타내는 듯한 일련의 '모조' 건축물을 지어놓은 것이다. 기자에 있는 유명한 대건축물들은 피라미드 건축의 고전적 형태를 보여주는데, 그 가운데 제4왕조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가 가장 걸작이다(기자의 피라미드).

토대를 이루는 정4각형의 4면(四面)은 5.3㏊의 면적을 포괄하면서도 각 변의 길이가 거의 비슷해 서로 30㎝ 이상의 오차가 나지 않는다.

피라미드의 4면방향도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에 일치한다. 완공 당시의 피라미드 높이는 146.7m였다. 그밖의 다른 특징들도 이 건축물이 두드러져 보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 받침돌을 대어 높이 올린 대열주(大列柱)와 압력을 줄이기 위해 위층에 5개의 빈 칸막이방을 올린 화강암 왕실(王室)이 그것이다. 왕의 두상 아래 사자의 몸통 형상으로 조각된 대형 스핑크스는 카프레의 피라미드 근처에 자리잡고 있다.

신전은 죽은 파라오와 이집트의 여러 신들을 경배하기 위해 지은 것들이다. 무덤 안에는 가구와 장신구 그밖의 공예품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보존되어왔다.

귀족들의 무덤은 왕의 피라미드와는 약간 달리 진흙벽돌이나 석재로 지은 꼭대기가 평평한 직4각형의 구조물이었다. 사카라에 있는 이른바 계단식 피라미드가 알려진 가장 최초의 것이다. 19세기에 고고학적 발굴작업을 하던 사람들이 이들 무덤에 마스타바(아랍어로 '긴 의자'라는 뜻)라는 이름을 붙였다.

거대한 상부구조물에는 많은 창고가 마련되어 죽은 사람을 위한 식량과 비품을 저장해놓았고, 그 시신은 땅 밑에 있는 직4각형의 매장실에 안치했다. 또한 상부구조물 안에는 항상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흙을 쌓아올린 낮은 봉분이 있는데, 어쩌면 고대의 원시적인 분묘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조각

고왕국의 석조무덤과 신전은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밝은 채색의 부조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벽장식 조각 가운데 특히 뛰어난 것은 평부조 작품으로 제5왕조의 왕실무덤 건축물과 멤피스 묘역의 제5·6왕조시대 개인무덤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부지르에 있는 네우세레 왕의 태양신전 부조와 사카라의 프타호테프 및 티이 왕 무덤에 새긴 일상생활 장면도 뛰어나다. 목재나 석재로 조각된 크고 작은 조상들은 사자의 초상을 뚜렷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 시기에 조각 인물상을 묘사하는 규범이 세워져 정확한 비례와 자세, 세부의 배치 등이 상세하게 규정되었다.

군주와 관리들은 항상 그들의 지위에 걸맞게 위엄 있는 태도로 묘사되었다. 하인과 일꾼들은 각기 자신들의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는 모습으로 보다 자유롭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조각규범은 양식의 지속성과 기법의 고도성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했다.

중왕국시대 이집트 미술

고왕국 말기에 내란과 전반적인 경제침체로 정교한 무덤건축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예술적 질이 저하되었다. 예술의 부흥이 이루어진 것은 중왕국시대(BC 1938~1600경)에 좀더 안정된 정치적 풍토가 조성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에는 특히 왕들의 초상조각이 주목을 끄는데 고왕국시대 인물상의 위엄있는 무표정과는 대조적으로 근심이나 비애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파이윰 오아시스 부근에 지은 왕실의 장례용 피라미드와 신전들은 이 시기에 더 규모가 작아졌고 주로 말린 벽돌과 석재포장을 사용했다.

특히 부조와 회화는 높은 수준의 예술적 기량과 정확한 기법을 보여주었다. 멤피스의 전통을 되살린 이 시기의 가장 훌륭한 부조작품은 테베의 다이르알바리에 있는 멘투호테프 2세의 무덤과 카르나크에 있는 세소스트리스의 작은 사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는 인물과 문구를 배치하는 데서 여백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조각의 세련미를 크게 높이고 있다.

신왕국시대 이집트 미술

건축

또 1차례 정치적 격변기를 거친 뒤 번창하는 신왕국(BC 1567~1085)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예술의 개화기가 도래했다.

신전·사당·암벽무덤·명문비석 등이 나일 강 계곡을 따라 이집트와 누비아 곳곳에 건립되었다. 웅장한 피라미드는 왕권의 유력한 상징이었을 뿐 아니라 도굴꾼들의 확실한 표적이 되기도 했다. 신왕국시대에는 왕실무덤의 도굴과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피라미드를 닮은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 테베의 궁벽한 골짜기에 무덤을 한데 모아놓았다. 그곳의 이른바 '왕들의 계곡'에는 석회석 암벽을 깊이 파서 무덤을 만들어 아무런 외부 구조물 없이 다만 무덤입구의 암벽표면에만 표시를 새겨놓았다.

또한 암벽무덤은 귀족계급에서도 흔히 매장실로 사용했다. 그 대부분은 아주 단순한 하나의 공간을 이용하여 마스타바 무덤의 복잡한 방들이 하는 역할을 모두 하도록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일부는 상당한 건축적 노력을 기울여 지은 것도 있었다. 아스완에 있는 거대한 회랑들은 종종 이리저리 얽혀 복잡한 미궁을 이루고 있는데 일부는 바위를 공들여 깎아 기둥을 만드는 등 정식으로 지은 것이지만 일부는 대충 깎아 만든 것이다. 회랑 내부에는 가짜 문이 달린 사당을 만들었다. 때로는 정면 현관에 주랑을 설치하고 명문을 새겨 웅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신전건축은 크게 예배용 신전과 장례용 신전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일상적인 예배의 대상인 신상을 모셔놓은 곳이고, 후자는 죽은 왕들의 제사를 행하는 사당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신전의 내부시설과 웅장한 크기는 제사장의 권력이 갈수록 커졌음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신전건축은 거대한 현관과 열주가 늘어서 있는 마당, 많은 기둥이 있는 회랑, 감실, 여러 예배당을 포함했다. 신전 내부의 깊숙한 곳은 파라오와 대제사장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기둥과 받침대의 디자인은 종려라든가 파피루스 같은 식물모양을 본떴으며 벽도 식물무늬로 장식했다.

화강암으로 만든 거대한 신상과 군주의 조상은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했다. 주신전 건물 바깥으로는 호수가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우물이 있어 제례에 쓰는 물을 공급했다. 후기에는 탄생실을 두어 왕의 거룩한 출생을 기리기도 했다. 부속건물을 망라한 전체 신전은 진흙벽돌로 된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예배용 신전은 오랜 세기에 걸쳐 테베에 세워진 대성전들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한 형식을 이룩했다.

그 가운데 건축학적으로 가장 만족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자면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가 착공한 룩소르 신전이다. 위대한 건축가인 람세스 2세가 지은 가장 볼만한 대건축물로는 아부심벨 신전을 들 수 있다. 천연의 암석을 파서 만든 이 신전은 전반적으로 보통 이집트 신전의 설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신전 정면은 거대한 좌상이 자리잡았으며 기둥 있는 회랑이 2개 잇닿아 현관으로 통하고 감실에는 람세스 자신의 조상을 포함해 4개의 신상이 비치되어 있다.

아부심벨 (Abu Simbel)
아부심벨 (Abu Simbel)
아부심벨 (Abu Simbel)
아부심벨 (Abu Simbel)

또한 제21·22왕조의 왕들이 아몬 레 신에게 봉헌한 삼각주지대 타니스의 대신전에 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신전은 거대한 조상과 10여 개의 오벨리스크를 비롯한 석재의 대부분을 이집트의 다른 신전들에서 차용해왔기 때문에 앞선 시기의 건축물들을 집대성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신전은 예배용 신전일 뿐 아니라 경내에 매장되는 왕들을 위한 장례용 신전이기도 했다. 그밖에 볼 만한 예배용 신전의 유적으로는 카르나크·아비도스·아마르나 등지의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신왕국시대의 장례용 신전은 대부분 서부 테베의 변두리 사막지대를 따라 건축되었다(장제전). 1가지 예외를 꼽는다면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하트솁수트 여왕의 신전으로서, 다이르알바리의 멘투호테프 2세의 무덤 부근에 있다.

하트셉수트의 빈소 사원(Mortuary Temple of Hatshepsut)
하트셉수트의 빈소 사원(Mortuary Temple of Hatshepsut)

관례에 따라 설계된 장례용 신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아멘호테프 3세의 신전이었던 것 같다. 이는 주로 오늘날 남아 있는 석영암으로 만든 2개의 멤논의 거상으로 미루어 판단한 것이다. 신전의 뜰과 회랑의 유적에서 발견된 이 거상들을 비롯한 그밖의 왕실조각상들은 오늘날에는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웅장함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 신전의 설계와 석재의 대부분은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신전인 라메세움을 짓는 데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장례용 신전 외벽의 벽장식은 주로 왕들의 군사활동을 다루었으며 내부의 장면은 주로 제례적인 의의를 갖는 것들이었다.

회화·조각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보물들은 왕실과 그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위해 만든 다양한 사치품들의 전형이다.

회화는 이 시기에 독립적인 예술로 자리잡았고 공예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제18왕조에 이르러 회화와 조각은 우아미와 세련미를 보였으며 고전적인 표현규범을 좀더 자유롭게 적용했다. 인물상은 가볍고 부드럽게 처리되었고 세부묘사는 더욱 정밀해졌다. 부조미술의 전통은 테베에서 부활되었고 다이르알바리에 있는 하트솁수트 신전의 조각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시기의 왕실부조는 테베와 사카라의 개인 무덤에 있는 것과 쌍벽을 이룬다.

이집트 회화는 테베에 있는 귀족들의 무덤장식에서 최고수준에 달했다. 장식매체의 특성과 외견상 더욱 확대된 예술적 자유로 오락적인 내용을 담은 작은 세밀화가 표준화되었다. 메나와 나크트의 작은 무덤들에는 그와 같은 재미있는 소품들이 가득하다. 레크미레 같은 큰 무덤들의 회화는 좀더 형식적이지만 이 역시 이례적으로 세부묘사가 풍부하다. 테베와 텔엘아마르나의 왕궁과 주택에서 발견되는 벽화와 천장화의 단편들은 풀밭과 정원을 배경으로 한 상류계급 일상생활의 일면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이 시기에 부각된 아마르나 양식은 아크나톤 왕(아멘호테프 4세)의 치세와 더불어 등장했다.

이 양식은 완전한 표현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왕실가문의 성원들도 비공식적인 일상생활 속의 모습으로 철저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비록 람세스 2세 치하에서 거상(巨橡) 조각이 절정에 달하고 뒤이어 아크나톤 치하에서 관능적 사실주의가 번창했지만 이집트 조각은 람세스 2세 시대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시대 이후 왕실 인물상은 대체로 인습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며 때때로 조각가가 예외적인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람세스 2세 (Ramses II)
람세스 2세 (Ramses II)

예컨대 사자를 데리고 리비아인 포로를 옆에 끌고 가는 람세스 6세의 특이한 인물상(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같은 것이 그렇다. 말기 왕조들의 왕실 조각과 민간 조각에서는 복고풍이 특히 두드러진다. 제25왕조의 누비아 왕들의 인물상은 제12왕조의 왕실 조각을 많이 본뜬 것 같은 야성적인 사실주의를 보여준다. 중왕국과 제18왕조 시대 조각상의 유형이 부활되었으며 많은 걸작이 제작되었다. 테베 시장 몬템하트의 조각상들(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은 풍부한 다양성과 뛰어난 기법, 때로는 획기적인 사실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후기시대 작품들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조각적 특성을 고찰할 때 대부분의 이집트 조각이 갖는 1차적 목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집트 조각은 기본적으로 죽은 사람을 오시리스 앞에 재현하거나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의 모습을 대신전의 신들 앞에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때문에 조각상은 단지 물리적 재현일 뿐만 아니라 거기 부합하는 문서를 담는 도구이기도 했고 그리하여 아름답게 조각된 표면에 어울리지 않게 문서를 새겨넣기도 했던 것이다(종교예술).

공예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도기는 예술성이 거의 없다.

예를 들어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도기는 대부분이 암포라 형태의 단순한 물병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제18·19왕조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무늬가 채색된 고급 기물이 등장했다. 파이앙스(광택이 있는 석영가루의 합성물)가 전반적으로 도기를 대신할 조형재료로 등장해 왕조시대 전기간에 걸쳐 작은 동물상과 인물상 등의 재료로 널리 쓰였다. 가장 두드러진 예로 중왕국시대의 푸른 광택이 나는 하마상이 있다. 특히 후기시대에 파이앙스로 만든 부적과 작은 신상이 크게 발달했다.

파이앙스 (faience) 펜던트
파이앙스 (faience) 펜던트

그밖에 다양한 색상의 파이앙스 타일도 널리 쓰였다. 유리는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선왕조시대 초기부터 유약의 형태로 알려졌으나 제18왕조 때까지는 독립적인 재료로 쓰이지 않았다.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 유리는 항상 사치의 상징으로서 부적·구슬·상감·술잔 등을 만드는 데 쓰였다.

고대 이집트 유리 공예
고대 이집트 유리 공예

이집트 금속공예의 장인들은 구리·청동·금을 많이 사용했다.

초기에 대부분의 용기는 금속덩어리(잉고트)를 나무로 된 모루 위에 놓고 두들겨 부풀려서 만들었다. 뒤에는 주물이 지배적으로 쓰였다. 대형 청동상 주물은 신왕국 말기에 제25왕조 때까지 절정에 다다랐다. 이 시기의 걸작으로는 카로마마상(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있다. 이 여인상의 유례없이 우아한 조형미는 겉옷의 깃털무늬와 정교한 꽃무늬, 옷깃을 이루는 금은 상감에 의해 더 한층 돋보인다.

이집트에서는 금이 은보다 구하기가 쉬웠다. 금은 이집트의 장신구를 풍부하게 만들었다(금세공품). 그것은 상감과 칠보세공·목걸이·구슬 등에 쓰였다. 보석은 쓰이지 않았지만 홍옥수, 자수정, 석류석, 붉은색과 노란색 벽옥, 청색 유리, 장석, 터키옥, 마노 등 다양한 준(準)보석이 널리 쓰였다. 제18왕조 초기의 아호테프 여왕과 함께 매장된 대량의 장신구들(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가운데는 디자인이 특이한 것이 많은데 그 가운데 특히 사슬 모양의 금목걸이가 걸작이다.

제18왕조 시대의 것으로 멋진 장신구가 많이 전해오지만 어느 것도 투탕카멘의 장신구(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는 못미친다. 이 대량의 수집품은 금세공과 보석세공사들의 모든 기술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나무와 상아, 동물의 뼈를 사용한 조각은 왕조시대 전기간에 걸쳐 높은 수준의 기예를 보이고 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화장용구와 그밖의 장식물들이 특히 볼만하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왕의 매장실에 비치되어 있는 의자·식탁·평걸상·침대·옷장 등 조각과 상감을 새겨넣은 수많은 가구류이다.

그리스·로마 시대 이집트 미술

BC 332~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엄밀한 의미에서 파라오의 독립적인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은 프톨레마이오스의 통치 아래 미술과 건축은 심각한 변화를 맞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장례용 신전은 여전히 고대의 모형을 따랐지만 갈수록 그리스의 영향이 크게 나타났으며 때로는 추하게 보이기도 했다.

누비아에서는 토착적인 미술전통이 로마 시대 이집트의 전통과 융합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로마 시대 이집트(BC 30~AD 642)의 관에 쓰인 초상화는 이집트 특유의 예술적 양식을 낳았으며 이로부터 새로운 회화양식이 생겨나 비잔틴 성상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