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공예

금속공예

다른 표기 언어 metal work , 金屬工藝

요약 금속을 재료로 하여 만든 공예품 또는 그 분야.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된 금속공예는 인류의 생활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했으며 한 시대의 산업과 문화의 척도가 되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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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철금속
  2. 기법
  3. 판금법
  4. 주조법
  5. 단조법
  6. 조금법
  7. 역사
    1. 고대
    2. 중세
    3. 근세
    4. 산업혁명 이후 현대까지
    5. 동양
  8. 한국의 금속공예

제련(製鍊)기술의 발달에 의해 철·금·은·주석·납과 동합금인 청동·황동·백동 등의 다양한 재료가 개발되고 여기에 유리·수정·각종 옥 등을 곁들이는 장식기법도 발전하였다.이러한 금속재료와 다양한 기법으로 무기·제기(祭器)·의기(儀器)·장신구·일상용품 등이 제작되었는데 최근에는 알루미늄·스테인리스강(鋼) 따위의 새로운 재료가 개발됨으로써 그 범위가 더욱 확대되고 있다.

비철금속

인류가 최초로 발견한 금속은 구리광(鑛)이며 BC 4000년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유역에서 시작된 야금술(冶金術)이 발전된 곳은 이집트였다.

순동(純銅)이 너무 무르기 때문에 주석이나 아연으로 합금하여 단단하게 만드는 기술과 동을 걸러내는 정련술이 동시에 개발되면서 황동이나 청동 같은 재료가 널리 사용되었다. 은 귀금속의 가장 중요한 재료로 이집트·에트루리아·콜롬비아·멕시코 등지의 고분에서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금은 산화되지 않는 특성이 있고 전성(展性)과 연성(延性)이 가장 좋으므로 1.25㎛ 두께의 얇은 박과 28g의 금으로 수㎞의 금선을 만들 수 있다.

합금은 실용적이기 때문에 금속공예에 널리 쓰인다. (銀)은 휘은광석에서 산출되며 귀금속세공, 식기·장식품·화폐 제작에 쓰였고 순금 다음으로 전연성이 높아 얇은 은박·은분·은선 등으로 가공하여 장식적인 것을 만드는 데 많이 쓰였다. 순은보다는 합금된 은이 강하기 때문에 식기 같은 실용품에는 적합하다.

구리·금·은 이외에 주석과 납도 기원전부터 발견되어 쓰여진 비철금속이며 낮은 온도에서 쉽게 녹고 공기중 부식이 안되는 특성 때문에 그릇의 표면이나 건축물의 지붕 같은 외장에 바르기도 했고 청동이나 귀금속 대신 쉽게 제작될 수 있는 장식품의 재료가 되었다.

고대부터 쓰여진 이러한 재료 이외에 17세기 이후 실용화된 알루미늄·니켈·백금·티타늄 등의 비철금속이 있다.

철기시대 이후 공구와 무기개발이 용이해짐으로써 인류문명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철은 지구상에 규소(27%)와 알루미늄(8%) 다음으로 많은 양인 5%이며 최초의 철제장식품은 BC 3500년경으로 추정되는 이집트의 철구슬이다. 철이 확실하게 사용된 것은 BC 1000년경 아시아 지역이었고 그후 철의 사용은 그리스와 에게로 전파되어 서양문화 전반에 퍼지게 되었다. 16세기 건축물의 대문이나 창틀이 철로 만들어지면서 철은 예술적 재료로서 본격적인 꽃을 피우게 되었다.

기법

금속재료를 가공하는 기법에는 판금법(板金法)·주조법(鑄造法)·단조법(鍛造法) 등과 장식기법인 조금법(彫金法) 등이 있다.

판금법

금속덩어리를 판으로 넓게 만든 후 판을 오리거나 꺾어가며 형태를 만들어가는 기법이다.

금속제작기법 중 고대부터 가장 많이 쓰였으며 용접이나 은땜이 개발되기 전에는 금속판과 판을 리벳이음(riveting)으로 연결시켰다.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에 있는 실물크기의 이집트 동상(Pepi I)은 판금과 리벳이음으로 된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나라 삼국과 통일신라 시대의 관·과대·요패 등도 이러한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주조

금속을 높은 열로 녹여 액체로 만든 후 거푸집(몰드)에 부어 응고시켜서 각종 형태를 만드는 기법이다.

연한 돌이나 진흙 등을 주형으로 사용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이며 BC 2500년 이집트에서는 납형법(蠟型法)을 사용해 동상을 제작했는데, 우리나라의 동검·동촉·거울·동종·동합(銅盒) 등이 이러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오늘날 주조법은 정밀하고 다양한 형태의 대량생산 기술로 발전하였으며 종이·나무·모래·석고·청동·강철 등이 주형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단조법

망치작업에 의한 금속성형기술로서 금속판보다는 선이나 봉을 두드려 가공하는 방법으로 철기시대 이후에 철로 제작된 모든 공예품들에 주로 이 기법이 사용되었다.

가소성이 높은 철·동·금·은 등을 재료로 단조(鍛造)하였는데 이때 열을 이용한 단조가 주로 쓰였으며 열을 이용하지 않는 단조도 사용되었다. 이 기법은 BC 5500년경 이집트인들이 청동이나 순동 등으로 공구를 제작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중세에 철로 제작된 대문·창틀 등은 대부분 단조기법으로 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금동고배(金銅高盃)나 각배 등의 제작에 사용되었다.

조금법

금속판의 표면에 문양이나 글자를 새기는 장식기법으로 돋을새김(Embossing, Repoussé)·체이싱(Chasing)·인그레이빙(Engraving)·상감기법(Inlaying)·칠보(Enameling)·도금(Gilding) 등이 있다.

돋을새김:금속판의 앞면을 부조적으로 튀어나오게 하기 위해 뒷면에서 쳐서 밀어주는 장식기법이다.

체이싱:금속판 앞면의 부조장식을 위하여 앞면에서 쳐주는 방법이다.

인그레이빙:금속판 위에 문양을 새기기 위해 정같이 날카로운 도구로 면을 부분적으로 깎아내는 방법이다.

상감기법:금속판 위에 금, 은, 기타 보석 등 다른 금속을 집어 넣어 문양을 장식하는 방법이다.

고대에 개발된 다마스쿠스(Damascus) 상감은 철과 청동에 홈을 새겨 여기에 금이나 은선을 박고 닦아내어 무늬를 넣는 것으로 다마스쿠스라는 지역에서 유래된 명니엘로(Niello) 상감은 은·동·납·유황·염화암모늄 등을 합금하여 흑색으로 만들고 이를 은제품에 주로 사용하여 흑백의 대비를 강조시킨 상감기법이다.

이 기법으로 비잔틴이나 이슬람 문명권, 15세기 이탈리아와 독일 등에서 우수한 제품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우리나라 상감기법의 일종인 은입사(銀入絲)는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까지 쓰이는 특징적인 기법인데 백제에서 일본으로 보낸 칠지도(七支刀) 명문이 금입사로 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성행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칠보:금속표면에 다양한 색채의 유리질을 녹여서 붙임으로 표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기법이다.

이것은 미케네 문명에서 개발되어 비잔틴 문화에서 꽃을 피웠다. 특히 유선칠보(Cloisonné)가 발달하였다.

도금:원시적 방법의 도금으로 얇은 금박을 나무·금속·석고·유리 등에 입히는 방법이다. 고대 이집트의 가구 등에서 금박을 입힌 것이 발견되었으며 그리스에서는 대리석 동상에 수은법으로 금을 입히는 기술이 발달했다.

역사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지역에서는 금·은·동을 두드려 장식품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우바이드(al-ubaid) 신전 전면을 장식한 부조는 2마리의 사슴꼬리를 잡고 있는 사자머리를 한 독수리를 만든 것인데 이것은 동판을 망치로 두드려 형태를 만들고 납땜한 것이다. 이것은 우르(Ur) 제1왕조(BC 2650~2500)의 뛰어난 예술성과 기술을 보여주는 예이다. 당시 수메르인들은 동으로 가정용구·항아리·장신구 등을 많이 제작했다.

수메르의 금공술은 바빌로니아·아시리아·페르시아 등으로 이어져 발전했다.

BC 1500~BC 500년 페르시아에서는 좀더 단단하고 실용적인 청동으로 마차나 전차의 부속품·제식용구·가정용구·장신구 등을 만들었다. 이집트에서는 판금법과 주조법이 동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BC 2500년경부터 수많은 청동기가 나타나 순동으로 된 섬세한 장식품도 만들어졌다.

상류계급의 남녀 모두 청동·동·은으로 만든 거울을 갖고 있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는 사이스에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5~BC 30)의 신전 동상인데 사자(死者)와 함께 묻혀 있었다. 크레타의 BC 2200~BC 1600년경 청동으로 주조된 칼은 크레타 최고의 명작이며 그후 BC 1400년경으로 추정되는 미케네 분묘출토에서는 부조와 상감기법으로 장식된 칼이 나왔다.

그리스는 이집트로부터 금속기술을 배워 판금·단조·주조·조금·땜질 기법 등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으며 예술성이 뛰어났다.

테라코타로 만든 화병과 주전자 형태도 금속으로 제작되었는데 몸체는 두드려 매끈하게 만들고 물줄기·손잡이·뚜껑 밑받침은 주조기법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장식성이 돋보인다. 에트루리아에서는 주조·판금·돋을새김·상감기법 등이 발달하였으며 청동으로 된 신전봉헌용 동상·식기·가구·갑옷·칼·램프·촛대·거울·전차까지 만들어 수출도 했다.

로마는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에서 최고의 청동상과 금속장식품 등을 전리품으로 빼앗은 다음 그 기법과 표현양식을 발전시켜 로마 전역에 전파시켰다.

판금기법으로 전투사의 갑옷과 칼을 만들었으며 주조와 조금기법 등을 병행하여 가정용구·거울·동상·보석세공품을 만들었다. 로마 공화제 말기에는 황동의 실용화 단계에 이르렀고 철로 만든 공예품이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만큼 발전하였다.

중세

중세에는 성당건축물과 더불어 금속공예가 크게 발전하였다.

성당의 문짝, 세례반(洗禮盤), 성당종, '독수리 성서대'라 불리는 성서 받침대, 성찬배, 복음서의 표지, 사제의 지팡이 등이 다양한 기법과 재료로 만들어졌다. 6세기 영국에서는 금속표면을 파낸 후 유리질을 넣는 방법과 색채가 화려한 기법들이 개발되었다.

비잔틴 양식은 고대양식과 동양의 요소를 융합하여 9~12세기말 사이에 생겨난 양식으로 판금·주조·다마스쿠스·누금세공(flilgree)·니엘로·칠보 등의 기법으로 종교적 용구 등 여러 공예품들이 제작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그리스계 이탈리아인들을 중심으로 사라센 양식과 기법을 모방한 다마스쿠스 상감이 유행했다.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장식적 청동제품은 없었으나 12세기 이후 만들어진 청동성당문은 독창성을 보여준다. 피렌체의 로렌초 기베르티문(門)은 뛰어난 청동주조기술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로 그 맥이 이어진다.

근세

16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북부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인물이나 동물상의 조각품들이 성행했으며 벤베누토 첼리니와 조반니 볼로냐는 가장 뛰어난 금속공예들로 금속공예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했다.

16세기 후반 신흥귀족계급의 출현으로 세속적 수요가 늘어나자 종래 수도원 중심의 공방은 폐쇄되고 수공예 길드의 조직을 강화하여 수주·제작·판매가 이루어졌다. 독일에서는 중세부터 18세기까지 철공기술이 중요시 되었으며 18세기말에는 고딕 양식으로 된 철문·철창 등이 많이 제작되었다. 특히 바로크 시대에는 기법상의 진보가 현저하게 이루어져 단철이나 주철을 재료로 자물쇠같은 소형부터 철문이나 철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만들어졌다.

프랑스에서는 리모주를 중심으로 금속공예가 발달하여 감실, 촛대, 사제의 지팡이, 경전의 표지 등과 같은 종교용구와 일상생활용품이 제작되었다.

13세기 리모주의 여러 공방은 공장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으며 여기에서 제작된 여러 금속제품들은 수출되었다. 칠보의 특수기법들이 이곳에서 개발되었는데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으며 루이 14세 때에는 예술진흥책에 의해 금속예술이 절정을 이루었다.

18세기에는 바로크의 장중함보다는 곡선이 많고 경쾌하며 화려한 로코코 양식이 유행했다. 많은 금속작가들은 루브르 궁전 안에 작업실을 갖고 왕실과 귀족을 위해 금속장식품들을 제작했다. 그중에는 금세공가와 가구사가 공동으로 제작한 귀금속 가구도 많다. 영국은 유럽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청동주조물이 발달했으며 성당철문 등의 세공술을 통해 철공예의 수준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부터 은식기의 제작이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일상생활용구들은 대량생산되었고 엄격한 각인제도를 통해 품질을 관리하였다.

산업혁명 이후 현대까지

1850년대 예술사상가이며 디자이너인 윌리엄 모리스는 조잡한 산업제품에 대한 반발로서 미술공예운동를 일으켰고 그 영향으로 금속공예에는 아르 누보라는 양식이 발생되었다.

대표적인 작가 르네 랄리크는 플리크아주르(Plique-à-jour)라는 반투명 칠보기술을 개발했으며 다양하고 섬세한 금속기술을 발전시켰다. 그는 동물·물고기·식물·곤충 등과 같은 자연을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아르 누보 형식으로 표현했다.

한편 러시아의 금속작가인 카를 파베르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정교한 금속공예품을 전유럽과 아시아 지역으로 전파했으며, 비잔틴·르네상스·로코코·바로크·러시아 고전주의 양식을 혼합하여 파베르제 양식이라는 뛰어난 금속공예기술을 이룩했다.

장신구·문방구류·실내소품 등 수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제작했는데 특히 〈부활절 달걀 Easter Egg〉이라는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에서는 그 지역의 독특한 생활환경을 배경으로 현대적 감각이 있는 은제품들의 제작에 성공하였다. 덴마크의 게오르그 옌센은 1904년 코펜하겐에서 금속공방을 시작한 이후 유럽 전역과 미국 등지에 은기와 은장신구를 수출하여 독특한 스칸디나비아 양식의 은제품을 세계에 소개했다.

그의 은기와 은장신구들은 값비싼 보석을 사용하거나 화려한 무늬로 장식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형태를 특징으로 하면서 준보석과 기초금속 등으로 새로운 실용미를 강조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전문디자이너를 기르기 위한 바우하우스가 생겼는데 새로운 산업디자인을 위한 기초과정으로 전통적 공예기법을 가르쳤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와 상업주의의 영향으로 금속공예의 실용적인 측면은 대량생산을 위한 산업디자인으로 흡수되고, 수공예적 측면은 작가의 예술활동 영역으로 변했다.

동양

동양에서는 BC 2500년경 인더스강 유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중국의 BC 1500~BC 300년경 청동기문화는 동양의 금속공예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로 도철무늬가 새겨진 정교한 청동기가 제작되었다.

또한 청동제기들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도끼·단검·활의 방아쇠·추·눈금자·거울 등도 제작되었다. 주·한대(周漢代:BC 221~AD 220) 사이에 들어서는 무기류의 재료가 청동에서 철제로 바뀌었고 일상용품도 철로 제작되었다. 10~14세기에 들어서는 작은 규모에서 30m 정도의 철탑들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을 통해 당시의 발달된 철제주조술을 알 수 있다.

전국시대에는 금을 이용한 금상감과 금도금 등의 기술이 발달했는데 금제대구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대(唐代:618~907)에는 페르시아에서 조금기법인 체이싱이 전해지면서 은기에 사실적인 문양들을 조각했다. 송대(宋代:960~1279)에는 정교한 장신구기법이 개발되었는데 머리장식물에는 화려한 꽃 모양이나 상서로운 상징물들을 부착했다.

명대(明代:1368~1644)에는 다시 은기의 제작이 활발해졌으며 고분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금구류 표면에는 용이나 공작 같은 형태가 장식되어 있다.

청대(淸代:1644~1912)의 공예품은 주로 금과 은으로 제작했으며 세선세공이 유행했다. 일본에서는 청동주조술보다 철제주조술이 발달했으며 12세기 겐페이[源平] 전투 이후 사무라이의 무구인 칼이 공예품의 중심을 이루었다.

야요이 시대[彌生時代:BC 250~AD 250]에 한국에서 금속기술이 전파되었으나 금·은제품은 별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나라 시대[柰良時代:710~784]에 이르러 중국의 영향으로 조금씩 금·은제품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금·은과 같은 귀금속 작업은 칼집이나 칼의 손잡이 부분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서 발전했다.

한국의 금속공예

우리나라의 금속공예는 크게 일상용품과 불교용품으로 나뉘며, 일상용품은 다시 금관·귀걸이·과대 등과 같은 고급 장신구류와 거울·기명(器皿)·장신구·촛대 등 생활전반에 필요한 생활용기로 나눌 수 있다.

거울은 청동기시대의 다뉴세문경을 비롯하여 무령왕릉의 수대경(獸帶鏡)과 금령총 출토의 백유경(百乳鏡) 등이 있고, 고려시대가 되면 누각인물과 36수경이 원형·화형(花形)·능화형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일상생활의 필요에 의해 제작된 기명은 발(鉢)·호(壺)·반(盤)·완(盌)·대합(大盒)·주전자·탁잔·촛대 등 종류는 다양하지만 특별한 장식없이 기능 위주로 만들어졌다.

고려시대까지는 청동제가 대부분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은과 놋쇠로 바뀌었다. 장신구의 특징은 장식기능과 신분적 위계 및 내세관과 관련된 상징적 기능 때문에 어느 것보다도 정교하고 화려하게 만들어졌다. 금과 은을 주로 사용했던 고분시대의 장신구는 관·귀걸이·목걸이·팔찌·반지·과대·비녀 등에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특히 관은 사용자의 권위나 신분을 상징하는 특수한 기능 때문에 최고급 재료를 사용했으며, 출자(出字)·녹각(鹿角)·초화(草花)형 입식에 영락(瓔珞)과 곡옥을 매달아 장식효과를 최대한 높였다.

고구려의 투각초화문금동관, 백제 무령왕릉의 투각금제관식, 고신라의 금관총·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금관이 대표적이다. 특히 서봉총 금관 위의 새 모양과 금은조익형 관식은 죽은이의 영혼을 새가 운반해준다고 믿었던 고대의 사후세계관과 관련있어 더욱 주목된다.

양산 부부총 금제굵은고리귀고리
양산 부부총 금제굵은고리귀고리

그밖에 귀걸이·목걸이·팔찌·반지 등도 고분시대의 중요한 장신구류로 꼽히지만 고려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비녀·떨잠·뒤꽂이 등 여성들의 머리장식용에 집중되었고 재료도 놋쇠·철제·옥 등으로 바뀌면서 일반화되었다.

불교공예품은 사원건축·불상·불화와 더불어 의식과 신앙생활에 필수적인 것이다.

(→ 불교미술)따라서 종교미술의 공통적 특징인 화려함과 기술적 정교함을 함께 갖추었으며, 기형 및 문양의 소재도 불교의 도상과 상징의 미에 부합하도록 만들어졌다. 그 종류는 크게 사찰용과 승려용으로 나뉘는데 사찰용에는 동종·금고(金鼓)·향완·정병(淨甁) 등이 있으며, 승려용은 요령(搖鈴)·경통·공예소탑 등으로 비교적 그 규모가 작다.

이 가운데 불교공예품을 대표하는 범종은 통일신라 이후 조선시대까지 현재 350구 이상 남아 있다. 특히 당당한 종신(鐘身)·용뉴(龍鈕)·음통·종견(鐘肩)·종구(鐘口)의 당초문양대, 9개씩 사방에 배치된 유두(乳頭), 비천과 당좌 등을 갖춘 신라시대 종양식은 중국·일본과 다를 뿐 아니라 조형적으로도 탁월하여 '한국종'이라는 학명을 부여받기도 했다.

725년에 만든 상원사동종과 771년의 성덕대왕신종이 가장 걸작으로 꼽힌다. 고려시대까지는 한국종의 기본형식이 유지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생략·간략화되면서 크게 변했다.

향완은 당초·연꽃·범자(梵字) 등을 은입사로 정교하게 새긴 고려시대의 표충사 소장품이 가장 뛰어나다. 그밖에 금고와 정병, 승려용의 각종 금속공예품들도 기본적으로 범종과 같은 흐름을 보이며, 조선시대 이후에는 제작은 물론 질적으로도 위축되었다. 1908년 이왕가(李王家)에서 이왕직미술품제작소를 설립하여 주전자·합·잔 등 정교한 은제품의 제작을 시도했으나, 1910년부터는 주도권이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 기형과 문양에서도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