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미술

불교미술

다른 표기 언어 佛敎美術

요약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숭배대상을 제작하여 예배하며 또 불교의식을 행하기 위하여 조각·회화·건축·공예와 같은 시각적인 형태로 표현한 미술.

목차

접기
  1. 전파와 형성
  2. 한국 불교미술의 변천

싯다르타 태자의 깨달음[成道] 이후 불교가 인도에서 전파되기 시작한 지 약 200여 년이 지나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이 불교중흥을 위하여 여러 불교 유적지에 세운 석조기둥의 정상에 부처의 가르침인 불법을 상징하는 수레바퀴[法輪]와 이 가르침이 사방에 전파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우주의 4개 강을 상징하는 동물(사자·코끼리·소·말)을 조각한 것이 현재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이른 불교미술이다.

선운사지장보살좌상
선운사지장보살좌상

초기의 불교미술은 이와 같이 부처의 일생과 관련되는 보리수·불족적(부처의 발자국)·법륜·연화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상징물로써 표현되었다. 그러나 점차 불교가 확산되면서 불교집단이 성립되어 불교의식이 행해짐에 따라 사원건축이 이루어졌고, 숭앙의 대상인 부처가 인간의 모습을 한 불상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중생을 교화할 목적으로 불교교리를 쉽게 그림으로 표현한 여러 가지 불화도 그려지게 되었다.

따라서 사원과 불상을 장식하고 불교의식을 올리기 위한 도구들이 필요하게 되면서 건축·조각·회화·공예 등 각 분야의 불교미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전파와 형성

불교미술은 인도의 쿠샨 왕조 때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여 굽타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며 그 이후 인도에서는 차차 쇠퇴되었다. 반면에 아시아 동쪽으로 전파된 불교미술은 발달했다. 북방경로는 중앙아시아 지방을 거쳐 중국으로 전해지고 다시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정착했으며, 남방경로로는 남해지방이나 동남 아시아 지역을 거쳐 중국 남부에 전파되었고 또다시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졌다.

이와 같이 인도의 불교미술은 전파되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특성을 수용하면서 발전했기 때문에 나라마다 특유의 불교미술이 성립되었다. 더욱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 이후 페르시아 지역을 통과하면서 이루어진 동·서 문물교류는 불교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쳐 국제적이면서도 지역적인 특성이 대폭 반영된 미술로 발전했다.

특히 헬레니즘 요소가 반영된 서역의 불교미술은 이란 미술의 장식성과 정교함, 인도 미술의 환미성에서 영향을 받는 한편, 토착 서역인(돌궐족)의 복식과 중국인의 엄격하면서도 완벽한 조형감도 결합되었다. 또한 당말에 이 지역을 지배했던 위구르족의 영향과 네팔·티베트의 밀교적인 요소까지 가미되어 다양하고 독특한 서역의 불교미술이 형성되었다. 중국에서는 인도와 서역의 불교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각 시대의 불교문화 수용의 성격에 따라 독자적이면서도 독특한 불교미술이 발전했다.

한국의 불교미술은 대체로 중국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으나 때로는 서역이나 인도와의 직접적인 교류도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불교가 전해진 시기는 삼국시대로 고구려에는 372년, 백제에는 384년에 전해졌고, 신라에서는 527년에 공인되었다. 이때 불교와 함께 불상과 경전이 들어오고 곧 초문사와 이불란사 등 여러 절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당시의 유물로 확인되는 구체적인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뚝섬에서 출토된 선정인의 금동불좌상은 5세기초 중국 북위시대의 상으로 추측되지만 고구려나 백제의 모방품일 가능성도 있다(→ 뚝섬출토금동불좌상). 또한 옛 고구려의 도읍지인 지안[集安]에서 발견된 장천1호분(5세기 후반)의 고분벽화에 불상예배도가 보이기는 하나 현존하는 삼국시대 초기 불상의 대부분은 6세기 이후의 것이므로 이때부터 그 윤곽을 알 수 있다.

한국 불교미술의 변천

삼국시대 불교미술의 흐름은 대체로 중국 불교미술의 발달과 변천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내용과 종류 및 표현양식에서 공통점이 발견되는 한편, 한국적인 특성이 가미되면서 발달했다.

삼국시대에는 특히 중국의 남북조시대 불교미술과 관련이 깊은데 대체로 고구려의 불상에는 북조(北朝)의 북위와 동위의 영향이 컸고, 백제는 남조(南朝) 가운데 양(梁)나라와의 밀접한 관계 유지로 인해 남조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삼국시대 말기에는 중국의 북제(北齊)에서 수대(隋代)에 걸친 불교미술의 영향을 받았는데 남아 있는 유물로 보아 고구려의 예는 적은 반면, 신라의 불교미술이 부각되었다.

고구려의 절터로는 1탑3금당(一塔三金堂)의 청암리사지(淸巖里寺址)와 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가 있고, 불상으로는 연가칠년명금동불입상(539 추정)과 같은 금동불상이 있어 초기적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백제의 불교건축으로는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와 5층석탑,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와 석탑이 유명하며, 불상으로는 부여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출토 납석제불상과 금동보살입상, 예산의 사면불, 태안과 서산의 마애삼존불 등이 대표적이다. 신라는 황룡사지(皇龍寺址)와 장육존상이 6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으나 그 유적지만 남아 있고, 불상은 대체로 7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서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 낭산의 삼체석불, 삼화령미륵삼존불 등이 있다.

이외에 독립된 상으로 크고 작은 금동불이 있는데 그중에 아직도 제작 국가에 대한 논쟁이 진행중인 대형 반가사유보살상이 삼국시대 불상의 걸작품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미술은 신라의 전통에 고구려와 백제의 미술이 수용되어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활발하게 전개된 당(唐)과의 문화교류 및 멀리 서역과 인도와의 접촉도 있어 불교문화의 융성기를 맞이했고, 가장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불교 교리의 발달에 따라 여러 종파가 성립되어 예배대상의 종류도 다양해졌고, 각지에 사원건축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는 절들이 별처럼 많이 널려 있고 기러기떼가 나는 것과 같다고 한 기록으로 대변된다. 사원건축은 2탑2금당(二塔二金堂)의 구조로 발전했는데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의 목탑지 2개와 감은사지(感恩寺址)의 두 탑이 있으며, 불국사(佛國寺)의 두 탑은 그 형태가 다른 것으로 유명하다. 불상으로는 7세기 후반의 군위석굴 아미타삼존불, 사천왕사지 출토 사천왕전, 황복사탑 출토 금제불상, 감은사지 전래의 석조아미타·미륵보살, 굴불사 사면석불 등이 있고 8세기 중엽 약 30년에 걸쳐 조성된 석굴암은 당시의 불교건축 기술과 조각양식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고려시대에도 불교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후원하여 불교미술이 발달했는데 강원도·경기도·충청도 지역에 고려 초기의 사찰유적과 불상 등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정치세력 강화를 위해 지방호족들과 결탁하거나 인척관계를 맺은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석조불상의 크기가 커지고 철불이 많이 주조된 것도 하나의 변화로 볼 수 있다. 개성 주변에도 여러 사원건축지와 불탑·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본격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이다. 고려 초기에는 오대(五代)·요(遼)와의 불교문화 교류가 있었고 송(宋)과도 공식·비공식적으로 교류가 계속되었으며, 후기에는 원나라 왕실과의 밀접한 교류로 인하여 그 영향이 고려 불교미술에 나타난다(티베트 불교). 특히 원의 왕실의 라마 불교신앙은 고려 후기 불상이나 불화에 그 요소가 반영되어 장식적이 되고, 도상면에서도 새로운 불상형식을 만들어내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경천사10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국보 제86호)은 원의 공장(工匠)이 와서 제작했다고 하며 그 전통은 조선 초기의 원각사10층석탑(圓覺寺十層石塔:국보 제2호)으로 이어졌다. 불교공예 역시 고려시대의 유물이 많은데,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동종·금고와 같은 예, 금강저·금강령과 같은 법구(法具), 향로(香爐)·정병 같은 공양구들은 정교한 주조기법을 보여준다. 특히 정병이나 향로에 보이는 은입사(銀入絲) 기법은 화려한 무늬장식을 위한 특이한 고안으로 고려의 나전칠기와 고려청자 상감기법과 더불어 한국의 독특한 공예기법을 대표한다.

시대에 따라 그 시대 특유의 불교미술이 발달하듯이 조선시대의 불교미술은 억불숭유정책과 더불어 불상조성에 국가 차원의 후원이 많이 감소되어 우수한 조각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개인적인 목적이나 내세에 대한 일반적인 신앙의 전통은 계속 이어져서 소규모의 불상제작과 개인용 불감(佛龕) 같은 경우는 왕실발원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이외에도 사원건축과 불화제작이 계속되었으나 대부분의 현존 유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