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카

아소카

다른 표기 언어 Asoka 동의어 아육왕, 阿育王, 무우왕, 無憂王, 마우리아 왕조 제 3대 왕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BC 238(?), 인도
국적 인도

요약 아소카는 인도 남부를 제외한 인도 전역을 통일했다. 불교를 장려하며 불교의 자비와 비폭력의 정신을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칼링가국 정복전쟁 때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이후 무력 정복을 포기하고 불교에 귀의했다. 비폭력과 사회 윤리에 기초를 둔 다르마에 따라 살며 사회적·도덕적 덕목들을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하였다. 다르마의 사절이라는 고위 관리들을 임명하여 어디서나 백성들의 모든 고통을 구제해주며 여자, 변경지역의 주민, 인접한 민족들, 그리고 다양한 종교 공동체의 요구들을 보살피도록 했다. 또한 수많은 불교의 탑과 사원, 그리고 종교적 교리를 새겨놓은 석주들을 세웠으며, 해외 포교단을 원조했다. 이 덕분에 특정 지역에 한정된 소규모 종파에 불과했던 불교가 인도 전역과 국경 너머로까지 퍼지게 되었다.

아소카(Asoka)
아소카(Asoka)

한자 문화권에서는 아육왕(阿育王)으로 표기한다.

치세 동안 불교 장려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인도 전역에 불교가 전파되도록 했다. 동부 해안의 칼링가국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정복전에서 승리한 이후 무력 정복을 포기하고 그 대신 비폭력과 사회 윤리에 기초를 둔 '다르마(dharma:올바른 삶의 원리)에 의한 정복'이란 정책을 폈다(마우리아 제국). 자신의 가르침과 사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아소카는 구두 포고뿐만 아니라 마애(磨崖)와 석주(石柱)에 그것을 새겨 적절한 장소에 세워두는 방법을 썼다.

칼링가(Kalinga)
칼링가(Kalinga)

사르나트에서 발굴된 석주 주두(柱頭)의 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장(國章)이 되었으며, 바위 조칙(詔勅), 석주 조칙이라고 불리는 이들 명문(銘文)은 대부분 아소카 치세 동안 일어난 여러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그의 사상과 활동이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아소카의 생애와 업적을 알 수 있다.

아소카 자신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는 즉위한 지 8년째 되던 해에 칼링가국(지금의 오리사 주)을 정복했다.

전쟁으로 패전국의 백성이 겪는 고통을 본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무력 정복을 포기했다. 그가 불교를 접하고 믿게 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불교의 영향과 그 자신의 추진력있는 성격에 의해 아소카는 다르마에 따라 살며 자기 백성과 모든 인류에게 봉사하기로 결심했다. 아소카가 반복해서 밝힌 것처럼 그는 다르마를 통해서 정직, 진실성, 동정심, 자비, 자선, 비폭력, 모든 사람에 대한 인정있는 행동, '죄 짓지 않고 선행을 쌓는 일', 검약, 무탐욕, 불살생 등과 같은 사회적·도덕적 덕목들의 철저한 실천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특정 종교 교리나 숭배 양식, 그리고 어떠한 주장도 말하지 않았다. 또한 같은 신도끼리만 불교에 대해 말했을 뿐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않았다. 모든 종파에 대해 각기의 교리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고 존중해주었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그들에게 '내면의 가치를 함양하는 데' 스스로 노력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다른 종파의 신조를 존경하고 그들의 좋은 점을 칭찬하도록 권고했으며, 다른 이들의 관점에 대해 적의를 품은 비판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다르마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아소카는 농촌의 백성들을 주기적으로 찾아가서 다르마를 설파하고 그들의 고통을 구제하려고 했다.

고관들에게도 그들의 직책상 업무 외에 이와 같은 일들을 하도록 명령했다. 아소카는 관리들에게 끊임없이 일반 백성들의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살펴보고 신속하고 공정하게 정의를 행하라고 권고했다. '다르마의 사절(使節)'이라는 고위 관리들을 특별히 임명하여 백성들에게 다르마 사업을 장려하고 어디서나 눈에 보이는 백성들의 모든 고통을 구제해주며 여자, 변경지역의 주민, 인접한 민족들, 그리고 다양한 종교 공동체의 고유한 요구들을 보살피도록 했다.

공공복지에 관한 문제들은 언제든지 그에게 보고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이 추구하는 유일한 영광은 다르마의 길에 따라 자기 백성을 인도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의 비문을 읽은 사람들은 백성을 위하려는 그의 진지한 열정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는 명령보다는 백성들을 설득함으로써 더욱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아소카는 말했다.

공공사업도 많이 벌여 병원과 가축병원을 세우고, 의약품을 공급했으며, 가로수와 과수를 심고 우물을 파고 분수와 휴게소를 세웠다.

백성이 해이해지는 것과 동물학대를 막기 위해 법령을 만들었다. 아소카의 죽음과 함께 마우리아 제국은 분열되고 그의 사업은 중단되었다. 그가 성취하려던 목표와 그가 품었던 높은 이상에 의해 아소카는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다.

불교에 대한 아소카의 공헌은 더욱 영속적이었다. 수많은 탑과 사원, 그리고 종교적 교리에 대한 단상들을 새겨놓은 많은 석주들을 세웠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세운 불탑은 8만 4,000기이다. 그는 교단(불교의 종교 공동체)의 분열을 억제하는 강력한 정책을 썼고 신도들의 경전 학습과정을 정했다.

실론의 연대기인 〈마하방사 Mahāvaṃsa〉에 기록된 전승에 따르면 교단에서 해외로 포교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아소카는 이를 열렬히 원조했고 자신의 아들과 딸을 실론의 포교사로 보냈다. 당시까지만 해도 특정 지역에 한정된 소규모 종파에 불과했던 불교가 인도 전역에 퍼지고 곧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까지 전파된 것은 바로 아소카의 후원 때문이었다. 아소카를 이끌었던 정신을 잘 보여준 예문을 하나 들어본다. "모든 사람들은 나의 자식들이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 이 세상과 저 세상의 모든 행복과 건강을 가져다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