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미술

고려미술

다른 표기 언어 高麗美術

요약 918~1392년까지 지속된 고려시대미술.

목차

접기
  1. 고려의 회화
  2. 고려의 서예
  3. 고려의 조각
  4. 고려의 건축
  5. 고려의 공예

통일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여 중국의 송·요·금·원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양식과 특색을 형성하는 등 한국미술사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고려미술은 특히 귀족적 아취와 미의식을 배경으로 불교미술과 청자 등에서 뛰어난 기량과 창의성을 발휘했으며, 유교적 이념과 한문학적 교양을 갖춘 지식계층에 의해 감상의 성격을 지닌 일반회화가 대두되어 이 방면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고려의 회화

고려시대 회화는 일반회화와 불화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일반회화는 왕권의 안정과 문신귀족체제의 확립에 따라 문운이 극성을 부리던 문종대(文宗:1047~83)에 이르러 왕공문신들의 한묵풍류(翰墨風流) 취향에 힘입어 여기적(餘技的) 문인화가의 출현과 감상화의 본격적인 대두 등 새로운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이 시기를 통해 전래되기 시작했던 북송의 그림과 회화사조의 자극을 받으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고려 중기에 곽희 등의 북송대 화풍과 문인화론이 유입되어 질적인 변화를 초래하였으며 도화원의 설립과 이영(李寧)을 비롯한 화원들의 활약, 그리고 명승명소도(名勝名所圖)계열의 실경산수화 전통이 형성되었다.

무신집권기에 이르러 일반회화는 새로운 문화담당층으로 등장한 문사지식계층의 교양과 교제수단의 하나로 정착되면서 그 기반과 성격이 보다 공고해졌다. 또한 이들을 통하여 소식(蘇軾)을 중심으로 강조된 북송대의 문인화론과 묵죽 등 문인취향의 화목이 뿌리를 내렸다. 소상팔경도와 같은 수묵풍이상산수의 성향과 선승화가들의 활동과 수묵선종화가 대두되기도 하였다.

원(元)의 간섭기인 말기에는 그 이전에 형성된 토대 위에서 조맹부(趙孟頫)의 화풍을 비롯한 새로운 원대의 양식이 유입되어 보다 다양하고 심화된 모습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조선 초기로 이어져 본격적인 일반회화 발달의 근간을 이루었다.

불교회화고려시대 불교미술의 핵심분야로 개국 초기부터 활발하게 제작되었지만, 일본을 비롯한 국내외에 전하고 있는 사경화를 제외한 본격적인 작품 110여 점은 거의 대부분 14세기에 그려진 것이다. 이들 현존 불화들은 아미타여래도·관음보살도·지장보살도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당시 사찰중수기의 대부분이 미타전·관음전·지장전이었던 점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극락왕생을 비롯한 수복 등 미래의 안락과 현세의 평안을 기구하는 신앙에 배경을 둔 것이다.

독특한 도상과 기법을 창안한 고려불화는 뛰어난 사실력과 세련된 미의식을 통해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어두운 갈색 비단 바탕에 주(朱)·녹청(綠靑)·군청(群靑)의 3색과 흰색 및 금니(金泥)의 밝고 호화로운 안료를 사용하여, 화사하면서도 은은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이루어낸 채색법은 노란색과 맑은 황갈색, 코발트색을 주로 사용했던 중국과 일본 회화와는 구분되는 특색으로 이 시기 고려불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대변해준다. 이밖에도 고려불화는 섬려한 필치와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형상, 정교한 문양, 삼존도·구존도와 같은 예배용 존상화에서의 2단구도 등을 특징으로 하며, 이러한 궁정양식은 14세기 중엽경을 고비로 점차 형식화되었다.

고려의 서예

통일신라시대를 통해 크게 대두되었던 서예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지식인들의 교양적 기능의 하나로 정착되었으며, 서사를 전문으로 하는 서학박사를 비롯한 전업적 이원의 양성 등으로 서법의 융성이 촉진되었다. 초기에는 본격적인 묵적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으나 비갈 등의 금석을 통해 볼 때 방정한 구양순체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중기에는 문화적 번영을 누리면서 보다 우미한 왕희지체가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대감국사 탄연(坦然:1069~1118)은 왕희지체에 토대를 두고 사경풍의 필법 등을 가미하여 전아하고 유려한 새로운 서법을 창안하여 당대 최고의 서가로 손꼽혔다.

후기인 무인집권기를 통해 서예는 일반회화와 마찬가지로 지식층의 교양기능의 하나로 널리 성행했으며, 서체는 탄연체의 영향이 지속되다 점차 안진경체의 장중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말기에는 원과의 교섭을 통해 조맹부의 송설체가 새롭게 유입되어 성행하면서 이암(李嵓) 등의 명필을 배출시켰고, 이러한 전통은 조선 초기로 계승되어 1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고려의 조각

능묘조각과 하회탈 등의 나무조각도 제작되었지만 대종을 이루었던 것은 불교조각이다. 불교조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계승하면서 오대·송·요·원 등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특징을 보였다. 초기에는 후삼국 분열의 여파로 지방에 따라 지역성이 강한 불상들이 대두하고, 거불조각이 성행했다. 그리고 도상적으로 석굴암본존상을 모델로 한 철불들이 다수 제작되었으며, 양식은 사실적 작품에 토대를 두고 다소 도식화된 경향을 보였다.

석불상과 마애불상에서는 주로 단순화와 세부의 생략으로 소박하고 초솔한 느낌을 자아내는 토속적인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후기에는 원의 영향을 받은 장식적이고 이국적인 모습의 보살상들이 새롭게 대두되었으며 기존의 불상양식도 단정·우아한 형태로 변모되었다. 이밖에 나한상과 신도들의 집안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불감 등에도 고려 불교조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고려의 건축

고려의 궁궐건축과 사찰건축, 주거건축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발전했는데, 중기에 이르러 중국 강남지방에서 발달된 목조건축의 주심포양식이 유입되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양식의 건물은 두공의 출목이 5출목이나 되는 큰 규모로 건립되었으나, 고려에서는 그 요소를 부분적으로 도입하여 재래의 목조건축에 부가함으로써 원류와는 다른 한국적 주심포양식을 형성했다. 봉정사 극락전은 이 신양식 도입의 과도기적인 현상을 보여주는 건축이며,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비로소 정착되어 세부적인 변화를 일으키면서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걸쳐 성행했다.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그리고 말기에는 새로운 다포양식이 전래되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와 중기를 통해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주류를 이루었다. 석탑은 초기에 신라양식을 계승했으나 점차 고준한 형태로 변했으며, 송과 원의 영향으로 6각탑과 8각탑 등이 대두했다.

이밖에 부도에서도 뛰어난 예가 남아 있다.

고려의 공예

고려시대의 공예는 각 분야에 걸쳐 탁월한 기량과 독창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도자기는 그중에서도 더욱 두드러졌는데, 특히 청자는 세계 최고의 중국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뛰어났다. 9세기경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청자는 12세기에 이르러 심오한 비색(翡色) 순청자의 절정기를 맞이했고 또 독창적인 상감청자를 개발했다.

12세기에는 중국보다 앞서 산화동(酸化銅)을 이용한 진사기법(辰沙技法)을 응용하여 고려도자의 우수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청자는 13세기 이후 점차 형식화되기 시작했으며 기형은 광구(廣口)의 편병(扁甁), 간지명을 넣은 대접·접시 등이 만들어졌으나 태토에는 잡물이 많이 섞이고 형태도 투박해졌다. 그리고 환원번조(還元燔造)가 어려워지면서 산화·환원이 동시에 일어나 색깔이 황갈색조로 변해갔으며, 문양은 양식화되어 14세기에는 거의 인화문으로 바뀌면서 분청사기로 이행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고려시대에는 백자와 흑유·천목유(天目釉) 등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가 제작되기도 했다.

금속공예는 범종·향로·정병(淨甁)·반자(飯子)·금강령(金剛鈴)·오고령(五鈷鈴)·금동탑·금강저·경통(經筒) 등 전 시대에 비해 다양하고 정교·치밀한 불구류(佛具類)가 제작되었다. 생활용구로는 금은입사기법으로 시문(施紋)된 각종 장신구와 함께 동경이 대종을 이루었다.

특히 동경은 고려경으로 지칭될 정도로 많은 종류와 양이 알려져 있다.

목칠공예는 신라 이래의 전통을 이은 나전칠기가 발달하여 독창적인 무늬와 복채기법(伏彩技法)과 정교한 솜씨를 발휘했으며, 원으로부터 주문을 받았을 정도로 높이 평가되었다. 염직공예도 14세기경에 이르러 중국에 앞서는 기술적 실력을 갖추었으며 특히 모시포·화문저포·발이내포 등은 당시 뛰어났던 고려의 직조술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불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