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묘조각

능묘조각

다른 표기 언어 陵墓彫刻 동의어 능묘석물, 묘식조각

요약 을 보호하고 장엄하게 하기 위해 그 주위에 배치한 장식물.

외호석물과 능묘 입구에 양쪽으로 배치된 문무석인·석수·석상·췌표석 등을 말한다. 능묘석물·묘식조각이라고도 부른다.

능묘조각
능묘조각
능묘조각
능묘조각
능묘조각
능묘조각

원래는 황제나 왕의 능에만 설치하는 것으로 특히 석인·석수의 수를 가지고 묘주의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와 같이 능묘 주위에 석조상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 전한시대부터 시작되어 후한시대에 이르러 일반화되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예는 전한 무제 때 장군인 곽거병의 묘 앞에 있는 흉노를 밟고 있는 석마 등의 석수상과 산둥 성[山東省] 취푸 현[曲阜縣]에서 출토된 후한 요안태수 묘 앞의 1쌍의 석인상이다. 특히 석인의 가슴에 새겨진 '한고요안태수경군정장'과 '부문지졸'이라는 명문은 묘 앞의 수호를 맡고 있는 석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밖에 〈수경주 水經注〉라는 문헌에도 후한시대의 석인·석수의 예가 몇 개 알려져 있다.

대개 석인은 수에 제한이 있어서 왕릉에는 10쌍을 마주 보게 배치하지만 왕족이나 신하의 묘에는 1쌍을 세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 형상은 왕릉을 수호하던 수문장의 모습에서 점차 관(冠)을 쓰고 칼을 쥔 문관과 무관을 본뜬 문무석인으로 변했다. 석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석사자는 당·송대까지는 왕릉에만 한정하여 1쌍을 세우고, 왕족이나 신하의 묘에는 석호나 석양 등으로 장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당(唐) 제도를 따라 대체로 왕릉에만 석조 조각상을 세웠는데 석인은 관검형의 모습으로 마주 서 있고 그 옆에 호인형의 수문장 1쌍을 첨가한 것이 특징이다. 석수는 사자가 대부분이며 특히 능묘 주위의 호석에 새겨진 무복을 입은 십이지상은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것이다. 능묘조각으로 잘 알려진 예로는 경주지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김유신 묘를 비롯하여 성덕왕릉·원성왕릉(일명 괘릉)·흥덕왕릉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능침제도가 무너지면서 태조의 현릉에는 능묘조각 중 십이지상과 무석인이 사라지고 문석인 1쌍만 남아 있다. 조각기법도 이전의 볼륨감있는 사실적인 신체묘사에서 점차 형식화와 도식화의 과정을 거쳐 극히 간략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뒤 14세기 중엽 충목왕의 명릉에서 능침제도가 다시 정비되어 개성 근교에 있는 14세기말 공민왕의 현릉과 그 왕비 노국공주의 정릉에서는 호석에 구름무늬와 인물상이 조각되고 능묘 주위로 문무석인과 석사자·석양이 1쌍씩 배치되었다. 이 공민왕릉의 능침제도는 조선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서 현재 서울 근교의 여러 왕릉에 많은 석조물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능묘조각은 비(非)불교 조각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작연대를 대체로 알 수 있어 우리나라의 능침제도와 함께 석조 조각양식의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