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연

탄연

다른 표기 언어 坦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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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070(문종 24)
사망 1159(의종 13)
국적 고려, 한국

요약 고려 중기 선종을 부흥시키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8,9세에 글을 읽고 시를 지었고, 13세에 6경의 내용을 이해했다. 15세에 명경과에 합격하고, 궁중에 들어가 후일 예종이 된 세자를 가르쳤다. 19세에 궁중을 몰래 나와 개성 북쪽 안적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뒤 광명사로 옮겨가 혜소국사에게 선을 배웠다. 1104년 대선에 합격했고, 1106년 대사, 1108년 중대사, 1114년 삼중대사가 되면서 법복을 하사받았다. 1117년 선암사 주지가 되었고, 1120년 선사가 되었다. 1127년 보리연사 주지가 되었고, 1131년 대선사로 제수 받을 때 금란가사를 하사받았다. 1135년 보제사 제석원 주지 겸 영원사 주지, 1139년 광명사 주지가 되었다. 1147년 진주 단속사로 은퇴하여 제자들을 양성했다.

속성은 손씨(孫氏). 호는 묵암(默庵). 경상남도 밀양 출신이다.

탄연
탄연

아버지는 교위 숙(肅)이며, 어머니는 안씨(安氏)이다. 8, 9세에 글을 읽고 시를 지었으며, 또한 글씨를 잘 썼다. 13세에 이미 6경의 내용을 이해했다. 15세에 명경과에 합격하고, 궁중에 들어가 후일 예종이 된 세자를 가르쳤다. 19세에 궁중을 몰래 나와 개성 북쪽 안적사(安寂寺)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뒤 광명사로 옮겨가 사굴산파의 혜소국사(慧炤國師)에게서 선을 배워 인정을 받았다. 이후 사방을 돌아다니며 선을 닦았으나, 노모를 봉양해야 했기 때문에 멀리 가지는 않았다. 1104년(숙종 9) 대선에 합격했으며, 왕명으로 중원(中原) 의림사(義林寺)의 주지를 지냈다. 1106년(예종 1) 대사, 1108년 중대사(重大師)가 되었으며, 1114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면서 법복을 하사받았다. 1117년 선암사(禪巖寺) 주지가 되었으며 1120년 선사(禪師)가 되었다. 1122년 인종으로부터 첨수가사(添繡袈裟)를 하사받았으며, 1127년(인종 5) 보리연사(菩提淵寺) 주지가 되었다. 1128년 법회를 개최한 이후로 보리연사가 위치한 산에 있던 많은 뱀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1131년 대선사로 제수받을 때 금란가사(金襴袈裟)를 하사받았다. 1135년 보제사 제석원(帝釋院) 주지 겸 영원사(瑩原寺) 주지가 되었다. 1137년 다시 서울로 불려왔으며 1139년 광명사 주지가 되었다. 이후 나라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왕의 자문에 응했으며, 1145년 마침내 왕사(王師)가 되었다. 1147년(의종 1) 진주 단속사로 은퇴하여 제자들을 양성하고 종풍을 크게 떨쳤다.

탄연은 당시 거사로서 귀족불교의 성향을 띠고 있던 이자현(李資玄)의 문하에서 〈능엄경 楞嚴經〉에 근거한 선을 공부했다. 또한 일찍이 자신이 지은 〈사위의송 四威儀頌〉·〈상당어구 上堂語句〉를 송나라 개심(介諶)에게 보내어 인정을 받았으며, 이때 개심의 제자인 계환·도응(道膺) 등과도 서신을 통해 도우가 될 것을 약속했는데, 이들은 모두 송대 임제종 황룡파(黃龍派) 승려들이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조계종 승려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특히 정통 임제종 승려를 자처하여 고려 중기 선종을 부흥시키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탄연
탄연

한편 탄연은 서예에도 능했다. 특히 왕희지체를 잘 썼는데, 청평 문수원(文殊院) 중수비와 예천 복룡사비 및 삼각산 승가사 중수비는 모두 그의 글씨이다. 저서로는 시문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으며, 〈삼각산문수사시 三角山文殊寺詩〉 등의 수 편이 〈동문선 東文選〉에 전해진다. 제자로는 연잠(淵湛)이 있고, 국사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대감(大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