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미술

통일신라미술

다른 표기 언어 統一新羅美術

요약 통일신라시대의 회화·건축·공예·조각 미술.

목차

접기
  1. 건축
  2. 공예
  3. 조각
  4. 회화

고구려·백제·신라 미술의 전통 위에 새로 수용된 중국 당나라 및 인도, 서역과의 문물교류로 미술 발전에 있어서 최전성기를 맞이했으며, 가장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을 띠었다. 특히 불교문화가 성행하여 의상·원효 등에 의해 불교교리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여러 종파가 성립되었고 다양한 예배대상이 조성되었다. 더욱이 〈삼국유사〉에 사원들이 별처럼 건립되고 탑들이 기러기떼처럼 세워졌다는 기록은 당시에 융성했던 불교문화의 양상을 잘 알려준다.

쌍봉사철감선사탑
쌍봉사철감선사탑

건축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으로는 궁궐 및 사원·탑·부도 등을 들 수 있다.

〈삼국사기〉 권7 문무왕조(文武王條)에 "674년(문무왕 14) 궁내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기이한 동물을 길렀으며, 679년에는 궁궐을 중수했다"라고 되어 있다. 기록에 보이는 이 궁궐은 현재 신라의 동궁지(東宮址)로 추정되는 안압지(雁鴨池) 옆에 있었던 임해전(臨海殿)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밖에도 문헌에 보이는 궁궐의 이름으로는 강무전(講武殿 : 677)·숭례전(崇禮殿 : 687)·서란전(瑞蘭殿 : 801)·창신궁(創新宮 : 717)·영창궁(永昌宮 : 727)·영명신궁(永明新宮 : 823)·평의전(平議殿 : 812)·월지궁(月池宮 : 823) 등이 있다.

현재 안압지와 임해전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발굴·조사되어 당시 궁궐건축의 규모와 화려했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목조건축의 양식은 〈삼국사기〉 권33 옥사조(屋舍條)에 의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없고 다만 안압지에서 출토된 건축의 공포 부재 및 서까래 밑에 달았던 부연과 각종 장식금구만 전한다. 또한 호국불교사상에 의해 사천왕사(四天王寺)·감은사(感恩寺)·불국사와 같은 왕실 발원의 사찰을 비롯하여 부석사·망덕사·화엄사·동화사·해인사·범어사·실상사·보림사 등 많은 절이 건립되었으나 초석 이외에는 남아 있는 유물이 없어 체계적인 양식 규명이 어려운 실정이다(불교건축). 가람배치는 삼국시대의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에서 금당 앞 좌우에 2개의 탑을 세우고 남북축선에는 남쪽에서부터 중문·금당·강당을 배치한 다음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린 이탑일금당식(二塔一金堂式)으로 변했다.

특히 고선사(高仙寺)는 서쪽에 회랑에 둘러싸인 탑원(塔院)과 동쪽에 금당을 중심으로 중문에서 강당 좌우 건물에 달하는 회랑을 돌린 금당원(金堂院)을 나란히 배치한 특이한 가람구조이다. 탑의 경우 사천왕사(679)와 망덕사에는 목조로 된 쌍탑이 건립되었으나 이후 대부분 석탑으로 바뀌었으며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682)은 현존하는 석조 쌍탑의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 같이 양쪽이 다른 형태로 되어 있는 예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삼국시대의 목탑과 전탑을 서로 융합시켜 새로운 형식의 방형(方形) 석탑이 크게 유행했다. 그 형태는 2중 기단 위에 3층 또는 5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놓여 있고 기단부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표현되어 있으며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으로 되어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감은사지 동·서3층석탑을 비롯하여 고선사지3층석탑, 황복사지3층석탑, 불국사3층석탑 등이 있다. 9세기에는 탑의 기단이나 탑신부 표면에 안상(眼象)이나 사천왕·인왕·팔부중·십이지상 등 불교수호의 신장상(神將像)을 장식했는데 원원사지(遠願寺址) 동·서 3층석탑, 월성장항리서5층석탑, 회엄사서5층석탑, 진전사지3층석탑, 선림원지3층석탑 등이 유명하다.

특이한 형태의 석탑으로 정혜사지(淨惠寺址)13층석탑과 불국사다보탑이 있으며 상층기단의 우주 대신 네모퉁이에 각각 사자(獅子)를 배치한 화엄사4사자3층석탑 등 이형(異形) 석탑도 등장하여 그 전통이 고려시대에까지 이어졌다. 또한 통일신라 말기에는 석탑의 2중기단이 단층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경주 남산용장사지3층석탑, 봉암사3층석탑, 화엄사동5층석탑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석탑 형식을 기본적으로 따르면서 표면을 전탑과 같이 가공하여 축조한 모전석탑(模塼石塔)이 많이 건립되어 현재 의성탑리5층석탑, 선산죽장사지(竹杖寺址)5층석탑, 경주서악리3층석탑, 월남사지3층석탑 등이 안동을 비롯한 죽령지역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불교가 선종(禪宗)으로 발전하면서 고승의 묘탑인 부도(浮屠)가 유행하기 시작하여 염거화상부도(844), 쌍봉사철감선사탑(868), 실상사홍척선사부도(875~880), 보림사보조선사부도(880) 등이 건립되었다.

기단·탑신·옥개석이 모두 팔각형으로 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특히 옥개석에는 당시의 목조건축 양식을 따른 서까래와 기왓골이 표현되었고, 기단이나 탑신부에는 불교의 여러 도상과 장식문양이 정교하게 조각된 경우가 많다.

공예

통일신라시대의 공예는 크게 불교공예와 토기로 나누어진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가 보편화되면서 무덤에 부장하는 풍습이 사라지고 대신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각종 불교공예와 탑 안에 봉안하는 사리장엄구가 유행했다. 특히 상원사동종(725)과 성덕대왕신종(771)은 형태나 규모에서 한국 종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문헌상으로는 〈삼국유사〉 권4 황룡사종조에 754년(경덕왕 13) 구리 49만 7,581근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밖에 실상사와 선림원지에서 발견된 동종은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다.

사리장엄구로서는 감은사지서3층석탑 사리구, 불국사3층석탑 사리구, 송림사5층석탑 사리구, 황복사지3층석탑 사리구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감은사지서3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구에 부착된 사천왕상과 주악상은 얼굴표현이나 복장, 악기 등에서 외래적인 요소도 보이지만 조각수법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불교조각의 사실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 감은사지서3층석탑내유물). 토기는 석실고분에서 출토된 토기와 장골용기로서의 골호, 안압지에서 출토된 일상생활용기 등이 있다.

석실고분에서는 부장용품인 고배를 비롯하여 장경호, 고신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유개합류가 많이 출토되었다. 고배는 잔에 비해 다리가 짧고 방형이나 원형의 작은 구멍 2개 또는 4개가 대칭으로 뚫려 있다. 장경호는 다리가 도자기의 굽과 같이 낮은 형태로 변했으며, 유개합류는 뚜껑에 보주형 또는 배형의 꼭지가 달려 있고 그릇 표면에는 권점무늬[卷點紋]와 반권점무늬가 음각 또는 압인되어 있다. 골호는 불교식 화장법으로 크게 유행했는데 그 형태는 굽이 매우 낮으며 보주형과 배형의 꼭지가 달린 반구형의 뚜껑이 덮혀 있다.

통일신라 초기에는 삼국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탑형 골호, 각선무늬[刻線紋] 골호, 돌대무늬[突帶紋] 골호 등이 많이 제작되었으나 8세기경에는 인화무늬[印花紋] 골호의 표면에 화판무늬[花瓣紋]·돗자리무늬·나뭇잎무늬·영락무늬·조수무늬[鳥獸紋] 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특히 인화문 골호에는 화려하게 장식할 목적으로 황갈 또는 황록의 연유계통의 유약을 주로 사용한 점이 주목된다. 이와 같이 석실고분 출토의 토기나 골호는 의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에 안압지를 비롯하여 미륵사지, 경주 해자 부근 건물자리 등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사용한 생활용기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안압지출토토기).

따라서 안압지에서 출토된 토기에는 완(盌)·접시[皿]·항아리[壺]·병 종류가 가장 많으며 토기로 된 벼루 또는 특이한 모양의 등잔·시루·풍로 등도 많이 출토되어 통일신라 토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안압지에서는 실생활과 관계가 깊은 금동제 사발·합·가위와 청동제 접시·대접·숟가락 등도 나왔는데 이러한 금속공예품은 일본 쇼소인[正倉院]에도 소장되어 있어 당시의 정교한 공예기술의 수준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한일간의 문화교류를 짐작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조각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은 삼국시대 불교조각의 전통을 바탕으로 중국 당나라와 서역 등 새로운 외래요소를 받아들이면서 발전했다(→ 불상). 종류는 크게 불교조각과 능묘조각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체로 명문이나 역사기록이 남아 있어 상의 제작연대나 명칭을 알 수 있는 예가 많다. 일반적으로 불교조각은 신체비례가 적당하고 얼굴의 세부표현이나 몸체의 양감 및 사실적인 옷주름 처리, 정교한 영락장식의 표현 등에서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불상은 대부분 경주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7세기 후반의 군위석굴 아미타삼존석불, 사천왕사지 출토 사천왕전, 황복사지탑 출토 금제불상 2구, 감산사지 출토 석조아미타불 및 미륵보살입상(719), 굴불사지 사면석불, 석굴암 불상군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불상들은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에서 발달한 당나라 불상양식이 신라적으로 수용·변형된 한국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특히 석굴암 불상군은 석굴 속에 불·보살·천인·나한들을 함께 조각하여 이상적인 불국토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종교적인 숭고미와 완벽한 조각기술은 예술의 극치를 이룬다.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면 전체적으로 금동불이 적어지고 신체표현에서는 양감이 줄어들면서 형식화되고 조각수법이 쇠퇴하는 반면 석굴암의 본존을 따르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불좌상형식과 철원 도피안사 및 장흥 보림사 불좌상으로 대표되는 지권인(智拳印)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등장하여 고려 초기까지 유행했다.

능묘조각은 무덤을 지키고 장엄하게 하기 위해 무덤 주위에 세운 것인데 문무석인·석수(石獸)·십이지상을 들 수 있다. 원래 황제나 왕의 능에만 설치하는 것으로 석인과 석수의 수를 가지고 묘주의 신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중엽에 중국 당나라 제도를 따라 왕릉에만 석조 조각상을 세웠는데 석인은 관검형으로 마주 서 있고 그 옆에 호인형(胡人形)의 수문장 1쌍을 첨가한 것이 특징이다.

석수는 사자 이외의 다른 동물은 많이 볼 수 없으며 특히 능묘 둘레의 호석에 새겨진 무복차림의 십이지상은 중국에서는 거의 보기 어려운 특이한 것이다(→ 십이지신상). 이 십이지상은 시간과 방위를 상징하는 신장상으로 주로 동물의 머리에 관복이나 갑옷을 입은 사람의 모습으로 의인화되어 표현되었으며 부조적인 조각표현에서 독립된 조각의 독특한 형상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김유신묘, 성덕왕릉, 원성왕릉(일명 괘릉), 흥덕왕릉의 십이지상이 있다.

회화

통일신라시대의 회화는 다른 분야의 미술과 마찬가지로 중국 당과의 빈번한 교섭을 통해 궁정 취미의 인물화와 청록산수화(靑綠山水畵), 그리고 불교의 융성에 따라 불교회화가 활발히 제작되고 유행했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이 거의 없다. 다만 기록상으로 경주 황룡사의 〈노송도 老松圖〉, 분황사의 〈관음보살상〉, 진주 단속사의 〈유마거사상 維摩居士像〉을 그린 솔거와 흥륜사의 〈보현보살상 普賢菩薩像〉을 그린 승려화가 정화(靖和)·홍계, 그리고 당나라에서 활약했던 장군 김충의(金忠義)의 이름만 전해지고 있다.

특히 황룡사에 그린 노송에는 종종 새들이 날아들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솔거는 청록산수 계통의 강한 채색을 사용해 사실적으로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통일신라 말기에 왕실에 설치되었던 채전(彩典)을 통해 화원들이 계속 활동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 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754~755, 국보 제196호)는 화엄경의 표장화로 파손이 심한 상태이나 경권 끝에 발문이 적혀 있어 사경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불교회화의 화풍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

경전 표면에는 화려한 모란무늬가 장식되어 있으며, 변상도의 불·보살상은 양감 있는 몸체에 균형잡힌 신체비례, 부드러운 곡선, 사실적인 옷주름 표현 등에서 8세기 중엽의 불교조각과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신라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