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건축

불교건축

다른 표기 언어 佛敎建築

요약 불사리(붓다의 유골)나 불상을 안치하고 제사를 지내거나 예불을 드리기 위해 만든 구조물.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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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도의 불교건축
  2. 스리랑카의 불교건축
  3. 인도네시아의 불교건축
  4. 캄보디아의 불교건축
  5. 미얀마의 불교건축
  6. 파키스탄의 불교건축
  7. 아프가니스탄의 불교건축
  8. 네팔의 불교건축
  9. 중국의 불교건축
  10. 일본의 불교건축
  11. 한국의 불교건축
불교건축물
불교건축물

설법을 하거나 승려가 거주하며 불교행사를 치르는 곳이기도 하다. 불교건축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생겨나 불교가 전해진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졌다. 불교건축은 크게 두 계통으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바다를 거쳐 동남 아시아로 전해진 인도 문화권의 건축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 아시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고유문화와 접목되고 한국과 일본 등지로 퍼져 중국문화권을 형성한 것이다.

건축양식은 각 지역의 전통적 요소와 얽혀 지역마다 특징이 서로 다르며 같은 지역에서도 시대에 따라 특징을 달리하며 발전 혹은 쇠퇴해왔다. 내용면에서는 탑·불당·강당·승방·식당·경장·종루·문랑·요사 등 종류가 많고, 재료면에서 목조·석조·전조로 나뉘며 석굴사원도 있다. 규모 또한 다양하나 대체로 일반 민가보다는 거창하며 왕의 궁궐처럼 웅장하고 때로는 그 이상 훌륭하게 지어져 불교신앙의 깊이를 말해준다.

인도의 불교건축

불교건축의 시초는 붓다가 생존하던 때(BC 5세기)부터 각지에 세워진 승원(僧院)이었으나 목조였으므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인도에서는 묘총(墓塚)을 스투파(stūpa)라고 부르는데 특히 불교에서 성행했다. 스투파는 붓다가 생존해 있을 당시부터 지어져 붓다가 입적한 뒤 8개국 왕이 각기 스투파를 만들고 붓다의 사리를 나누어 안치했다고 한다.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 시대(BC 3세기)에 이들 중 7개탑에서 불사리를 꺼내 8만 4,000개의 스투파에 재배분했다고 전한다.

그 수에 상관 없이 왕은 당연히 깊은 신앙심으로 인도 각지의 불탑 개수나 신축에 힘썼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아소카 왕이 축조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스투파 유적은 없다. 다만 아소카 왕이 불교의 성지에 표지로 세운 돌기둥 10여 개가 현존한다. 1개의 돌로 된 둥근 기둥 윗부분에 종 모양의 기둥으로 받친 사자 등을 탁월한 솜씨로 조각한 이 돌기둥은 공예로도 훌륭한 작품이다.

석탑으로는 BC 2세기에 만들어진 중인도 발후트의 스투파가 가장 오래된 것인데 몸통은 없어지고 부위 난간의 일부와 동문만 남아 있다.

BC 2세기에 만들어진 산치 대탑(제1스투파)은 잘 보존된 예로서 중시된다. 이 탑은 아소카 왕조 시대의 전탑(塼塔)을 중핵으로 하여 증수한 것으로, 기간 위에 반구형 복발(復鉢:탑신)을 만들고 위에 네모 반듯한 평두(平頭)를 놓고 정상에 산간(傘竿)을 세워 산개(傘蓋)를 얹었다. 주위의 난간이나 사방의 문 역시 석조로서 이들에 새겨진 조각은 당시 불탑이나 궁전 건축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인도 아말라바티의 스투파는 2세기에 증축된 것으로 산치 대탑보다 컸다고 하나 지금은 파괴되었고 정교한 조각을 지닌 난간 등의 잔석이 현존한다.

인도의 석굴은 불교에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나 중인도의 불교석굴은 BC 2세기부터 만들어졌다(석굴 사원). 굴 안에 스투파를 만들고 본존(本尊)으로서 제사를 지내는 차이티아 굴, 그리고 굴 안에 여러 개의 승방을 만들어놓은 비하라 굴의 2종류가 있다.

카룰리 석굴에는 1세기에 만든 목조 산개 스투파가 전해오고 있다. 굽타 왕조(4~6세기) 때는 힌두교가 융성해 불교는 활기를 잃은 듯했으나 미술작품 활동은 활발했다. 중인도에서는 붓다 유적과 그 유적 부근에 대가람이 세워졌고 서인도 등에서는 석굴이 많이 만들어졌다. 부다가야에는 붓다 성도의 금강보좌를 중심으로 한 대각사(大覺寺:대보리사)가 있다. 마우리아 시대에 생겨난 정사(精舍)는 일반적으로 대탑으로 불리는데 현존하는 것은 19세기에 개수된 누각건축이다. 날란다 가람은 다음의 파라 왕조(8~12세기)까지 불교교학의 중심을 이루었고 날란다승원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날란다승원대학
날란다승원대학

이 날란다 가람에서 많은 대탑이나 승원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아잔타의 석굴 중에서는 BC 1세기의 것도 있으나 대부분 굽타 왕조 때 만들어진 것이며 벽화의 우수성이 높이 평가된다. 파라 왕조 때는 불교가 힌두교에 밀려 갠지스 강 유역으로 쫓겨간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밀교가 성하면서 밀교상(密敎像) 제작이 두드러졌다.

이때 세워진 많은 사원 중에 비클라마시라 가람과 소마프라 가람이 유명하다. 전자는 밀교 최대의 승원대학으로서 1203년에 이슬람군이 이 사원을 불태우고 승려를 살해했다. 이 일을 보통 인도 불교의 멸망으로 본다. 소마프라 가람에서는 정사를 중심으로 비할 데 없이 큰 규모의 승원유적이 발굴되었다. 역시 규모가 큰 파하르플 유적에서는 중앙의 대사당과 사방에 일렬로 늘어선 소사당 177개 등이 발굴되었다.

스리랑카의 불교건축

스리랑카 섬에는 불교가 일찍 전해졌고 인도와는 달리 오늘날에도 불교신앙이 이어지고 있다. 1,000년 이상을 이어오는 고도 아누라다푸라와 9세기에 세워진 옛도시 폴로나루와를 중심으로 사원과 불교유적이 흩어져 있다.

아누라다푸라 부근의 사원은 역사가 길고 건축기법도 탁월한 것들이 많다. 탑신식 다가바(탑) 중 규모가 큰 것은 제타와나라마 사원의 탑, 아바야기리 사원의 탑이 있다. 역사가 오랜 것으로는 루앙베리 탑이 있다.

이 지역의 탑은 벽돌로 만든 것으로 중인도의 탑과 같은 모습인데 정상의 상륜 부분까지 벽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다소 변형되었으며, 탑신 사방으로 돌출부를 만들어 조각으로 장식했다. 또 탑 주위에는 난간 없이 여러 개의 돌기둥을 세웠고 사원 앞 층계 밑에 설치한 반원형 석판(월석이라고도 함)에 정교한 부조를 새긴 것이 있다.

폴로나루와에 있는 사원으로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제타와나라마 사원과 투파라마 사원이 있다. 제타와나라마 사원에는 벽돌로 만든 거대한 불입상이 있다.

골덴(Golden)사원. 담불라(Dambulla)에 위치
골덴(Golden)사원. 담불라(Dambulla)에 위치

인도네시아의 불교건축

인도의 문화가 인도네시아로 흘러들어간 것은 1세기 전후의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교미술 작품이 등장한 것은 중부 자바에서 발흥한 샤일렌드라 왕조(8~9세기) 때의 일이다. 인도 파라 왕조 시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자바에서 만들어진 작품에는 밀교의 요소가 농후하다. 또 힌두교도 동시에 유포되어 불교와 혼합되었다.

사원건축으로는 주로 스투파·찬디(본존을 안치한 사당)·승원을 들 수 있다. 중앙당 주변에 4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배치된 수많은 소사당이 있는 찬디 세브, 내부에 잘 만든 불상을 안치한 찬디 문두트와 보로부두르 등이 유명하며 모두 8세기말 전후의 건축으로 보인다. 보로부두르는 2중기단 위에 소사당을 늘어세운 방형단 5겹과 소스투파를 늘어세운 원형단 3겹을 쌓고 꼭대기에 커다란 종 모양의 스투파를 얹은 구조물로서 구상이 장대하다.

캄보디아의 불교건축

인도차이나 반도 남부에도 일찍부터 인도의 문화가 전해졌다. 크메르인이 세운 캄보디아에 볼 만한 건축이 세워진 것은 앙코르 왕국 이전 시대(크메르 이전 시대, 6~8세기)부터이다. 이 시대의 작품으로는 힌두교의 건축뿐이고 불교사원은 이후 앙코르 왕국 시대(크메르 시대, 9~15세기)에 나타났다. 힌두교가 주류이고 불교는 그 다음인 경우가 많았는데 지배자의 의사로 교파를 바꾸는 수도 있었다. 양

식면에서는 자바와 마찬가지로 남인도의 영향을 받아 벽돌이나 돌을 쌓아올려 만든 플라사트(고층탑형 사당)가 중심을 이루며, 둘러친 회랑의 4면 중앙에 고프람을 내고, 외굴로 둘러싼 1곽의 와트(사원)를 이루고 있다. 앙코르와트는 12세기에 수도 야쇼다라프라 중앙 큰 거리의 동쪽에 서향으로 지은 석조 대건축이다. 도랑을 둘러친 광대한 부지에 3중의 회랑이 있고 내정이 차례로 높아지면서 중심부에 사당이 솟아 있다.

전체 구성이나 세부장식도 뛰어나고 바깥 회랑 석벽의 부조는 특히 유명하다. 앙코르 와트는 본래 힌두교 비슈누파의 사원이었으나 후에 불교사원으로 바뀌었다. 바욘은 12세기말경 새로운 도시 앙코르톰의 중앙 십자대로 가운데에 동면하여 세운 절이며 사당의 인면탑이 유명하다.

미얀마의 불교건축

미얀마는 육로와 해로가 모두 인도와 가깝기 때문에 일찍부터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볼 만한 건축과 유적은 파간 왕조(11~13세기)의 수도 파간 근처에 있다. 미얀마의 불탑이나 사원은 일반적으로 파고다(미얀마어로는 '파야')라고 불리는데 여기에는 2종류가 있다. 벽돌로 만든 여러 층의 단 위에 종 모양의 탑신을 얹고 가운데에 불상 또는 사리를 안치하며 꼭대기에 원추형 상륜을 얹은 체디와, 외형은 이와 비슷하지만 정상부가 평면 방형 고탑형인 것이 있다.

전자의 예로는 파간의 민가라제디(13세기)가 있고 후자의 예로는 같은 곳의 아난다 사원(11세기)을 들 수 있다. 아난다 사원은 중앙에 평면 4각형의 주체부를 만들고 그 4면에 만든 작은 방에 각기 거대한 불상을 안치했다. 4개의 작은 방 앞에는 지붕이 달린 현관이 붙어 있다. 잘 알려진 양곤의 슈에다곤 파고다(세다곤 파야)는 18세기에 증축된 거대한 종 모양의 탑이며 금빛으로 빛난다.

레이큔세꺄(Laykyun Sekkya) 동상. 모니와에 위치
레이큔세꺄(Laykyun Sekkya) 동상. 모니와에 위치

파키스탄의 불교건축

파키스탄 북부, 옛 이름은 간다라인 지방에서 쿠샨 왕조(1~3세기)의 카니슈카 왕(2세기)을 중심으로 불교가 번성했다. 왕조의 수도 프루샤프라(지금의 페샤와르) 근처에는 이 시대의 불교유적이 많다.

19세기 이래 크고 작은 스투파와 많은 승방, 부속건물로 이루어진 상가라마(가람)가 발굴·조사되었다. 보존이 잘 된 소형 스투파를 보면 기단을 겹쳐 쌓아 높였고 산간을 길게 하여 산개 수를 늘렸으나 복발과 평두는 중인도 방식이다. 카니슈카 왕이 조성한 대탑으로 추정되는 페샤와르 근처의 유적에서는 커다란 정방형 기단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카니슈카 왕이 봉헌한 사리그릇도 출토되었다(→ 카니슈카 탑).

기단을 3중으로 보면 산티 대탑급의 복발식 탑으로 추정되지만, 5~6세기 중국의 인도 구법승의 견문록에 따르면 서역 제일이라는 '작리부도'의 탑신은 목조이고 높이가 4백 척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특이한 누각식 탑으로 해석된다.

아프가니스탄의 불교건축

예로부터 인도와 이란 두 문화권의 접점에 있으면서 멀리 헬레니즘 미술의 영향을 받은 아프가니스탄에도 역시 불교미술 작품이 있다. 황금 사리용기가 출토된 비마란 탑과 같은 2~3세기의 스투파 유적도 있지만 곳곳에 있는 4~5세기경의 석굴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중 힌두쿠시 산맥의 한 계곡에 있는 바미안 석굴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절벽에 조각된 53×35m의 불상과 4각형·8각형·원형 불당의 석굴, 벽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바미안 석굴은 1996~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던 탈레반에 의해 2001년 3월 폭파되어 원형을 거의 상실했다. 유네스코는 2003년 바미안 계곡 일대의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바미얀의 불상
바미얀의 불상

네팔의 불교건축

붓다의 탄생지가 있는 네팔에는 일찍부터 불교의 전통이 있었으나 지금은 티베트와의 왕래가 잦아 티베트 불교가 성행한다. 수도 부근의 파탄 시에 있는 5개의 스투파는 아소카 왕이 축조했으며, 스와얌부나트 사원의 대스투파는 BC 1세기의 것으로 전하나 분명하지는 않고 후세에 개축했다. 보드나트의 대스투파는 가장 크다. 모두 벽돌로 지었는데 복발은 반구형으로 저평하고, 평두의 4면에 눈썹과 눈을 나타내는 것이 특색이며, 꼭대기의 상륜은 보통 그렇듯이 둥근 것과 네모난 것이 있다. 또 힌두교나 불교 사원의 본당이 중국풍 목조층탑형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중국의 불교건축

중국 본토에 관해 말하기 전에 티베트 지방에 관해 약술하고자 한다.

티베트에서는 8세기경 북인도에서 전해진 밀교를 토대로 티베트 불교가 성립·번영했다. 이 지역의 옛 건축에 관해서는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최근의 조사로 원(元)대의 유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예를 들면 싸자청[薩加城]은 남사와 북사로 나뉘어 여러 층의 평평한 지붕의 승방이 줄지어 있었으며 성 안의 주민은 모두 승려로서, 정교일치의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또 하로성(夏魯城) 터 동남부에 있었던 하로사(夏魯寺)의 대전(大殿)은 중국식 구조의 목조건축으로, 유리지붕을 덮은 것으로 보아 분명히 본토의 영향을 보여준다.

중국 본토에서는 이미 1세기에 불교가 들어와 각지로 퍼져나갔다.

〈삼국지〉에 따르면 후한말(2세기말) 지금의 장쑤 성[江蘇省] 장두[江都]와 쉬저우[徐州] 사이의 윈차오[運漕]를 지배하여 거부가 된 작융(窄融)이 '부도(浮圖)의 사(祠)', 즉 불사를 짓고 금동불을 만든 후 동반구중(銅盤九重:相輪)을 얹은 중루(重樓)를 지었으며 각도 안에는 3,000여 명을 수용했다고 한다. 불상을 안치하는 당(堂), 상륜을 얹은 중루, 신자 다수를 수용하는 각도가 1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여러 채로 된 것인지 기법이 간결해서 알아보기 어렵지만, 이 부분에 관한 〈삼국지〉의 서술은 중국 불사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예이다.

상륜을 얹은 중루란 목조탑의 전신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들어서 사원의 수도 늘어났다. 그후로 서진(西晉)·동진과 남북조(南北朝), 수(隋)로 이어지는 각 시대 사원의 소장(消長)에 관한 기록으로 당(唐) 초기에 만들어진 〈변정론 辨正論〉에 따르면 서진에서는 뤄양[洛陽]·장안(長安)의 2경(京)에 180개, 동진에는 전국에 1,768개, 남조의 송(宋)에는 1,913개, 제(齊)에는 2,015개, 양(梁)에는 2,846개, 후양(後梁)에는 장링[江陵]에 108개, 진(陳)에는 1,232개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북조의 북위(北魏)와 서위에는 다수의 석굴사원과 국가의 대사원 47개, 귀족의 사원 839개, 서민의 사원 3만여 개, 북제(北齊)에는 황가(皇家)의 사원 43개, 북주(北周)에는 931개, 수에는 3,985개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불사의 조영(造營)은 북위 때 정점에 이른 듯하다. 윈강[雲崗]·룽먼[龍門]의 두 석굴에 투입된 막대한 정력을 보아도 이 점을 엿볼 수 있다.

특히 398년 북위의 도무제(道武帝)가 새 도읍지인 평성(平城:지금의 다퉁[大同])에서 조영하기 시작한 사원은 〈위서 魏書〉 석로지(釋老志)에 따르면 5층탑·기사굴산(耆闍崛山)·수미산전(須彌山殿)·강당·선당·사문좌(沙門座)를 갖추었다고 한다.

〈뤄양 가람기 洛陽伽藍記〉를 보면 5세기말부터 북위의 도읍이 된 뤄양에서는 왕후 이하 사람들이 다투어 사원을 지어 성 안팎에 1,000여 개의 사원을 헤아리게 되었다고 한다. 높은 탑으로는 경명사(景明寺)의 7층탑이 높이 100인(l), 요광사(瑤光寺) 이하 5개 사원의 5층탑은 높이가 각각 50장(丈) 정도였다고 하나 융닝 사[永寧寺]의 탑에는 미치지 못했다. 융닝사는 516년에 선제(先帝)의 황후가 창건한 절인데 그 탑은 목조 9층이며 탑신의 높이는 90장, 꼭대기에 10장의 상륜이 있었다고 한다.

상륜에는 30겹의 금반(金盤)이 있고 정상에 큰 보병(寶甁)을 실었다. 탑신의 높이가 90장이라면 상당히 높은 것이므로 49장이라는 일설을 따르면 대체로 130m 전후가 된다. 융닝사에는 탑 북쪽에 불전이 있고 주변에 누관(樓觀)·승방이 있으며 사역(寺域)을 둘러싼 축지(築地)에는 사방에 문을 냈다.

이로부터 5세기 전후에는 탑과 불전(佛殿)을 중심으로 하는 가람이 제도로서 이미 정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귀족의 저택을 희사해서 사찰을 만드는 예가 많았다. 이런 경우 전청(前廳)을 불전으로 만들고 후당(後堂)을 강당으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던 듯하며, 탑을 추가하고자 했다면 전청의 앞마당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앞에는 탑, 뒤에는 불전을 배치하는 가람 배치가 중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성립했다. 곧 중국의 전통적인 건축형태로 불사가 만들어졌고, 전해내려온 누각에 인도의 스투파에 기원을 둔 상륜이 추가되어 층탑이 생긴 것이다.

중국의 석굴사원은 인도의 석굴 조성방식이 서역을 거쳐 전해진 경로를 보여주며 실크로드에서 황허 강[黃河] 유역이 그 주요분포지를 이룬다.

서쪽지방에서는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의 키질 천불동과 쿠무투라 석굴이 유명하며 피할라 굴이 스투파나 불상을 예불하는 차이티야 굴보다 많다. 간쑤 성[甘肅省]의 둔황[敦煌] 천불동(千佛洞)은 366년에 개굴되었다고 전하며 굴의 수가 600개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둔황 석굴사원). 내부의 소상(塑像)이나 벽화는 북위시대부터 송대(宋代)에 걸친 것이 많다. 빙링 사[炳靈寺], 마이지 산[麥積山]의 두 석굴도 북위의 조상(造像)을 포함하고 있다. 산시 성[山西省]의 윈강 석굴은 460년경부터 개굴된 중국 최대의 석굴이다.

이 석굴에는 〈위서〉 석로지에 높이 70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거상을 비롯해서 약 10만 개의 조상이 있다. 톈룽 산[天龍山] 석굴은 동위시대에 시작된 것인데 그 우수성으로 이름이 높다. 허난 성[河南省]의 룽먼 석굴은 북위의 새 도읍 뤄양에서 500년경부터 열렸고 당대까지 계속해서 많은 굴이 만들어졌으므로 불상의 수는 약 10만 개를 헤아리나 이들 중 낡은 차이티아계 탑 모양의 방주(方柱)를 내부에 가지고 있는 굴은 완전히 없어졌다.

용문석불의 보살상
용문석불의 보살상

그밖에 허베이 성[河北省], 산둥 성[山東省], 랴오닝 성[遼寧省], 장쑤 성[江蘇省], 쓰촨 성[四川省], 윈난 성[雲南省], 허난 성의 쑹웨 사[嵩岳寺] 탑은 12각 15층이며 벽돌로 축조되었고 북위말 523년 작으로 포탄 모양의 윤곽이 아름답다. 중국에서 구축된 탑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조 불전으로서 가장 높은 것은 당대에 지어진 산시 성의 난찬 사[南禪寺] 불전(782)이다. 규모는 작고 후세에 개수도 잦아 같은 산시 성 포광 사[佛光寺] 대전(857)의 크고 당당한 모습에는 미치지 못한다.

당대의 탑으로는 장안(지금의 시안[西安])의 츠언 사[慈恩寺] 대안탑(大雁塔:704)이 유명하며 전조로 규모도 크다. 남방에서는 5대(五代)와 송, 북방에서는 요(遼)와 금(金)이 흥하고 망한 10~13세기에 목조 불전이나 탑이 각지에 많이 만들어져 지금도 남아 있다. 산시 성의 포궁 사[佛宮寺] 석가탑은 8각 5층으로 1056년 요나라 때 건조되었으며,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탑으로서 안정되고 아름답다.

또 벽돌로 된 요·금 시대의 8각 다층탑은 각지에 다수 남아 있다.

원대(元代)에는 티베트 불교(라마교)가 유포되어 그에 따라 복발식 탑신의 하부가 좁아진 종 모양의 라마탑이 만들어졌다. 베이징[北京]의 먀오잉 사[妙應寺] 백탑(白塔:1279)이 그 오래된 예이다. 베이징 북쪽에 있는 쥐융관[居庸關]의 운대(雲臺:1345)는 석조 아치 문으로 원래는 문 윗부분에 라마 탑이 있어 이른바 과가탑(過街塔)을 이루었다.

뒤이어 명·청 시대(明淸時代)에도 전통적인 사원과 라마교 계통의 건축이 함께 이루어졌다. 라마교는 청대에 특히 북방에서 성했다. 몽고 민족을 위해 둬룬[多倫]·귀수(歸綏:후허하오터[呼和浩特]) 등에 라마교 사원이 세워졌고 허베이 성 청더[承德]에 있던 청 황제의 피서용 산장인 비수 산장[避暑山莊] 부근에 지어진 여러 사원 중 푸퉈쭝청먀오[普陀宗乘廟:1767]는 티베트 양식을 받아들인 대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불교건축

백제에서 일본으로 불교가 전해진 시기는 〈니혼쇼키 日本書紀〉에 55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반드시 정확한 연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백제·신라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도 불교를 받아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스카 시대[飛鳥時代:6~7세기 중엽)에 사원이 출현했지만 정권의 소재지인 야마토[大和]를 중심으로 하는 긴키[近畿] 지방에 밀집 분포했고 다른 지방에는 드물어 전국에 50개 전후의 사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소가 씨[蘇我氏]를 시주(施主)로 하고 백제에서 건너온 장인들의 손으로 6세기말 야마토에 창건된 아스카 사[飛鳥寺]는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 3방향으로 금당이 있고 그 바깥은 회랑이 일주하며 중문·남문·서문과 강당을 갖춘 가람이다.

그 배치는 고구려의 금강사(金剛寺)와 같고 출토된 기와는 백제 기와와 무늬가 비슷하다. 오사카[大阪]에 있는 시텐노 사[四天王寺]의 경우 회랑 안에 탑과 금당을 앞뒤로 병립시킨 가람 배치로 한국이나 중국에서 이어지는 전통을 보존한 것이다.

하쿠호 시대[白鳳時代:주로 7세기 후반)에 불교는 더욱 널리 퍼져 사찰도 전국에 걸쳐 늘어났다.

가람배치로는 회랑 안에 탑과 금당을 좌우로 지은 것(가와라 사[川原寺] 등)과, 금당 앞 좌우로 탑을 세운 것(모토야쿠시 사[本樂師寺])이 추가되었다. 호류 사[法隆寺]는 607년에 창건되었는데 〈니혼쇼키〉에 따르면 670년의 화재 이후 재건되었다고 한다. 금당·탑 등은 7세기말경 재건되었지만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건축으로서 귀중한 것이다.

나라 시[奈良市]의 야쿠시 사[藥師寺] 동탑은 모토야쿠시 사에서 옮겨 지었는지 덴표 시대[天平時代:8세기]에 새로 지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하쿠호 시대 말기 양식의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덴표 시대는 헤이조쿄[平城京]의 여러 대사찰을 중심으로 한 불교미술의 번영기로, 전국에 400개 이상의 사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람 배치로는 복도가 금당의 양쪽에 이어졌고 탑은 중문 앞 좌우의 어느 한쪽(고후쿠 사[興福寺] 등) 또는 양쪽(도다이 사[東大寺] 등)에 세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남대문 외에 별원(別院)을 만들어 동서 양탑을 세운 특이한 예도 있다. 도다이 사는 8세기 후반 몇십 년에 걸쳐 완성된 대건축의 관사(官寺)로서 대불전이나 동서 양탑의 크기가 압도적이었다. 도다이 사의 법화당(法華堂)이나 쇼소인[正倉院] 등은 이 시대의 본보기이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는 전기(9세기)와 후기(10~12세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천태종(天台宗)·진언종(眞言宗)의 발홍, 후기는 정토신앙의 융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사원건축도 그 영향을 받았다. 또 종래 중국풍의 요소가 강했던 사원건축이 이 시대에는 차츰 일본화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점도 주목된다. 전기 때는 히에이 산[比叡山]에 엔랴쿠 사[延曆寺]와 고야 산[高野山]의 곤고부 사[金剛峰寺]가 완성되어 산지의 사원으로 주목받았지만, 시조인 사이초[最澄]나 구카이[空海] 시대에는 간소했던 건축이 후세로 내려오면서 개조를 거듭하며 대규모화했다.

무로우 사[室生寺] 5층탑은 산사(山寺) 건축의 예이다. 후기에는 교토[京都]의 귀족에 의해 사원건축과 불상건조를 겨루는 풍조가 생겨 전국에 영향을 미쳤다. 교토의 호조 사[法成寺]나 홋쇼 사[法勝寺] 등의 사찰 내 요처에는 넓은 연못을 파서 화려한 불교의식의 무대로 삼았다. 후기의 예로 남은 것은 10세기의 다이고 사[醍醐寺]5층탑, 11세기의 뵤도인[平等院] 아미타 당(봉황당), 12세기의 주손 사[中尊寺] 금색당(金色堂) 등이 있다.

정토신앙의 표현으로서 교토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9체(九體) 아미타 당의 가장 오래된 예로 조루리 사[淨溜璃寺] 본당(12세기)이 있다.

중세는 가마쿠라 시대[鍾蒼時代:주로 13세기]부터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주로 14~16세기]에 이른다. 화재를 입은 나라 시의 대사찰을 부흥시킬 때 도다이 사만은 중국에서 도입한 대불(大佛) 양식을 새로이 썼다. 현존하는 도다이 사 남대문은 그 전형인데 이 양식은 단명했다.

중국에서 선종이 전해져 교토나 가마쿠라 등에 선사(禪寺)가 출현함에 따라 선사의 건축에 선종양식(가라요[唐樣])이 채용되었고 13세기 중엽에는 일본의 선종건축이 완성되었다. 3문(三門)·불전·법당·방장(方丈)·승당·욕실 등을 갖춘 선사는 대부분 송대 중국 선사의 기풍을 전한다. 전통적인 일본풍 건축도 중세에는 대불·선종 양식을 받아들여 절충식을 만들어냈는데 무로마치 시대부터는 절충식이 사원건축의 주류가 되었다. 중세의 양식으로는 이시야마 사[石山寺] 다보탑이나 렌게오인[連華王院] 본당, 절충식으로는 간신 사[觀心寺] 금당 등이 대표적이다.

근세는 모모야마 시대[桃山時代:16세기말 전후]와 에도 시대[江戶時代:17~19세기 중엽]로서, 전국에 많은 사원건축을 남겼고 변화도 풍부하다.

교오고고쿠 사[敎王護國寺:東寺] 금당이나 기요미즈 사[淸水寺] 본당 외에 도다이 사 대불전이나 젠코 사[善光寺] 본당 등 대건축이 있다. 17세기 중엽 중국에서 들어온 황벽종(黃檗宗)의 것으로는 우지[宇治]의 만푸쿠 사[万福寺]나 나가사키[長崎]의 소후쿠 사[宗福寺]가 있으며, 이는 중국 남부의 근세양식을 전하고 있어 이채를 띤다.

한국의 불교건축

한국의 불교건축은 삼국시대(4~7세기 중엽)부터 시작된다. 고구려에는 372년, 백제에는 384년에 불교가 전해졌고 신라에서는 572년에 불교가 공인되어 각기 그 직후부터 도성 근처에 불사가 세워졌다.

고구려의 불교건축으로는 평양 부근의 청암리에 있는 금강사지를 들 수 있는데, 중앙 8각 목탑지를 중심으로 동·서·북 3방향에 금당(金堂)을 배치한 1탑3금당식이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일본 아스카 사[飛鳥寺] 가람 배치에 영향을 주었다. 백제에는 부여의 군수리사지 등이, 신라에는 규모가 웅대한 황룡사지 등이 있다. 기와 등 출토품으로 보아 고구려는 중국 북조의 문화, 백제는 주로 남조의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신라는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시대(7세기 중엽~10세기초)의 것으로는 경주를 중심으로 석조건축의 유적이 많고 불국사의 다보탑 등 뛰어난 건조물이 많다. 또 이 시대의 신라 기와는 무늬가 풍부한 변화를 담아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다. 통일신라의 뒤를 이어 고려시대(10~14세기)부터는 목조 불교건축을 남기고 있다. 경상북도 봉정사극락전은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목조건축으로, 중국의 난찬 사 대전의 구조양식과 같다. 조선시대(14세기말~20세기초)에는 불교가 쇠퇴했지만 오늘날까지 전국의 산 속에 대사찰이 남아 있을 만큼 이 시대의 불교건축은 다수이다.

법주사팔상전은 목조건축으로 중후한 5층탑의 형상을 보여준다(→ 사찰, 탑파).

팔상전 목조탑
팔상전 목조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