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사찰

다른 표기 언어 寺刹 동의어 절, 사원, 寺院, 정사, 精舍, 승원, 僧院, 가람, 伽藍

요약 불상을 모시고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불도를 닦고 교법을 설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

절을 한자로 사라 하고 가람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범어의 상가라마(Sangharama)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불교건축). 이는 중원 또는 정사라는 뜻으로 남자승려·여자승려·남자신도·여자신도와 같은 4중이 모여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불국사
불국사

인도의 사찰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 최초의 승원은 석존의 설법을 위한 장소로서 지었으나 승단이 형성됨에 따라 안거를 위한 공동의 방사 성격을 띠게 되었다.(→ 불교건축) 부처가 열반한 후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는 스투파(Stupa)가 건립되었고 이 스투파를 중심으로 가람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가람이 중국으로 전해져 스투파가 탑으로 변하고, 탑 이외에 금당·강당·회랑·종루·경루·승방 등이 건립되면서 본격적인 가람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마이소르(Mysore)에 위치한 사원
마이소르(Mysore)에 위치한 사원

중국의 사찰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전한대이며 기록에 최초로 보이는 가람은 부도사이다. 이것은 후한 말기 헌제 때의 사람인 책융이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완전한 탑이나 불전의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위서 魏書〉 권114 석노지의 기록에서 북위의 태조가 평성에 불사를 건립했을 때 5층탑과 2개의 불전, 강당·선당·승방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중국 초기의 가람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가람이 고구려에 전해져 한국의 가람이 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의 사찰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 사찰이 최초로 지어진 것은 불교가 고구려에 전래된 372년(소수림왕 2) 이후이다.

375년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건립하고 그후 평양에 9사를 짓는 등 많은 사찰이 조성되었으나 실제 남아 있는 건물들은 없고, 여러 사지(寺址)들이 조사·발굴됨으로써 당시의 사찰을 미루어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는 중앙에 8각형의 목조탑지가 있고 좌우에 방형의 금당지가 있다. 나머지 주변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금당 2개에 탑 1개를 세운 일탑이금당식(一塔二金堂式)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중국 초기의 가람인 태위의 불사나 숭악사(嵩嶽寺)의 모습과 비슷하다. 다음 427년에 고구려의 도성을 평양으로 옮기고 또 동명성왕의 능을 옮긴 후 이의 원찰(願刹)로서 지은 것으로 생각되는 정릉사지(定陵寺址)에서도 중심 영역은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498년에 건립된 금강사지(金剛寺址)는 중앙에 8각형 목조탑이 있고, 탑의 좌우와 북쪽에 방형의 금당이 있는 이른바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백제에서는 불교가 전래된 다음해인 385년(침류왕 2)에 한산에 불사를 이룩했다고 하나 그 유지조차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암사지(巖寺址)의 발굴이 있었으나 백제시대의 사지라는 확증은 찾을 수 없다. 불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527년(성왕 5)의 대통사(大通寺) 창건에 관한 기록이며, 당시의 도성인 공산성이 있던 공주를 중심으로 대통사지·서혈사지·수원사지 등이 발굴되었으나 가람배치를 잘 알 수 있는 것은 부여지방의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금강사지·정림사지(定林寺址) 등이다.

이들은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중문·탑·금당·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이들을 장방형으로 회랑이 둘러싼 이른바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 가람배치이다. 한편 익산미륵사지는 이탑일금당식이 3개 모인, 즉 금당과 탑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회랑이 병렬로 늘어서 있고 북쪽 합쳐지는 곳에 커다란 강당을 공동으로 세운 특수한 배치를 이루고 있다.

특히 이 가람에 남아 있는 석탑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서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된 석탑양식을 대표해주는 것이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5세기초 눌지왕 때로 추정되는데 양나라 사승인 원표(元表)에 의하여 왕실에 전해지고, 이차돈의 순교로서 527년(법흥왕 14)에 국교로 공인되면서 사찰이 조영되기 시작했다. 기록상으로 보이는 최초의 가람은 534년에 착공되어 544년(진흥왕 5)에 완공된 흥륜사(興輪寺)이다.

이 사찰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탑과 금당, 좌경루, 남문, 좌우회랑, 남지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전체적인 모습은 잘 알 수 없으나 백제의 일탑일금당식 가람배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최대의 가람인 황룡사(皇龍寺)는 553년에 착공되어 569년에 완공되었으며, 574년에는 장륙존상이 건립되었고, 583년(진평왕 5)에 금당을 중건하는 등 황룡사의 동종이 조성된 754년(경덕왕 13)까지 중건이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이 시기에 들어서면 금당 앞에 동서로 탑이 2개가 서 있는 이른바 이탑일금당식 가람이 형성되었는데, 사천왕사·망덕사·불국사·감은사 등은 그러한 예이다.

한편 선종(禪宗)과 밀교(密敎)가 성행하면서 평지에 건립되던 사찰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 건립되어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바뀌게 되었다. 평지가람에서는 중문·금당·강당이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일직선으로 배치되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는 좌우대칭 체계였으나 산지가람으로 바뀌게 되면서 여러 건물들을 지형에 맞추어 배치했기 때문에 건물들의 중심축이 일치되지 않고 공간적인 균형을 추구하게 되면서 좌우비대칭의 체계로 바뀌게 되었고, 이것이 한국 전통사찰의 공간적인 특성이 되었다.

고려시대

그 어느 때보다도 불교가 융성했고, 따라서 개국과 더불어 개경을 중심으로 많은 가람이 조성되었다.

법왕사·자운사·내제석사 등 10개의 큰 가람이 창건되었고, 그후 개국사·불일사·흥왕사·안화사 등이 건립되었다. 산지가람은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일탑일금당식 가람(불일사), 이탑이금당식 가람(흥왕사), 일탑삼금당식 가람(만복사)도 조성되었다. 특히 연복사(演福寺)는 동쪽에 왕궁을 능가할 만한 전각이 있고, 그 서쪽에 탑이 있는 동전서탑의 배치였음을 〈고려도경〉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들어와 본래 부처님이 금빛나는 분이라 하여 부처를 모신 사찰의 중심 전각을 금당이라 부르던 것을 부처의 덕호(德號)인 대웅(大雄)으로부터 이름을 따와 대웅전(大雄殿)이라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토속신앙을 수용하면서 산신각·칠성각 등과 같은 작은 전각들도 건립되었고, 대웅전 이외에도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명전(大光明殿:또는 대적광전),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龍華殿),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冥府殿:또는 지광전), 석가모니 제자들을 모신 나한전(羅漢殿)·영산전(靈山殿) 등 여러 전각(堂宇)을 건립하고 이외에도 종을 매단 종루, 북·목어(木魚)·운판(雲板)을 매단 고루(鼓樓), 선당(禪堂)인 심검당(尋劍堂), 승려들의 숙소인 요사채 등이 세워졌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사찰로는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동사 조사당, 수덕사 대웅전,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등이다.

조선시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의해 사찰창건이 둔화되었고 세종 때에는 도성 내의 사찰을 철거했다.

그러나 태조는 강비의 원찰로서 흥천사를, 태종 때에는 문경사·연경사를, 세조는 용문사를 창건했으며 기존의 사찰에서 많은 당우들이 중건되었다. 조선시대의 가람배치는 전시대의 가람배치를 계승한 것으로 판단되며 특히 산지가람의 배치가 주종을 이루었다. 조선 말기인 고종대(高宗代)에는 대웅전 앞에 넓은 마당을 두고, 대웅전과 마주하는 자리에 대방(大房)이라 부르는 커다란 건물을 짓고 대웅전과 대방 사이의 마당에서 큰 법회를 행했다.

이러한 실례로는 서울 정릉의 흥천사(興天寺) 등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당우로서 주심포식 건축물은 조선 초기에 건립된 무위사 극락전, 정수사 법당, 관룡사 약사전, 송광사 국사전 등이 있고,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은 봉정사 화엄강당, 동사 고금당, 장곡사 상대웅전 등이 있다(주심포양식). 다포식 건축물로 조선 초기에 봉정사 대웅전, 개심사 대웅전, 청평사 극락전, 신륵사 조사당 등이, 조선 중기에는 통도사 대웅전, 관룡사 대웅전, 법주사 팔상전, 화엄사 각황전 등이, 조선 말기에는 개심사 대웅전, 내소사 대웅보전, 쌍계사 대웅전, 동화사 대웅전 등이 각각 건립되었다.

사찰 내 불전

대웅전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도 하며 한국의 절에 있는 불전(佛殿) 가운데 가장 많다.

사찰의 중심에 위치하며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한 것이다.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고 할 경우에는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모시고, 여래불의 좌우에 다시 협시불을 봉안하기도 한다. 이것은 석가모니의 법회인 영산회상(靈山會相)을 상징한다.

아미타전(阿彌陀殿)

극락전(極樂殿)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봉안하고, 삼존불의 뒤쪽에 극락의 법회장면을 묘사한 극락회상도나 극락구품탱화(極樂九品幀畵)를 걸어서 극락의 모습을 나타낸다. 아미타전은 아미타여래의 법회인 미타회상(彌陀會相)을 상징한다.

약사전(藥師殿)

약사여래를 주불로 모시고 월광보살과 일광보살이 협시로 봉안된다.

관음전(觀音殿)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하고 그 좌우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을 배치하는데 이들은 조상(彫像)이 아니라 후불탱화에서만 나타난다.

대적광전(大寂光殿)

화엄전(華嚴殿) 또는 비로전(毘盧殿)이라고도 하며 불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연화장세계의 교주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불과 보신불(報身佛)인 아미타여래를 봉안한다. 그리고 화신불과 보신불의 좌우에 각각 문수·보현·관음·세지 보살을 협시로 봉안하기도 한다. 해인사·금산사의 대적광전이 대표적이다.

영산전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인 팔상탱화(八相幀畵)를 봉안한다.

용화전

미륵전 또는 미륵의 한문 의역인 자씨(慈氏)를 취하여 자씨전(慈氏殿)이라고도 한다.

이 불전은 미륵신앙을 응축시킨 것으로 미륵불이 주존불이며, 그뒤에는 미륵정토변상도·용화회상도·미륵내영도와 같은 미륵후불탱화를 봉안한다. 금산사의 미륵전이 대표적인 예이다.

나한전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봉안하고 주위에 석가의 존자(尊子)인 16나한상을 봉안한다.

이것은 수도승에 대한 신앙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명부전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사찰에 옮겨놓은 것이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로 봉안하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배열한다. 따라서 지장이 강조되면 지장전, 명부시왕이 강조되면 명부전이라고 한다.

조사당(祖師堂)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하며, 선종계통의 절은 조사에 대한 신앙이 강하기 때문에 조사들의 영정을 봉안한다.

산문(山門)

절의 입구에 있는 일주문(一柱門), 가운데에 있는 천왕문(天王門), 마지막에 있는 불이문(不二門:또는 解脫門)을 말한다.

사찰에 따라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금강문(金剛門)을 두기도 한다. 사천왕문에는 사천왕상을, 인왕문에는 인왕상을, 금강문에는 금강역사상을 봉안하는데, 이러한 불법옹호신중을 봉안한 문을 지나 절 안으로 들어오면 모든 악귀가 제거되어 가람이 청정도량이 된다는 것이다.

산신각(山神閣)

불교에 없던 토착신을 호법신중(護法神衆)으로 수용한 것으로 산신은 호랑이와 노인상으로 표현된다.

칠성각(七星閣)

산신과 같이 불교와는 무관한 신이었으나 수명장수신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칠성의 화현(化現)인 칠여래 등을 탱화로 그려 봉안한다.

독성각(獨聖閣)

독성이란 혼자 깨우친 성자(聖者)라는 뜻이며, 천태산에서 홀로 선정을 닦고 있는 나반존자를 모신 전각이다.

삼성각(三星閣)

산신·칠성·독성을 한 전각 안에 봉안한 것이다.

누각(樓閣)

절의 중심 불전 앞에 세워진 것으로, 대법회가 있을 때에는 이 누각에서 불전에서 행할 행사를 치르게 된다.→ 불교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