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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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서원·서당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학의 하나이며, 불교의 도량도 정사라고 한다. 주자학이 보급되던 고려 말에 본격적으로 세워졌으며, 이후 조선시대에 주자학의 융성과 더불어 곳곳에 건립되었다. 명망 높은 유사가 강학소를 개설하면, 그를 흠모하는 지학들이 모여들어 수학함으로써 많은 정사가 성립되었다.
정사는 사적·학구적이라는 점에서 서원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정사는 개설자가 죽은 뒤에 서원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아 조선 후기에 서원이 양적으로 팽창하는 원인이 되었다. 정사의 대표적인 예로는 이이의 은병정사, 이황의 농운정사, 김일손의 운계정사 등이 있다. 현존하는 정사는 대략 20개소로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다. 지역적으로 경상도 지방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경기도와 강원도는 남아있는 정사가 없다.

서원·서당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학(私學)의 하나이며, 불교의 도량(道場)도 정사라고 한다.

빈연정사
빈연정사

정사는 후한(後漢)의 포함(包咸)이 동해에 정사를 세워 후학을 교육한 고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朱子學)이 보급되던 고려말에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으며, 고려말 길재(吉再:1353~1419)가 자신의 고향 선산인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강학소를 개설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주자학의 융성과 더불어 정사류의 사학이 곳곳에 건립되었다. 즉 명망높은 유사가 자신의 고향이나 경치가 좋은 장소를 택해 은거하면서 강학소를 개설하면, 그를 흠모하는 지학(志學)들이 모여들어 수학함으로써 많은 정사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정사는 고려의 12도(十二徒)와 대비되기도 한다. 그러나 12도가 국가의 정책적 배려하에 반영구적으로 존재했던 과거준비기관으로서 문예교육(文藝敎育)에 치중한 데 반해, 정사는 순수하게 학문을 연마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서원이 사당을 두어 선현향사(先賢享祀)를 하고 정치적·사회적으로 밀접한 교섭을 갖는 공적인 측면을 지녔던 반면, 정사는 사적·학구적이라는 점에서 서원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정사는 개설자가 죽은 뒤에 문도나 향유들에 의해 서원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아 조선 후기에 서원이 양적으로 팽창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정사의 대표적인 예로는 이이의 은병정사, 이황의 농운정사, 김일손의 운계정사 등을 꼽을 수 있다.

현존하는 정사건축은 대략 20개소인데,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은 남아 있지 않고, 대개가 조선 중종 이후에 건립된 것들로 특히 선조대(1568~1607)에 건립된 것이 많이 남아 있다(한국의 건축). 지역적으로는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방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다음 전라도와 충청도이며, 경기도와 강원도에는 현존하는 유구가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지역적인 분포는 문헌상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정사는 하삼도(下三道: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 많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사의 입지(立地)는 민가와 격리되어 산중턱에 위치한 경우, 민가부근으로 산 아래쪽에 위치한 경우, 민가와 격리되어 평지에 위치한 경우, 민가와 더불어 평지에 위치한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처음에는 주로 민가와 격리된 산간승지(山間勝地)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점차 민가와 가까워지면서 평지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정사가 초창기에는 다소 은둔적·폐쇄적이었지만 점차 개방화·세속화되어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이며, 이러한 현상은 조선시대의 서원이나 서당에서도 볼 수 있다.

정사의 건물구성은 정사건물이 단독적으로 세워지는 경우(개천정사·석문정사·빈연정사·양계정사·남간정사·현곡정사 등)가 대부분이며, 정사에 사당(祠堂)이 부속되는 경우(화계정사·고봉정사·노봉정사·용오정사·봉산정사)가 있고, 드물게는 정사에 누각(樓閣)과 장판각(藏板閣) 등의 건물이 부속되어 있는 경우(원지정사·농운정사·송당정사)도 있다.

정사에 강학공간과 더불어 사당을 중심으로 하는 제향공간이 있는 경우의 대부분은 원래 정사건물만 있다가 나중에 사당이 건립되는 것이 상례이다. 이때 정사와 사당의 배치관계는 서원의 배치와 마찬가지로 강학공간인 정사를 앞에 배치하고 제향공간인 사당을 뒤에 배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정사와 사당을 나란히 배치하는 경우(고봉정사)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사건축의 배치유형에 지역적인 편차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사의 평면은 일자형(一字形)으로 대청과 온돌방으로 구성되며, 대청과 온돌방의 위치관계에 의해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둔 경우(양계정사·개천정사·검암정사·현곡정사 등), 한쪽에 대청을 두고 다른 한쪽에 온돌방을 둔 경우(빈연정사·화계정사·원지정사·고봉정사 등), 대청과 온돌방이 일정한 위치관계를 지니지 않는 부정형으로 된 경우(농운정사·죽곡정사·화수정사·오봉정사 등)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평면유형은 어느 한 유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전지역에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 다만 대청 전면의 형태에서만 지역적인 차이를 보여 개방형은 영남지방에서, 개폐형은 호남지방에서 주로 나타난다. 가구(架構)는 목재를 거의 가공하지 않고 장식을 가하지 않은 소박한 구조를 보이는데, 이것은 선비들의 자연에 대한 동경과 자연과의 합일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형식은 대부분 민도리계이며, 일부 익공형식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의 단층 석축기단이며, 초석은 대부분 막돌초석으로 가끔 다듬돌초석을 사용한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대부분 원형초석이다. 기둥은 방주(方柱)를 많이 사용했으나 대청의 전면·후면에는 원주(圓柱)를 사용하고, 온돌방 부분에서는 방주를 사용하여 방주와 원주를 혼용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대청은 우물마루와 연등천장으로 구성하고, 온돌방은 종이반자를 댄 우물천장으로 구성했다. 지붕은 대부분 팔작지붕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맞배지붕인 경우도 있다.

가구는 대부분 무고주오량(無高柱五樑) 또는 일고주오량(一高柱五樑)이며, 일부 이고주오량(二高柱五樑)을 사용한 경우도 있는 등 오량집이 많으며, 소규모인 경우에는 삼량(三樑)으로 했다. 학구와 수신생활을 강조하여 대부분의 생활이 정사 내에서 이루어짐에 따라 외부공간은 거의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장으로 외부공간을 구획한 경우가 많으나, 민가와 격리된 산간승지에 위치한 경우에는 담장없이 자연경관을 그대로 외부공간으로 이용하여 별다른 조경처리를 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