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도

12도

다른 표기 언어 十二徒 동의어 12공도, 十二公徒

요약 최충의 문헌공도, 정배걸의 홍문공도, 노단의 광헌공도, 김상빈의 남산도, 김무체의 서원도, 은정의 문충공도, 김의진의 양신공도, 황영의 정경공도, 유감의 충평공도, 문정의 정헌공도, 서석의 서시랑도, 구산도 등인데 각 사학의 명칭은 설립자의 시호나 호, 벼슬이름을따서 지었다. 1055년(문종 9) 벼슬에서 물러난 최충이 문헌공도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황영의 정경공도가 문종 이후에 설립된 것 외에는 대체로 문종 중기 이후부터 말기 사이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2도는 국가관리양성을 위주로 하고 당시의 특수계급을 배경으로 개경이라는 한 지역에 국한된 봉건체제의 산물로 고려 유학의 발달에 공헌을 했다. 1391년(공양왕 3) 교육제도의 정비과정에서 혁파되었다.

12공도라고도 한다. 최충(崔沖)의 문헌공도, 정배걸(鄭倍傑)의 홍문공도(弘文公徒), 노단(盧旦)의 광헌공도(匡憲公徒), 김상빈(金尙賓)의 남산도(南山徒), 김무체(金無滯)의 서원도(西園徒), 은정(殷鼎)의 문충공도(文忠公徒), 김의진(金義珍)의 양신공도(良愼公徒), 황영(黃瑩)의 정경공도(貞敬公徒), 유감(柳監)의 충평공도(忠平公徒), 문정의 정헌공도(貞憲公徒), 서석(徐碩)의 서시랑도(徐侍郞徒), 구산도(龜山徒) 등인데 각 사학의 명칭은 설립자의 시호나 호, 벼슬이름을 딴 것이다. 1055년(문종 9) 벼슬에서 물러난 최충이 문헌공도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황영의 정경공도가 문종 이후에 설립된 것 외에는 대체로 문종 중기 이후부터 말기 사이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2도 설립자들의 경력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문종대 전후의 문관들로 학식과 명망이 높고 과거시험관인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한 사람들이었다. 12도는 도의 교육 이외에 당면목표인 과거를 준비하는 학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거란의 침입 등 내우외환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관학인 국자감의 교육이 충실하지 못했으며, 955년(성종 6) 이후 전국 12목에 경학박사를 파견하는 제도가 마련되었지만 일부 중요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문종 이후 크게 높아진 향학열을 채울 수 없어 많은 사람들이 사학으로 모이게 되었다. 또 과거에 치중하는 사회풍토 속에서 사학 출신자들이 대거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등용되자 사학은 성황을 이루었다. 사학이 크게 성장하고, 국학이 침체되자 국학을 진흥시키고자 예종 때에는 국학에 7재(七齊)를 설치했고 인종 때에는 국자감 등 국학의 학제를 정비하고 향학을 완비했다. 무인정권·원간섭기를 거쳐 사학은 국가의 통제를 받으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후기에는 주자학이 전래되면서 안향(安珦)·정몽주(鄭夢周)·이색·이숭인(李崇仁) 등 성리학 계통 학자들의 활동으로 국학이 크게 진흥된 반면 사학은 약화되었다. 이후 1391년(공양왕 3)에 교육제도의 정비과정에서 혁파되었다. 12도는 국가관리양성을 위주로 하고 당시의 특수계급을 배경으로 개경이라는 한 지역에 국한된 봉건체제의 산물로 이후 국가의 통제로 쇠퇴·혁파되었지만 고려 유학의 발달에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