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재학당

9재학당

다른 표기 언어 九齋學堂 동의어 문헌공도, 文憲公徒, 시중최공도, 侍中崔公徒

요약 고려에 들어서 유학은 왕조의 건국이나 후삼국 통일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줌으로써 고려왕조 존립의 합법성을 보장해주는 정치이념으로 국가에서 교육기관을 세우는 등 여러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거란의 침입과 숭불책으로 유학에 대한 관심이 약해지고 관학이 쇠퇴하게 된다. 최충은 문종대에 관직을 은퇴한 후 유학의 보급과 유교적 지식에 밝은 관리의 양성을 목적으로 사숙을 개설했다. 학당을 9재로 나누어 가르쳤는데 이것이 바로 구재학당이다. 당시에는 관학이 부진해 과거시험을 지향하는 많은 학생들이 모였다. 학과는 9경 3사였는데 이를 통해서 과거 준비교육뿐 아니라 덕성의 함양을 도모하는 예교 교육도 행했다.후에 과거에 급제한 자는 모두 9재 중에 적을 두어 문헌공도라고 일컬었는데, 이 당시 존재한 사학 11개와 합쳐 사학12도라 불렀다. 이로 인하여 사학은 번창하고 관학은 더욱 쇠퇴해갔다.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 혹은 죽은 뒤의 시호(諡號)를 따라 문헌공도라고도 한다. 유학은 삼국·통일신라시대부터 국가의 주된 정치이념으로 채택된다.

삼국시대는 주로 태학이나 경당과 같은 교육기관, 관직상에 나타나는 태학박사, 기타 '임신서기석'·'진흥왕순수비' 등 금석문에 보이는 유교경전의 기록과 같이 국가 혹은 공동체사회에서 지켜야 할 도리와 규범을 강조하는 정도였다. 통일신라시대는 국학·독서삼품과와 같은 정책의 시행을 통해 삼국시대보다 수준 높은 유학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주로 국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약화하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고려에 들어서 유학은 왕조의 건국이나 후삼국 통일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줌으로써 고려왕조 존립의 합법성을 보장해주는 정치이념으로 작용하게 된다. 태조 이래 학교의 설립, 광종대 과거제도의 실시, 성종대 최승로·김심언·이양과 같은 유학자의 등용을 통해 유교적 정치이념이 확대 보급된 것이 그것이다. 현종대를 거치면서 거란의 침입과 숭불책으로 유학에 대한 관심이 약해지고 관학이 쇠퇴하게 된다.

즉 국학이 부진하고 향학(鄕學)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가운데 과거는 중시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최충(崔冲:983~1068)은 문종대(1047~83)에 관직을 은퇴한 후 유학의 보급과 유교적 지식에 밝은 관리의 양성을 목적으로 사숙(私塾)을 개설했다.

교사를 송악산(松岳山) 아래 자하동(紫霞洞)에 마련하고 학당을 9재로 나누어 가르쳤는데 이것이 바로 구재학당이다. 당시에는 관학이 부진했으므로 과거시험을 지향하는 많은 학생들이 모였다. 재명(齋名)은 악성(樂聖)·대중·성명(誠明)·경업·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대빙 등이다.

학과는 9경 3사(三史)였는데 이를 통해서 과거 준비교육뿐 아니라 덕성(德性)의 함양을 도모하는 예교(禮敎) 교육도 행했다. 매년 더운 때에는 귀법사의 승방(僧房)을 빌려서 여름 공부를 하고, 학생 가운데 과거에 급제했으면서도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자를 뽑아 교도로 삼아 학생을 가르쳤다.

후에 과거에 급제한 자는 모두 9재 중에 적을 두어 문헌공도라고 일컬었는데, 이당시 존재한 사학 11개와 합쳐 사학12도(私學十二徒)라 불렀다. 이로 인하여 사학은 번창하고 관학은 더욱 쇠퇴해갔다. 9재는 고려 말기까지 계속되어 금석문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나타난다.

이규보가 문헌공도의 하기 강습회인 하과(夏課)에 입학한 것이나 강화도에서 9재의 부흥운동을 벌인 것, 그리고 충렬왕이나 공민왕이 행차하여 하과를 격려한 것, 이색이 9재에 놀러가 시를 짓던 일 등이 그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