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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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전기까지 초등교육은 주로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16세기 후반 서원이 성립되면서 중등교육을 담당하고, 초등교육은 서당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서당은 서원에 부속된 형태로 운영되다가 17세기부터 독자적인 교육기구로 자리잡았다. 서당은 훈장과 학생으로 구성되었다. 학생은 8~15세의 양반과 평민층의 아동들이었다. 학과 내용은 강독·제술·습자로 구성되었다. 강독은 <천자문>·<동몽선습>이 기본이었다. 일제병합 당시 전국의 서당은 1만 6,540개였는데, 일부에서는 초등교육기관의 기능에 더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일제는 <서당규칙>을 제정하여 서당이 일제의 동화교육을 담당하도록 했으며, 민족교육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해방 후 서당은 그 기능을 보통학교에 물려주고 점차 소멸했다.

단원풍속도첩 중 서당
단원풍속도첩 중 서당

사설 초등교육기구의 연원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전기까지 초등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학생들은 가정에서 한문 해독 능력을 갖춘 다음 서재류(書齋類)의 사설 교육기구나 관학인 향교를 통해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교육과정을 밟았다. 조선 후기에 보편적인 초등교육기구로 자리잡은 서당의 직접적 전신은 서재에서 찾을 수 있는데, 서재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곳이었으나 초등교육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후반에는 서재를 잇는 서원이 성립되면서 중등교육을 담당하게 되고, 서재에서 이루어지던 초등교육은 서당에서 담당하는 식으로 교육과정이 명확히 분화되었다.

서당은 처음에는 서원에 부속된 형태로 운영되었으나 17세기부터 서원과는 상관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교육기구로 자리잡았다. 서당은 훈장과 학생으로 구성되었으며, 규모가 큰 경우에는 학력이 우수하고 연령이 높은 학생을 접장(接長)으로 세우기도 했다. 학생은 8~15세의 연령에 있는 양반과 평민층의 아동들이었다.

학과 내용은 강독·제술·습자로 구성되며, 강독은 〈천자문 千字文〉·〈동몽선습 童蒙先習〉이 기본이며 그외에 〈사략 史略〉·〈통감 通鑑〉·〈소학 小學〉·사서(四書)·당송문(唐宋文)·〈당률 唐律〉 등을 배웠다. 서당은 설립 주체에 따라 훈장이 스스로 서당을 세워 아동들을 모아 가르치는 훈장 자영(自營) 서당,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집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서당을 세우고 훈장을 고용하는 유지독영서당, 몇 명이 함께 운영비를 부담하여 훈장을 초빙하고 그들의 자제들만 가르치는 유지조합서당, 한 마을 전체 구성원이 주체가 되어 훈장을 두고 마을 아동들을 가르치는 촌조합서당으로 그 유형을 나누기도 한다.

서당은 선현들에 대한 향사(享祀) 기능이 없기 때문에 사묘(祀廟)가 전혀 문제되지 않으며, 서당이 운영되는 지역적 범위가 군현 아래의 면이나 동리를 단위로 하며, 교육내용이 과거나 도학적 학문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향교나 서원과는 전혀 다른 교육체계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17세기부터 이러한 서당이 널리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부터 농민과 그 처지가 비슷한 하층양반들이 존재하기 시작하고, 또 상층농민 등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평민층의 교육요구가 높아지면서 조선왕조의 체제적 교육으로부터 벗어나 광범위한 교육인구를 대상으로 하며, 교육내용에서는 그 정도가 낮은 교육이 필요하게 된 사정과 연관이 있다.

그후 18~19세기에 동족부락이 형성되고 이것이 서당설립의 주도세력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서당이 그들 가문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이전과는 달리 서당도 향사기능을 수행하는 등 보수화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사회변화와 함께 서당교육은 전체적으로 보아 체제교육의 틀내에서나마 새로운 교육관에 입각한 교육을 산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점진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다.

일제에 병합되면서 서당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다. 당시 전국의 서당은 1만 6,540개로 거의 모든 마을에 있었는데, 일제 침략 이후 일부에서는 종래의 초등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에 더하여 민족교육 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일제는 1918년에 〈서당규칙〉을 제정하여 서당이 일제의 동화교육을 담당하도록 하는 한편 민족교육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후 서당은 근대적 학교로 일부 개편된 경우도 있으나 그 입지가 점차 축소·쇠퇴하여 8·15해방 무렵에는 병합 당시의 수에 비해 1/3 수준으로 격감했다. 해방 후 새 정부의 교육법에 따라 서당은 그 기능을 보통학교에 물려주고 점차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