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재

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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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353(공민왕 2)
사망 1419(세종 1)
국적 고려·조선, 한국

요약 조선 초기의 학자. 이색·정몽주와 함께 고려 삼은(三隱)이라 한다. 대표작으로 <야은집>, <야은속집>이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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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수학과 고려말의 활동
  3. 은둔생활
  4. 학풍

개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 삼은(三隱)이라 한다.

수학과 고려말의 활동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아버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 원진(元進)이며, 어머니는 토산(兎山)의 사족(士族)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金希迪)의 딸이다.

11세에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 들어가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18세에는 상산사록(商山司錄) 박분(朴賁)에게서 〈논어〉·〈맹자〉 등을 배웠다. 그뒤 박분과 함께 송도에서 당대의 석학이던 이색·정몽주·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배웠다. 1374년(공민왕 23)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3년(우왕 9)에는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했다. 이후 학문에 정진하여 권근이 "내게 와서 글을 배우는 사람은 많지만 길재가 독보(獨步)이다"라고 하여 큰 기대를 걸었다 한다.

1386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청주목사록(淸州牧司錄)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387년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고, 다음해에는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올랐다. 이때 태학의 여러 학생들과 귀족의 일반 자제들까지도 그에게 배우기를 청하여 이들을 가르쳤다. 이무렵 이방원(李芳遠:太宗)과 같은 마을에 살았으며, 성균관에서도 같이 공부하여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에는 "몸은 비록 남다를 바 없다마는 뜻은 백이(伯夷)·숙제(叔齊)처럼 마치고 싶구나"라는 내용의 고려의 앞날을 걱정하는 시를 읊기도 했다.

1389년(창왕 1) 종사랑(從事郞)·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이성계(李成桂)·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듬해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선산(善山) 봉계(鳳溪)로 돌아왔다. 1391년(공양왕 3) 계림부(鷄林府)와 안변(安邊) 등의 경사교수(經史敎授)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우왕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다가 강릉으로 옮긴 후 살해되자, 전에 모시던 왕을 위하여 채과(菜果)와 혜장(醯醬) 등을 먹지 않고 3년상을 지냈다.

은둔생활

새로운 왕조에 참여할 뜻이 없었던 그는 고향에 머물면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가르치는 학생들과 더불어 경전(經傳)을 토론하고 성리(性理)의 강구에 힘썼다. 1400년(정종 2) 세자 방원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했으나 "여자에게는 두 남편이 없듯이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사양했다. 이에 정종이 권근에게 자문(諮問)한 끝에 그 절의를 높이 여기고 예를 다하여 대접하고 집에 돌아가 조신(操身)할 것을 허락하고, 그 집안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주었다. 이듬해에 어머니에 이어 큰 아들이 죽자 당시 일반사람들이 행하던 불교식을 일체 배제하고 주자가례에 따라 장례를 치루었다.

1403년(태종 3)에는 지군사 이양(李楊)이 길재를 방문했다가 그의 농토가 메말라 생산이 별로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좋은 전답을 선사했으나, 사는 것을 충당할 수 있을 만큼 조그마한 땅만 차지하고 나머지는 되돌려 보냈다.

이후 스승 박분과 권근이 죽자 심상(心喪) 3년을 행했다. 1419년(세종 1)에 세종이 그의 아들 사순(師舜)을 부르자 "내가 고려에 향하는 마음을 본받아 네 임금을 섬기라"고 당부했으며, 그해 5월에 죽었다.

길재(吉再)의 필체
길재(吉再)의 필체

학풍

길재의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대체로 효제·충신·예의·염치를 앞세우고 이의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주자학을 가르치고 그것을 근엄하게 실천하여 효를 다하고 공손했으며, 사당의 제도와 제향의 의례 등은 주문공가례를 따랐다.

전형적인 유학교육을 실시하여 정몽주에게서 이어받은 학통을 김숙자(金叔滋)에게 전하고 이는 다시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조광조(趙光祖)로 이어졌다. 세종이 좌사간대부를 증하고 그의 절의를 기리는 정문을 세웠다. 금산 성곡서원, 선산 금오서원, 인동 오산서원에 향사되었다.

저서로는 〈야은집〉·〈야은속집〉이 있고, 그의 언행록으로 문인 박서생(朴瑞生) 등이 엮은 〈야은언행습유록 冶隱言行拾遺錄〉이 전한다. 1741년(영조 17) 에 충절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