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불교

신라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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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신라시대의 불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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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불교전래와 수용
  3. 불교신앙의 대중화
  4. 신라 불교의 교학사상(敎學思想)
  5. 신라의 불교교단

개요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내물마립간 때 고구려와 신라의 외교관계가 긴밀했던 것을 미루어볼 때, 늦어도 눌지왕 때에는 아도(阿道:黑胡子)에 의해 고구려로부터 전해졌을 것이다. 그후 불교는 교통의 요충지인 일선군(一善郡:지금의 善山)을 중심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불교전래와 수용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계기가 되었으며, 529년에는 살생(殺生)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천경림(天鏡林)에 최초의 절인 흥륜사(興輪寺)를 지어 544년에 완성하면서 진흥왕은 백성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551년에는 고구려에서 귀화한 승려 혜량을 승통(僧統)으로 삼고, 그 밑에 비구를 관장하는 대도유나(大都維那)와 비구니를 관장하는 도유나랑(都維那娘)을 두어 교단을 통솔하게 했다. 그리고 진흥왕이 새로 정복한 지역을 순행할 때 사문도인(沙門道人)들이 수행했는데, 이들은 행사에서의 의례를 집행하고 국가의 평안을 기원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왕실이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이유는 4~6세기의 사회적 변동과 관련이 깊다. 불교 수용 이전에 왕의 종교적 지위는 다른 부(部)의 장(長)과 다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신라의 왕명인 차차웅(次次雄)이 무(巫)를 의미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또 각 부나 읍락공동체에서 행해지던 천신과 조상신에 대한 제사의례는 공동체의 결속을 공고히 했다. 따라서 4~6세기 농업생산력의 발달 등 여러 요인에 의해 계층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점차 해체되어가던 읍락공동체를 직접 지배하에 두기 위해 지방관을 파견하여 민(民)을 통치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왕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신앙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입장에 있던 귀족들로서는 전통신앙에 대치되는 불교의 공인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이차돈의 순교설화에 잘 나타나 있다. 불교의 수용을 용이하게 한 사상은 무엇보다도 업설(業說)이었다. 업설은 인간의 의지적 행위인 업에 따라 자연의 필연적 반응인 보(報)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 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살아 있을 때의 행위에 따라 6도(道)의 차별이 생긴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업설은 자연이 인간을 지배하던 무교(巫敎)의 세계관과 달리, 인간의 주체적 의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입장의 표명이었다. 그리고 죽은 후에도 현실에서의 신분 및 생활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던 계세(繼世)사상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공덕을 쌓음으로써 사회적 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여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했다.

또한 현실에서 누리는 복과 괴로움이 전생에서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라고 설명되므로 왕과 귀족층이 누리는 특권을 합리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초기에 불교의 공인을 반대하던 귀족층에 의해서도 적극적으로 불교가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불교신앙의 대중화

통일을 전후하여 신라에서는 불교가 대중화되었다.

불교의 대중화는 교단에서 소외되어 있던 혜숙(惠宿)·혜공(惠空)·대안(大安)·원효(元曉) 등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특히 원효는 중국·백제·고구려의 교학 연구성과를 수용하고,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에 근거하여 일심(一心)으로써 불교사상을 화쟁(和諍)·회통했다. 그의 사상에서 주목되는 점은 모든 사람에게 성불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원효는 일반인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만으로도 서방 극락에 왕생하여 아미타불을 만나 설법을 듣고 쉽게 성불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후 아미타신앙이 널리 성행하여 노비 욱면(郁面)을 비롯한 신라인들이 극락에 왕생했다는 설화가 만들어졌으며, 나아가서는 신라에서 아미타불로 성불했다는 설화도 유포되기에 이르렀다. 아미타신앙은 계속되는 전쟁에 시달리던 신라인들에게 안락한 사후세계를 보장해주었으므로 급속히 정착할 수 있었으며, 그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행하는 신앙이 되었다. 관음신앙(觀音信仰)도 현실의 고난을 제거하고 복을 구할 수 있다고 믿어져 아미타신앙과 함께 널리 성행했는데, 의상은 낙산에 관음의 상주처를 설정하여 관음신앙을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중고기에는 미륵보살이 화랑(花郞)으로 하생했다는 미륵하생신앙이 성행했다. 그런데 미륵신앙은 중대(中代)에도 계속 숭앙되었다. 경덕왕대의 진표(眞表)는 미륵상 앞에서 정진하여 미륵보살로부터 간자(簡子)를 전해받았고, 그후 금산사에 미륵장육상을 봉안했다. 이는 중대에도 진표로 대표되는 미륵하생신앙이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신라 불교의 교학사상(敎學思想)

565년 유학승 명관(明觀)이 불교경론 2,700여 권을 가져온 이래, 유학승들에 의해 경전이 전래됨에 따라 교학 연구가 깊이 있게 행해졌다.

5교9산
5교9산

고구려와 백제에서 성행하던 삼론학(三論學)뿐만 아니라 6세기에 새로 중국에 전래된 섭론학(攝論學)과 현장이 새로 전한 유식학(唯識學) 등도 수용·연구되었다. 그리고 계율에 관한 연구도 이루어져, 초기에는 소승율 위주였으나, 자장이 보살계를 황룡사에 설할 무렵부터 범망경보살계를 중심으로 한 대승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것은 삼국전쟁기였던 당시로서는 결과보다 동기를 중시하여 살생(殺生) 등에 대해 융통성을 보여주는 대승계를 중시하게 되었을 것이다. 통일 후 안정된 사회분위기 속에서 교학 연구가 발달하여 열반종·계율종·법성종·화엄종·법상종 등 교학의 연구가 활발했다.

의상(義湘)은 671년 귀국하여 부석사를 중심으로 화엄학을 강론하여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 등에 의해 크게 화엄종을 이루었다. 현상세계의 모든 대립물에 차별이 없다는 화엄사상은 통일 후 삼국민을 융화시키고, 신분간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신문왕 때 국로(國老)를 지낸 경흥(憬興), 원측(圓測)의 제자로서 효소왕 때 귀국한 도증(道證)과 그 제자 태현(太賢) 등에 의해 유식학이 연구되어 법상종(法相宗)이 형성되었다. 화엄학과 유식학을 비롯한 불교교학의 연구는 인간과 자연의 본질 및 현상세계를 분석함으로써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새로운 관계를 맺게 했다는 점에서 전통신앙보다 발전된 것이다.

하대에는 교학 연구가 훈고학적 성격을 띠게 되고 신앙은 의례화했다.

이러한 경향에 만족하지 못하던 승려들은 당(唐)에 유학하여 선종(禪宗)을 수용했다. 법랑(法朗)이 선덕·진덕 여왕 때 중국선종 4조 도신(道信)의 법을 처음 전해왔고, 도의(道義)가 821년 남종선을 전해왔지만 신라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826년 귀국한 홍척(洪陟)이 지리산에 실상사(實相寺)를 세워 흥덕왕과 선강(宣康)태자의 귀의를 받는 등 많은 제자에게 선법(禪法)을 전해 실상산파(實相山派)를 형성했다. 그후 고려초까지 가지산파(迦智山派)·동리산파(桐裏山派)·성주산파(聖住山派)·봉림산파(鳳林山派)·희양산파(曦陽山派)·사굴산파·사자산파(師子山派)·수미산파(須彌山派) 등이 성립하여 각지에서 크게 성행했으므로, 총칭하여 선문9산(禪門九山)이라 부른다.

이때 활동한 선사(禪師)들의 신분은 진골출신의 몰락자나 6두품 이하의 귀족, 지방세력인 호족, 가난한 생선장수 출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문9산이 전국 각지에 성립하여 지방에 등장한 호족 및 왕실의 적극적 지원을 받음으로써 지방문화가 활성화되어, 김해지방은 한때 선종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신라말 고려초에 성립한 9산선문은 법계(法系)가 긍양(兢讓)에 의해 바뀐 희양산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조도일(馬祖道一) 계통의 홍주종(洪州宗)의 법을 전해왔다. 이것은 홍주종이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바탕으로 했으므로, 선사들이 중국에 유학하기 전 공부한 화엄종의 사상과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즉 선종도 모든 인간이 불성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며,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一心]을 닦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선종은 그 이전의 사상체계가 출세간의 수행을 강조했던 것과 달리, 세간과 출세간의 한계를 없애고 세간에서의 삶 그대로가 부처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많은 승려들이 중국과 인도에 유학하고 돌아와 진리를 탐구했다. 그중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원측(圓測), 신방(神昉), 무상(無相),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혜초(慧超) 등이 있다.

신라의 불교교단

통일 이후 불교교단은 국가의 통제하에 있으면서 국통을 두고 지방에 주통·군통 등을 파견하여 관할했다. 그러나 왕실 및 귀족들은 재산을 기진하여 절을 짓고 불상을 만드는 불사를 했으므로, 불국사와 석굴암 등의 불교예술이 꽃필 수 있었다. 이러한 불사는 많은 경제력을 기울여야 했으므로, 그 폐해가 나타나 문무왕과 애장왕 때에는 사찰에의 기진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실이 성전이라는 기구를 두어 관할하는 원찰인 성전사원을 세우고 복을 빌었으므로 이 명령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따라서 흉년이 들면 유랑하는 농민들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으므로, 해인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치군이라는 승군 조직을 갖추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