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

원효대사

다른 표기 언어 元曉 동의어 모, 毛, 화정, 和諍, 서곡사미, 西谷沙彌, 백부논주, 百部論主, 해동법사, 海東法師, 해동종주, 海東宗主, 서당화상, 誓幢和尙, 고선대사, 高仙大師
요약 테이블
출생 617년(진평왕 39)
사망 686년(신문왕 6)
국적 신라, 한국
종교 불교
본관 경주(慶州)

요약 당나라로 유학 가던 길에 해골물 일화를 통해 득도한 신라의 승려. 속성은 설, 아명은 서당, 신당, 이름은 사례이며 원효는 출가한 뒤의 이름으로 의상과 함께 고구려의 고승으로서 보덕에게 <열반경>, <유마경> 등을 배웠다.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 위해 당항성으로 가는 중 어느 토굴에서 자다 목이 말라 바가지에 있던 물을 달게 마셨는데, 다음날 아침 보니 토굴이 아닌 무덤에서 해골에 고인 물을 마셨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고 깨달은 뒤 유학을 포기했다. 불교뿐 아니라 유교와 도교, 법가사상 등에도 해박했으며,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후일 대학자가 된 설총을 낳았다. 현재는 원효대교와 원효로 등으로 이름을 기리고 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 생애
  3. 주요 활동과 업적
  4. 영향과 평가
  5. 원효의 사상

개요

신라의 고승. 속성은 설(薛). 아명은 서당(誓幢)·신당(新幢) 이름은 사례(思禮). 원효라는 이름은 출가한 뒤 지은 이름으로, 첫새벽(始旦)을 뜻한다.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 내말 설담날의 아들이며, 설총의 아버지이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지 90년 만에 태어난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불교사상가이자 사회지도자였다(신라의 불교). 그는 해박하고 심오한 불교 학해(學解)로 방대한 분량의 불교 관계 저술을 남겼다. 시호는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이다.

원효(元曉)
원효(元曉)

초기 생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어머니가 그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낳을 때에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 아명인 서당의 당은 속어로 '털'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서당은 '새털'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하고 달이 찼을 때 집 근처의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어 다급한 중에 남편의 털옷을 그 밤나무에 걸고 그 밑에 자리를 마련하여 아기를 낳은 데서 얻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하면 14~15세 때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으며 남달리 영특하여 나중에 불법의 깊은 뜻을 깨달음에 있어서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다.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시에 의하면 원효는 의상(義湘)과 함께 고구려 고승으로서 백제 땅 전주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간 보덕(普德)에게 〈열반경〉·〈유마경〉 등을 배웠다. 또한 〈삼국유사〉 낭지내운(朗智來雲)에 의하면 원효가 반고사(磻高寺)에 있을 때 영취산 혁목암(赫木庵)의 낭지가 그로 하여금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쓰게 했는데, 원효는 그 글을 지어 낭지에게 전달하면서 글 끝에 "서쪽 골 사미는 엎드려 동쪽산의 상덕 고암 앞에 절합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는 원효가 낭지에게 사사했거나 단순히 학덕 높은 노화상으로 존경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유사〉 석혜공전(釋惠空傳)에는 당대의 신승(神僧) 혜공(惠空)이 만년에 항사사(恒沙寺)에 있을 때 원효가 여러 경전의 소를 찬술하면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는 언제나 혜공에게 가서 질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주요 활동과 업적

원효는 650년(진덕여왕 4) 의상과 함께 당나라 현장(玄奘 : 602~664)에게 유식학(唯識學)을 배우려고 요동에까지 갔다가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돌아왔다. 661년(문무왕 1)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바닷길로 당나라에 가기 위해 당항성(黨項城)으로 가는 도중 비 오는 밤길인지라 어느 토굴(土龕)에서 자게 되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바가지에 담긴 물을 달게 마셨는데, 이튿날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닌 오래된 무덤이었고, 마신 물은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토하다가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라고 깨닫고, 유학을 포기했다.

삼국유사
삼국유사

그는 "또 무엇을 구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하여 더이상 입당 유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곧바로 되돌아와 이후 저술과 대중교화에 몰두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불교와 일반 서민불교 사이에는 여전히 괴리가 있었다. 혜공·혜숙(惠宿)·대안(大安) 등이 일반 서민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그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생활화시켰다.

원효가 하루는 거리에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을 것이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고 노래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전해듣고 원효가 나라에 크게 쓰일 인재를 낳고자 함을 알고나서 과부였던 둘째 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원효를 이어주었다. 그는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후일 대학자가 된 설총(薛聰)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잠자리로 계를 어긴 후에는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자칭하면서 지방의 촌락, 길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바가지를 두드리고 〈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 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가 스스로 소성거사라 부른 것은 실계로 인한 속죄의 한 방법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대중교화의 선구자인 혜공이 등에 삼태기를 지고 길거리에서 대취하여 노래하고 춤추었던 것이나 대안이 특이한 옷차림으로 장판에서 동발(銅鉢)을 치면서 "대안 대안"을 외친 것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효는 대중교화의 행적을 마친 뒤에는 다시 소성거사 아닌 원효화상으로 돌아가 혈사(穴寺)에서 70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영향과 평가

원효는 불교뿐 아니라, 당대의 지배적인 사상이었던 유교와 도교, 법가사상 등에도 해박했다. 그는 그때까지 전승되는 불경을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 주석(註釋)을 하는 데 힘써서 100여 권의 글을 남겼다고 전해지지만, 현존하는 것은 일부이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은 원효의 일미(一味) 화쟁(和諍) 사상을 잘 보여주는 저작으로, 외국에 전파되어 중국과 일본의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울에 있는 원효대교와 원효로는 원효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명명된 것이다.

원효의 사상

원효
원효

저술의 경향을 분석·검토해 보면 원효의 교학은 유식계에 비중을 가장 많이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범부들이 현재의 미오한 심성으로부터 깨달음의 심원(心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오한 현실심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는 유식의 심식설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현실심의 분석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 논리학인데 이에 대한 관심이 인명론·판비량론 등에 관련된 저술에서 나타난다. 심식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하고 난 뒤에는 이제 깨달음에로 향한 실천 수행의 길에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에서 원효는 수행자 각자의 근기에 따라 3가지 관문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삼매의 방법에 의한 수행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 교학 및 계율에 의한 수행 방법을 제시했는데 여기서는 수행단계의 계위와 수행의 계위에 해당되는 구체적인 수행할 바의 대상을 논구하고 있다. 셋째, 염불에 의한 수행방법의 제시로는 무량수경·미륵상생경·밀륵하생경 등에 대한 정토계의 여러 연구물을 들 수 있다. 이리하여 수행인들이 각기 근기에 맞는 수행 절차를 밟은 후 도달하게 되는 심원의 경지에 대해서는 반야·열반·승만·화엄 등의 경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충분히 언급하고 있다.

결국 그의 사상은 미망의 인간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해 먼저 인간의 심신을 철저히 분석하고 분석이 끝난 후에는 각자의 근기에 따라 수행의 실천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처음부터 그의 학문은 현실심의 분석을 위한 심식연구-수행실천-깨달음이라는 윤리적 목표에 있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원효학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 연구 업적으로는 그의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기신론별기 起信論別記〉를 들 수 있다.

대승기신론소
대승기신론소

그는 마명(馬鳴)의 〈대승기신론〉을 만나자마자 이상의 그의 학문적 목표와 너무나 일치함에 크게 감명을 받아 기신론에 관한 9종의 연구서를 썼다. 〈대승기신론〉은 인도에서 그당시 대립되고 있던 양대 불교사상, 즉 중관파(中觀派)와 유가파(瑜伽派:유식파)의 사상을 지양·화합시켜 진(眞)과 속(俗)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미오한 현실생활(俗) 가운데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추구하고 수행함에 의하여 완성된 인격(眞)을 이루어 갈 수 있으며, 깨달음의 단계(眞)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염오한 단계(俗)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는 것임을 주장함으로써 진속일여(眞俗一如)·염정불이(染淨不二)의 사상을 잘 나타낸 논서이다.

원효는 이 〈대승기신론〉에 대하여 몇 가지 특징적인 기술을 하고 있다. 첫째, 그는 〈대승기신론〉의 성격을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의 지양·종합이라고 판석한다. 이는 〈대승기신론〉이 일심(一心)을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의 2가지로 크게 나눈 후 심진여문에서는 마음의 청정한 면을 묘사하고 심생멸문에서는 마음의 염정연기(染淨緣起), 즉 마음이 물들어가는 현상과 이에서 벗어나 심원으로 가는 단계를 밝히고 있는 데서 매우 타당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원효의 이러한 해석은 〈대승기신론〉 출현의 시기에 인도 불교사상계에서 중관파와 유가파가 서로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었던 사실에도 부응한다. 원효를 거의 그대로 답습한 법장은 이 점에 있어서는 견해를 달리하여 〈대승기신론〉을 여래장연기종(如來藏緣起宗)이라 판석했다. 원래 여래장사상은 중국 화엄종의 선구인 지론종(地論宗) 남도파(南道派)들에 의해 성하게 연구되어왔던 것으로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은 이 지론종 남도파들의 영향에 의해 〈대승기신론〉을 여래장연기종이라 판정한 것이다. 둘째, 원효는 우리의 미망(迷妄)한 마음, 즉 무명(無明)이 본래의 청정한 마음 즉 진속을 훈습하여 불각심(不覺心)이 처음으로 일어난 무명업상(無明業相), 이 무명업상은 즉 극미(極微)한 동념(動念)에 의해 소연경상(所緣境相)을 볼 수 있게 되는 전상(轉相), 그리고 이 전상에 의해 경계를 나타내는 이상(理想) 등 3가지 미세한 마음 곧 삼세식(三細識)이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 위(位)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이 삼세·아뢰야식설은 〈대승기신론〉 본문에 직접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법장에 의해 그대로 답습된 원효의 독특한 주장이다. 이처럼 각과 불각(不覺)의 2가지 뜻을 가진 화합식(和合識)으로서의 아뢰야식에 삼세라는 미세한 마음들을 배대하여 화합식 중의 불각 즉 생멸분(生滅分)인 무명업상·전상·현상을 제멸하면 바로 그 자리가 불생불멸분(不生不滅分), 즉 각의 상태가 된다고 하였으니 이는 유식가에서의 아뢰야식이 막연한 잠재심인 데 비해 〈대승기신론〉의 아뢰야식은 3가지 미세한 마음으로 구체화시킴으로써 환멸(還滅)의 구체적 단계를 제시한 것이며, 따라서 수행면에 있어 더욱 실천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중관파와 유식학파의 양대 주장의 조화라는 〈대승기신론〉의 성격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셋째, 원효는 아뢰야식의 각의에 의해 자성청청한 깨달음의 상태로 환멸한 후의 본각의 성격 즉 지정상(智淨相)과 불사의업상(不思議業相)에 대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2가지 면으로 배대시킴으로써 심원에 도달한 각자는 깨달은 상태(自利)에 안주하지 말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적극 노력해야 함(利他)을 역설한다.

이는 속에서 진으로 향해가는 길(上求菩提)을 명시했던 앞서의 삼세·아뢰야식설에 비해 이제는 진으로부터 속으로 돌아와 중생과 더불어 삶을 의미하는 것이니 바로 하화중생(下化衆生)이다. 그의 이러한 진속불이로부터 나온 자리·이타의 겸수야말로 그가 〈대승기신론소〉·〈기신론별기〉에서 강조한 그의 중심사상인 것이다.

원효는 많은 저술에서 자신의 주장을 폄에 있어 '화쟁'(和諍)이라는 방법을 썼다.

그는 어느 일종(一宗)·일파(一派)에 구애됨이 없이 "만법(萬法)이 일불승(一佛乘)에 총섭되어야 하는 것은 마치 대해(大海) 중에 일체 중류(衆流)가 들어가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하여 대·소승, 성(性)·상(相)·돈(頓)·점(漸)의 상호 대립적인 교의를 모두 융회하여 일불승(一佛乘)에로 귀결시키려 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뭇 경전의 부분적인 면을 통합하여 온갖 물줄기를 한맛의 진리 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불교의 지극히 공변된 뜻을 열어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쟁론들을 화해시킨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화쟁인 것이다.

원효의 이 화쟁방법은 근원적으로는 석가모니의 화합(和合)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당시 수많은 사상체계들이 서로 대립, 충돌을 일으키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논쟁에 끼어든 적이 없었다.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논의는 진실한 실천적 인식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실하게 살아가는 길과 진실에 대한 실천적 인식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했을 뿐, 베다(veda)의 권위를 배척하고 모든 형이상학적 논의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했다. 불교에 있어서의 화(和)의 원리는 이처럼 실천원리를 중시하는 석가모니에서 그 싹이 나타난 셈이고 이는 대중교화에 뜻을 두어 진속일여를 주장한 대승불교 후기에까지 면면히 이어진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 이후 1200여 년 만에 신라통일기에 나타난 기치를 높이 든 것은 바로 석가모니 이후 대승에 이르기까지의 화의 정신의 시대적 재현 또는 재창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저서로 100여 종 240여 권(또는 85종 170여 권)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연구범위도 대·소승, 경·율·논 등 거의 모든 부문을 망라하고 있다. 현존하는 것은 19부 22권뿐이며 그중 중요한 것은 〈대승기신론소〉 2권, 〈대승기신론별기〉 1권, 〈이장의 二障義〉 1권,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 3권, 〈법화경종요 法華經宗要〉 1권, 〈대혜도경종요 大慧度經宗要〉 1권, 〈열반경종요 涅槃經宗要〉 1권, 〈무량수경종요 無量壽經宗要〉 1권, 〈화엄경소 華嚴經疏〉 제3권, 〈중변분별논소 中邊分別論疏〉 제2권,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 단편(斷片)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