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

유식

다른 표기 언어 vijnapti-matrata , 唯識

요약 자기를 둘러싼 자연계와 자기를 포함하는 모든 존재는 자기의 근저에 있는 마음인 아뢰야식이 알게 한 것 또는 변화시켜 드러낸 것임을 뜻한다. 이에 따라 오직 마음만 있고 외계에 사물적 존재는 없다고 본다.
유는 그밖에 상정된 대상을 부정하기 위한 말로 잘못 분별된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데에 유의 의미가 있다. 한편 식은 그러한 대상을 망분별하는 주체의 측면을 표시한다. 이 경우의 식은 망분별되는 대상이 비유인 것과는 달리 실재하는 유라고 간주된다.
요가수행을 통해 유식관이라는 구체적인 관찰법을 교리적으로 조직하고 체계화했다. 마음이 마음을 본다는 인식구조설에 근거하여, 모든 것은 마음의 드러남에 불과하며 자기 및 외계를 실체라고 보는 마음에서 괴로움과 오류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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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유식설의 핵심
  3. 인도의 유식설
  4. 중국의 유식설
    1. 개요
    2. 〈십지경론 十地經論〉에 의한 전개
    3. 〈섭대승론〉에 의한 전개
    4. 〈성유식론 成唯識論〉에 의한 전개
  5. 한국의 유식사상

개요

자기를 둘러싼 자연계와 자기를 포함하는 모든 존재는 자기의 근저에 있는 마음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알게 한 것 또는 변화시켜 드러낸 것임을 뜻한다.

이에 따라 오직 마음만 있고 외계에 사물적 존재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 마음도 역시 허깨비나 꿈과 같은 존재로 보아 궁극적으로는 그 존재성까지 부정하기 때문에 서양 사상에서 말하는 유심론(唯心論)과는 다르다.

유식설의 핵심

(識)은 '알게 한다'는 동사에서 유래한 추상명사로 표식·기호 등을 의미한다.

유식학파의 술어로는 마음으로 비추어낸 표상(表象)을 가리킨다. 유(唯)는 그밖에 상정된 대상을 부정하기 위한 말이다. 여분으로 상정된 그 대상은 망분별(妄分別), 즉 잘못 분별된 것이고, 그것은 '분별된 자성(自性)', 즉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 규정된다. 이처럼 잘못 분별된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 비유(非有)라고 하는 데에 유(唯)의 의미가 있다.

한편 식은 그러한 대상을 망분별하는 주체의 측면을 표시한다. 이 경우의 식은 망분별되는 대상이 비유인 것과는 달리 실재하는 (有)라고 간주된다. 다시 말하면 망분별한다는 사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유(有)는 망분별된 채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로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망분별은 망분별된 대상의 비유와 밀접하게 연관되고, 그결과 그것의 유(有)는 동시에 비유의 의미를 함축하게 된다.

이러한 성질을 갖는 망분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일 수는 없다. 이런 성질을 강조할 때 그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는 자성', 즉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고 규정된다. 또 망분별된 것이 비유이기 때문에 망분별의 작용도 비유인 점을 가리켜 '완성된 자성', 즉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한다.

망분별하는 식이든 망분별되는 대상이든 모두가 비유라는 것이 세계의 진실한 본래적 성질이라는 뜻이다. 이상의 변계소집성·의타기성·원성실성은 '3자성'(三自性) 또는 '3성'(三性)이라 불리는 유식사상의 중심개념이다.

유식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마음을 8종으로 분류하여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 등 8식을 세웠다. 이중 앞의 5식을 전오식(前五識)이라 하고 뒤의 3식을 각각 제6식·제7식·제8식이라고 한다. 제7식(말나식)·제8식(아뢰야식)은 무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3성설(三性說)을 새롭게 내세우고 있다. 모든 존재의 양상을 마음속으로 환원하여 앞에서 말한 3종으로 분류했다. 3성은 마음의 본래적 양상인 동시에 포괄적으로는 존재의 본래적 양상이다.

요가수행을 통해 유식관이라는 구체적인 관찰법을 교리적으로 조직하고 체계화했다. 이중에서 가장 큰 특징은 아뢰야식을 온갖 존재를 낳는 근본식(根本識)으로 삼고, 그 위에 말나식과 의식을 세운 점이다. 아뢰야식이란 장식(藏識)으로 번역되고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으로 별칭되듯이, 그 속에 과거에 지은 업의 영향이 종자로 보존되는 동시에 현재·미래에 걸쳐 자기의 심신 및 자연계를 낳는 근원체이다. 마음 이외에 사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식설에서는 마음을 객관인 소취(所取)와 주관인 능취(能取)로 이분하는데, 능취로서의 마음인 견분(見分)이 사물의 모습으로 유사하게 드러난 소취로서의 마음인 상분(相分)을 바라본다고 한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마음이 마음을 본다는 인식구조설에 근거하여, 모든 것은 마음의 드러남에 불과하며 자기 및 외계를 실체라고 보는 마음에서 괴로움과 오류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이밖에 3성을 부정적으로 표현한 상무성(相無性)·생무성(生無性)·승의무성(勝義無性)의 3무성설도 유식설을 구성하는 중요한 사상이다. 유식설은 식 이외의 존재를 부정하여 '식만 있고 대상세계는 없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을 주장하지만, 궁극의 경지에서는 그런 식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식무경무(識無境無), 즉 '식도 없고 대상세계도 없다'는 입장에 서서 반야(般若)의 사상(空思想)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다만 요가라는 실천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근본자세에서 보면, 수행단계에서는 적어도 마음, 즉 식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 식이 존재하는 양상을 수행에 의해 오염된 상태로부터 청정한 상태로 변혁하기를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뢰야식 속의 온갖 오염된 종자를 소멸하고 청정한 종자만으로 가득 채우는 전의(轉依)가 유식설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도의 유식설

불교는 처음부터 유심론적 경향이 강한 사상이지만, 그런 경향이 극에 달하여 유가행파에 의해 정리된 것을 대승불교의 유식설이라고 한다. 이 학설이 성립된 요인의 하나로서 지적되는 것은 요가 체험이다.

〈대비바사론 大毘婆沙論〉 등에 의하면 이미 부파불교시대부터 유가사라고 불리는, 요가를 즐겨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의 선정 체험, 즉 "모든 사물은 마음이 지어낸 영상에 불과하다"는 체험이 유식설을 낳게 한 근본 원인이었다고 생각 된다. 그밖에 〈화엄경〉에 보이는 삼계유심설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 반야경과 중관파의 공사상을 허무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생각을 시정할 헉가 제기되었다는 점, 윤회의 주체를 추구한 끝에 아뢰야식이라는 근본식을 발견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유식설은 인도에서 3~4세기 무렵 미륵에 의해 주창되고 무착과 세친 형제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세친은 〈유식삼십송 唯識三十頌〉에서 30개의 게송으로 이제까지의 사상들을 정리하고, 식전변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여 유식의 교의를 한층 더 체계화했다.

그후에는 〈유식삼십송〉의 내용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하여 유가행파는 크게 무상유식파와 유상유식파로 분열되었다. 인도 철학의 인식론에서는 외계에 존재하는 사물의 형상을 마음의 본래 상태와는 관계없이 그대로 인식할 것을 주장하는 무상식론과, 외계의 사물은 마음 속에 생긴 형상에 의해 추량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유상식론이 대립했다. 유가행파의 기본적 입장은 '마음이 마음을 본다'는 것이기 때문에 유상식론에 속한다.

그런데 마음속 형상의 존재성을 둘러싸고 유가행파 안에서도 대립이 일어나, 마음 속의 형상을 비(非)실재요 허위라고 간주하는 무상유식파와 형상은 일방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유상유식파로 구분되었다. 무상유식파는 미륵을 시발로 하여 무착·세친·안혜·진제로, 유상유식파는 진나를 시발로 하여 무성·호법·계현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현장은 인도에 유학하여 계현에게 배움으로써 유상유식파의 맥을 이었다.

유식설이 인도 철학사에 공헌한 업적의 하나는 인명이라고 불리는 논리학을 발전시킨 점이다. 이미 미륵·무착의 시대부터 논리학은 고찰의 한 대상이었는데, 진나가 신(新)인명을 확립하면서부터 불교논리학은 급속도로 발전해갔다. 유상유식파의 사람들은 마음 속의 형상, 특히 언어를 중시하여 언어에 의한 인식이나 판단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고자 했는데, 티베트 문헌에서는 이들을 논리추종파라고 호칭하고 있듯이 주로 논리학에 전념했다. 이런 경향은 11세기에 활동했던 즈냐나슈리미트라(Jñānasrῑmitra)나 라트나키르티(Ratnakirti)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중국의 유식설

개요

유식설은 5세기초에 담무참이 〈보살지지경 菩薩地持經〉을, 구나발마가 〈보살선계경 菩薩善戒經〉을 번역함으로써 중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러나 무착·세친의 본격적인 유식설은 6세기 이후 다음과 같은 3가지 통로로 전래되어 발전했다.

〈십지경론 十地經論〉에 의한 전개

북위의 선무제(宣武帝) 때인 508년 늑나마제·보리유지·불타선다가 뤄양[洛陽]에 와서 세친의 〈십지경론〉과 무착의 〈섭대승론 攝大乘論〉을 번역했다. 특히 〈십지경론〉에 서술된 아뢰야식설은 당시 중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상이었기 때문에 이 문헌이 소개된 뒤 이에 관한 연구가 급속히 번성했다. 이어 이 문헌을 근거로 삼는 지론종이 성립했다.

지론종은 남도파와 북도파로 분열했는데, 남도파에서는 아뢰야식을 청정무구한 진식으로, 북도파에서는 생멸을 겪으며 오염된 망식으로 간주했다. 북도파는 이내 세력을 잃고 남도파는 육조(六朝)시대부터 수나라 시대까지 번영했으나, 수나라 말기로부터 당(唐)나라 초기에 걸쳐 섭론종 혹은 화엄종에 흡수되었다.

〈섭대승론〉에 의한 전개

진제는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초청으로 548년 건업으로 왔다가 중국 내부의 동란으로 각지를 방랑하면서 많은 문헌을 번역했다. 특히 무착의 〈섭대승론〉을 번역함으로써 교리적으로 체계화된 유식설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결과 〈섭대승론〉을 근간으로 삼는 섭론종이 성립했다.

섭론종 유식설의 특징은 아뢰야식을 청정한 면과 오염된 면이 함께 있는 진망화합식으로 간주하고, 다시 아뢰야식보다 심층에 순수무구한 아마라식이라는 제9식을 세운 점이다. 섭론종은 지론종의 북도파를 흡수함으로써 한때 번영했으나 당나라 시대에 법상종이 흥륭함으로써 급속히 쇠퇴해갔다.

〈성유식론 成唯識論〉에 의한 전개

중국 최대의 유식학파는 현장및 그의 제자 규기가 세운 법상종이다. 현장은 인도로 출발한 지 19년 만인 645년 장안에 귀국한 후, 인도에서 가져온 많은 경전과 논서의 번역사업에 전념하여 입적할 때까지 19년 동안 74부 1,335권에 달하는 번역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의 최대 목적은 스승인 계현을 통해 습득한 유상유식파 계통의 호법의 유식설을 중국에 소개하는 것이었다.

〈성유식론〉의 번역은 이런 목적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이 논서는 세친의 〈유식삼십송〉에 대한 주석가 10명의 해설을 종합하여 바로잡은 것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호법의 해설이 정통설로 선양되어 있다. 규기는 이에 대한 주석서 〈성유식론술기〉와 〈성유식론추요〉를 저술하여 현장이 전한 유식설을 하나의 체계로 정리해냄으로써 법상종의 개창자로 간주된다. 이후 규기의 문하에서 혜소(慧沼)와 지주 등이 맥을 이어 호법의 유식설에 대한 연구를 한층 심화시킴으로써 법상종은 크게 흥륭하게 되었다.

한국의 유식사상

일찍이 원측(圓測:613~696)을 비롯한 신라인들은 유식학을 종지로 삼는 법상종의 성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삼국의 통일 이전에 유식학자들은 주로 중국에서 더 많은 활동을 펼쳤고, 통일 이후에는 신라에서도 유식학의 연구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유식학자로는 원측·도증(道證)·승장(勝莊)·신방(神昉)·경흥(憬興)·대현(大賢)·도륜(道倫)·영인(靈因)·행달(行達)·순경(順璟)·현일(玄一)·오진(悟眞) 등을 들 수 있다.

원측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현장이 인도에서 전래한 호법 계통의 유상유식을 연구했으며, 안혜 계통의 무상유식설을 비롯한 불교학 전반을 두루 섭렵했고, 현장과 규기가 법상종을 일으킬 무렵에는 이미 독자적인 불교관이 확립되어 있었다.

당시 법상종은 규기의 자은학파(慈恩學派)와 원측의 서명학파(西明學派)로 양분되어 유식학에 관한 논쟁이 치열했다. 두 학파는 교상판석(敎相判釋)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규기는 호법의 3시교판(三時敎判)을 그대로 따랐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함경 阿含經〉·〈반야경 般若經〉·〈해심밀경 解深密經〉으로 대표되는 세시기로 나누고, 이중 〈해심밀경〉은 가장 심오한 단계의 가르침으로 설정하는 교상판석을 말한다.

이에 대해 원측은 보다 회통적(會通的)인 관점에서 〈반야경〉의 가르침도 궁극적으로는 〈해심밀경〉의 삼무성설(三無性說) 등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또한 유식학의 핵심인 심분설(心分說)에 있어서도 원측은 규기와 견해를 달리했다. 규기는 호법의 사분설(四分說)을 전적으로 따른 반면, 원측은 안혜의 일분설(一分說), 진나의 삼분설(三分說) 등도 궁극적으로는 호법의 사분설과 위배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회통적 입장을 견지했다.

규기의 자은학파는 불성론(佛性論)에 있어서도 모든 중생은 전생의 업에 따라 선천적으로 규정된 근기(根機)를 지니고 있다고 보고, 중생을 정성보살(定性菩薩)·정성연각(定性緣覺)·정성성문(定性聲聞)·부정종성(不定種性)·무종성(無種性) 등의 5가지 범주로 나누었다. 이 가운데 무종성·정성연각·정성성문은 영원히 성불(成佛)할 수 없다고 하는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원측은, 〈해심밀경〉·〈능가경 楞伽經〉 등의 오성각별에 관한 교설이 하나의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며, 이들이 결정적으로 영원히 성불할 수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고 함으로써 유식사상을 〈화엄경 華嚴經〉·〈법화경 法華經〉 등의 일승사상(一乘思想)과 조화시켰다.

이와 같은 원측의 유식학은 모든 이론들을 타파하면서 동시에 살려내는 당시 신라 불교의 화쟁적(和諍的) 학풍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도증은 원측의 제자로서 〈성유식론요집 成唯識論要集〉·〈성유식론강요 成唯識論綱要〉·〈섭대승론세친석론소 攝大乘論世親釋論疏〉·〈변중변론소 辯中邊論疏〉·〈대인명론소 大因明論疏〉 등 13종의 저서목록이 전한다.

그의 저술은 모두 산실되어 현존하지 않으나, 규기의 제자인 혜소가 지은 〈성유식론요의등 成唯識論了義燈〉과 일본의 유식학자인 선주(善珠)의 〈유식요의등증명기 唯識了義燈增明記〉 등의 문헌들에 인용되어 있어 그의 유식사상을 엿볼 수 있다. 승장은 처음에는 현장의 문하에 입문했다가 후에 원측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성유식론결 成唯識論決〉·〈대인명론술기 大因明論述記〉 등 7종의 저서목록이 전하며, 이중 현존하는 것은 〈범망경보살계본술기 梵網經菩薩戒本述記〉 4권뿐이다.

신방은 현장의 수제자 4명 중 한 사람으로 대승방(大乘昉)으로도 불린다. 저서에는 〈성유식론요집 成唯識論要集〉·〈현유식론집기 顯唯識論集記〉·〈십륜경소 十輪經疏〉 등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고, 그가 현장과 함께 번역한 〈대승대집지장십륜경 大乘大集地藏十輪經〉의 서문만이 전한다. 순경은 인명학(因明學)의 대가로 중국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그는 중국에 가지 못했으나 신라에서 현장의 유식비량(唯識比量)을 보고는 상위결정(相違決定)의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에 능위(能違)의 비량(比量)을 만들어서, 이를 당으로 가는 사신편에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이미 현장이 입적(入寂)한 지 2년 뒤의 일이였으므로 규기가 대신 받아보고는 매우 감탄했다고 전한다. 그는 신라에서 많은 저술활동을 했다고 하나, 〈성유식론요간 成唯識論料簡〉·〈인명입정리론초 因明入正理論抄〉 등의 저술목록만 전하고 있다.

경흥은 신문왕대에 국사(國師)를 지냈다고 하며, 대현과 함께 신라 유식가(唯識家)의 초조(初祖)로 일컬어졌다.

그는 원효 다음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40부 250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무량수경연의술문찬 無量壽經連義述文贊〉·〈삼미륵경소 三彌勒經疏〉·〈금광명최승왕경약찬 金光明最勝王經略贊〉 등이다. 그의 저술목록을 보면, 〈성유식론폄량 成唯識論貶量〉·〈유가론석론기 瑜伽論釋論記〉·〈인명론의초 因明論義鈔〉 등 많은 유식학 관계 저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현은 경덕왕대의 사람으로 〈삼국유사 三國遺事〉에서는 그를 유가조(瑜伽祖) 대덕(大德)이라고 했으며, 유식학과 인명학에 통달하여 국내외 학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고 전한다.

그는 도증에게 유식학을 배웠다고 전하며, 52부 12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술을 남겨 원효·경흥과 함께 신라의 3대 저술가로 꼽힌다. 그의 저서 역시 대부분 산실되고 현존하는 것은 〈성유식론고적기 成唯識論古迹記〉·〈범망경고적기 梵網經古迹記〉·〈기신론내의약탐기 起信論內義略探記〉·〈약사본원경고적기 藥師本願經古迹記〉 등이다.

〈성유식론고적기〉는 현장이 번역한 〈성유식론〉에 대한 주석서로 대승·소승의 경전들을 비롯하여 유명한 유식학자들의 이견(異見)을 인용하고 그 차이를 논한 것이 특징적이다. 대현은 중국의 혜소·지주 등이 원측의 학설을 무조건 배척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측과 도증, 현장과 규기 등의 이론들을 서로 비교·검토하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비판적 관점에서 그의 유식사상을 펴나갔다.

도륜은 그의 〈유가론기 瑜伽論記〉에 '해동흥륜사사문도륜집찬'(海東興輪寺沙門道倫集撰)이라고 기록된 것을 통해서 신라의 승려임을 알 수 있을 뿐 그밖의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24권으로 구성된 〈유가론기〉는 미륵의 〈유가사지론 瑜伽師地論〉 100권에 대한 방대한 연구서로서 드물게 남아 있는 신라 유식학 관계문헌이다. 특히 여기에는 원측·원효·도증·혜경(慧景)·행달·영인·현범(玄範)·신방·현일 등 저술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신라 유식학자들의 학설을 많이 소개하고 있어 주목된다. 한국의 유식사상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고려시대 이후에는 선종(禪宗)이나 화엄종(華嚴宗)에 비해 교리적인 연구는 활발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