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측

원측

다른 표기 언어 圓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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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613(진평왕 35)
사망 696(효소왕 5)
국적 신라, 한국

요약 원측은 신라 왕족 출신이었으나 중국에서 활동했던 유식학의 대표적 사상가이며 <해심밀경소>, <성유식론소> 등의 저서가 있다.
3세에 출가했으며, 일찍이 중국에 유학하여 15세에 법상과 승변에게 유식학을 배웠다. 당나라 태종이 그 명성을 듣고 직접 도첩을 내려 출가를 허락하고 원법사에 머무르게 했다. 어학에 소질이 있어서 중국어·범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여 나중에 불경 번역에도 참여했다. 645년 현장이 인도 구법여행에서 돌아오자 원측은 그에게서 새로운 유식학을 배웠다. 658년 서명사가 낙성되자 대덕이 되어 신유식학 관계의 저술에 힘쓰는 한편, 현장을 도와 유식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676년 인도 승려 지바하라가 가져온 <대승밀엄경>과 <대승현식경> 등의 인도 불경의 중국어 번역작업에 참여했다.

이름은 문아(文雅). 신라왕족으로서 경주 모량부(牟梁部) 출신이다.

3세에 출가했으며, 일찍이 중국에 유학하여 15세에 법상(法常)과 승변(僧辨)에게 유식학을 배웠다. 당나라 태종이 그 명성을 듣고 직접 도첩(度牒)을 내려 출가를 허락하고 원법사(元法寺)에 머무르게 했다. 그곳에서 비담(毘曇)·성실(成實)·구사(俱舍)·파사(婆娑) 등의 학문을 폭넓게 연구했다. 어학에 소질이 있어서 중국어·범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여 나중에 불경 번역에도 참여했다. 645년 현장(玄奘)이 인도 구법여행에서 돌아오자 원측은 그에게서 새로운 유식학을 배웠다.

658년 서명사(西明寺)가 낙성되자 대덕(大德)이 되어 신유식학 관계의 저술에 힘쓰는 한편, 현장을 도와 유식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때 서명사를 떠나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 머무르다가, 다시 그곳에서 30여 리 떨어진 외딴 곳에 암자를 짓고 8년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채 수행에 정진했다.

그후 서명사 승려들의 요청에 따라 서명사로 돌아가 〈성유식론 成唯識論〉을 강의했다. 676년 인도 승려 지바하라(地婆訶羅:日照)가 인도에서 〈대승밀엄경 大乘密嚴經〉과 〈대승현식경 大乘顯識經〉 등의 불경을 가지고 와 중국어로 번역할 때, 번역을 도울 대덕 5명 중 한 사람으로 뽑혀 증의(證義)로서 참여했다. 당시 당나라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원측을 살아 있는 부처처럼 존경하여, 신라 신문왕이 여러 번 원측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693년에는 인도 승려 보리유지(菩提流志)가 가져온 〈보우경 寶雨經〉을 번역했다. 695년에는 실차난타(實叉難陀)가 우전국(于闐國)에서 가져온 〈화엄경〉을 새로 번역할 때 참여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입적했다. 제자들이 사리를 용문산 향산사(香山寺)에 안치했다. 그뒤 제자인 자선(慈善)과 승장(勝莊) 등이 사리를 나누어 종남산 풍덕사(豊德寺)에 사리탑을 세웠다.

현재 중국 시안[西安]의 흥교사(興敎寺)에 그의 탑묘가 남아 있으며 탑묘 안에 초상이 새겨져 있다. 후대에 송복(宋復)이 지은 〈대주서명사고대덕원측법사불사리탑명 大周西明寺故大德圓測法師佛舍利塔銘〉이 있다.

그의 불교사상은 유식학이 중심이다. 당시 현장은 인도에서 호법(護法) 계통의 신유식(新唯識:有相唯識)을 연구하고 돌아와서 재래의 진제(眞諦) 계통의 구유식(舊唯識:無相唯識)을 비판했다. 현장은 나아가 유식사상과 나란히 대승불교철학의 양대 조류를 형성하고 있던 중관(中觀) 사상과는 더욱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현장을 계승한 자은사(慈恩寺)의 기(基)는 이러한 입장에서 호법의 학설을 정통으로서 강조했는데, 기 일파는 법상종(法相宗)에서 정통파로서 장안(長安) 불교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원측은 유식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심식설(心識說)과 삼성·삼무성설(三性三無性說)의 해석을 둘러싸고 진제 계통의 구유식을 비판하면서도 그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 기의 학설과는 경향을 달리했다. 중관 사상에 대하여도 대립을 화합시키려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중관과 유식을 폭넓게 수용하여 정확한 이해에 힘쓰는 한편 양자의 사상적 대립을 지양하고자 했고 법상종이면서도 성종(性宗)적인 색채를 뚜렷이 띠었다. 인간관에 있어서 기 일파가 주장하는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에 반대하고 화엄학이나 천태학에서 주장하는 일성개성설(一性皆成說)에 따랐다. 그결과 원측의 이러한 사상은 법상종 정통파를 자처하는 기 일파로부터 비판을 받고 이단시되었다.

그러나 원측의 사상은 계속 이어져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는데, 여기에는 신라 출신의 승려들이 주로 참여했다. 원측의 제자 도증(道證)은 692년(효소왕 1)에 신라로 귀국하여 원측의 유식학을 신라에 전했다. 또한 원측의 후계자 담광(曇曠)이 원측의 〈해심밀경소 解深密經疏〉를 둔황[敦煌] 지방으로 가지고 간 것이 계기가 되어 법성(法成)에 의해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해심밀경소〉 10권, 〈성유식론소 成唯識論疏〉 20권, 〈주별장 周別章〉 3권, 〈유식이십론소 唯識二十論疏〉 2권, 〈관소연연론소 觀所緣緣論疏〉 2권, 〈인명정리문론본소 因明正理門論本疏〉 2권, 〈반야심경찬 般若心經贊〉 1권, 〈인왕경소 仁王經疏〉 6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