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진흥왕

다른 표기 언어 眞興王 동의어 삼맥종, 三麥宗, 심맥부, 深麥夫, 법운, 法雲
요약 테이블
출생 534년
사망 576년
국적 신라, 한국
종교 불교
본관 경주(慶州)
재위 540년∼576년
출생지 신라 금성
능묘 경주 진흥왕릉(慶州 眞興王陵)

요약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통해 신라 영토를 최대로 확대시키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신라 제24대 왕. 지증왕의 손자이며 법흥왕의 조카 겸 외손자로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부이며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551년 법흥왕대에 제정된 건원이라는 연호를 고쳐 개국이라 했는데, 이때부터 진흥왕의 친정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강 하류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고, 가야를 합병했다. <국사>를 편찬했으며, 흥륜사와 황룡사를 지었으며 만년에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법운이라는 이름으로 생을 마쳤다.

목차

접기
  1. 개요
  2. 대외정복
  3. 대내정치

개요

진흥왕릉
진흥왕릉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통해 신라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켰으며,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름은 삼맥종(三麥宗)·심맥부(深麥夫). 아버지는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며,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다.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7세 때 즉위하여 법흥왕비가 섭정했다. 551년(진흥왕 12) 법흥왕대에 제정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고쳐 개국(開國)이라 했는데, 이때부터 진흥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뒤 568년에 대창(大昌), 572년에 홍제(鴻濟)로 연호를 고쳤다.

대외정복

541년 이사부(異斯夫)를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하여 중앙과 지방의 군사업무를 맡겼다.

이후 이사부는 거칠부(居柒夫)와 함께 진흥왕대의 군사작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550년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道薩城:지금의 천안)·금현성(金峴城:지금의 전의)을 놓고 공방전을 벌이던 틈을 타서 이사부를 보내 두 성을 빼앗게 한 다음, 성을 증축하고 갑사(甲士) 1,000명을 두어 지키게 했다. 551년에는 거칠부와 구진(仇珍)·비태(比台)·탐지(耽知)·비서(非西)·노부(奴夫)·서력부(西力夫)·비차부(比次夫)·미진부(未珍夫) 등 8명의 장군을 시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이 작전으로 백제는 한강 하류의 실지(失地) 일부를 되찾았고, 신라는 죽령 이북과 고현(高峴:지금의 철령) 이남의 10군(郡)을 점령했다. 553년 백제가 수복한 한강 유역을 기습하여 점령한 후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을 군주(軍主)로 파견하여 지키게 했다. 554년 백제의 성왕이 대가야와 연합하여 쳐들어오자 관산성(管山城:지금의 옥천)싸움에서 크게 물리쳤다.

이 싸움에서의 승리로 신라는 한강 하류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여 인적·물적 자원의 획득은 물론, 중국과의 직접 교통로를 확보함으로써 삼국간의 역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낙동강 유역의 가야지방에 대해서도 정복사업에 나섰다. 555년 비사벌(比斯伐:지금의 창녕)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했다. 당시 주(州)는 군주가 중앙군을 이끌고 파견되어 주둔하는 전진기지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555년 이전에 비화가야(非火加耶:지금의 창녕)·아라가야(阿羅加耶:지금의 함안)가 신라에 의해 합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야지방에 대한 공략은 557년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지금의 개녕)를 두면서 적극성을 띠었고, 562년 이사부를 시켜 대가야를 정벌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565년에는 완산주를 폐하고 대야주(大耶州:지금의 합천)를 설치하여 백제에 대한 방비를 굳게 했다. 556년 비열홀주(比列忽州:지금의 안변)를 설치하고 사찬(沙飡) 성종(成宗)을 군주로 파견했다. 비열홀주는 동해안 북방의 전진기지가 되었으며 신라는 그 이북까지 진출했다.

진흥왕은 정복사업을 통해 편입된 영역을 직접 순수(巡狩)하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확장된 강역을 확인하기 위해 북한산(北漢山)·창녕(昌寧)·황초령(黃草嶺)·마운령(磨雲嶺) 등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는 군주의 주둔지를 후퇴시키기도 했는데, 568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지금의 서울)를 폐지하고 남천주(南川州:지금의 이천)를 설치했으며 비열홀주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지금의 강원 고성)를 설치했다.

대내정치

545년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 國史〉를 편찬하도록 했다.

이는 중고기(中古期) 신라 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국가와 국왕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544년 흥륜사를 준공했으며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신라의 불교). 549년에는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에서 사신과 함께 신라 유학승 각덕(覺德)을 보내 불사리를 전달하자 백관들로 하여금 흥륜사 앞에서 맞이하도록 했다.

553년에는 월성(月城) 동쪽에 새 궁궐을 짓던 중 황룡이 나타나므로 계획을 바꾸어 절을 짓게 하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고 했다. 그밖에 지원사(祗園寺)·실제사(實際寺)도 지었다. 565년 중국의 진(陳)에서 사신과 함께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 불교의 경론(經論) 1,700여 권을 전달했다.

572년에는 그동안 대외전쟁에서 전사한 사졸들을 위해 팔관연회(八關筵會)를 7일간 열었고, 574년에는 황룡사 장육존상(丈六尊像)의 완성을 보았다. 진흥왕 자신도 불교를 독실히 믿어 두 아들의 이름을 각각 동륜(銅輪)·사륜(舍輪:金輪 또는 鐵輪)이라 했는데 이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굴리는 윤보(輪寶)의 명칭이다. 즉 진흥왕은 자신을 전륜성왕과 같은 지위에 비기고 있었던 것이다. 만년에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법운(法雲)이라는 이름으로 생애를 마쳤다.

한편 〈삼국사기〉에 의하면 576년 원화(源花)·화랑(花郞) 제도를 창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화랑제도는 원시사회 이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청년조직에 기원을 두고 있으므로, 화랑제도의 기원은 그 이전으로 소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576년 8월에 죽자 시호를 진흥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峰)에 장사지냈다.